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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속으로-2084화 (1,864/2,000)

< 2084화 > 몰락한 제국

두근.

마녀였던 고깃덩어리가 맥동했다.

주변에 있는 피와 살점, 내장들이 고깃덩어리를 향해 모여들어 뭉쳐진다.

‘뒤졌는데도 마법은 안 사라졌군. 그나저나 이 낯설지 않으면서도 불쾌한 느낌…. 브라마센. 그 새끼와 비슷해.’

이 세계는 과거 브라마센과 싸워 이긴 적이 있다고 했던가. 그 영향이 금단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 새끼는 계속 손을 쓰는 것 같고.’

문신 세계뿐만이 아니라 내가 사는 지구에도. 당연히 그 외의 차원에도 손을 뻗고 있겠지.

두근. 두근.

고깃덩어리의 맥동이 더 강해진다. 한 번 고동칠 때마다 보이지 않는 파동이 사방으로 퍼지며 피와 살점을 흡수한다.

잠깐 사이에 그 크기가 절반 이상 커졌다.

‘유성검.’

하늘에서 수십 자루의 검이 떨어진다. 팍팍팍! 검들이 지상으로 박히며 고깃덩이를 꿰뚫고 찢어발긴다. 수십 자루의 검에 고깃덩어리가 갈려나가고 있었다.

허나 고깃덩어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핏빛 마력으로 재생을 이어간다.

‘단순히 꿰뚫고 찢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군. 그렇다면….’

유성검의 속성부여.

파지직.

떨어지는 검에 뇌전이 서렸다. 고깃덩어리에 박힌 검에서 뇌전이 흘러나와 고깃덩어리를 감전시키고 불태웠다. 고기가 불타면서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다. 효과는 탁월했다. 고깃덩어리의 재생력이 떨어지더니 불쾌한 마력과 함께 완전히 죽었다.

고개를 돌렸다. 피투성이의 데릭이 도망가고 있었다. 비틀거리는 꼴이 남은 힘도 별로 없는 모양이다. 당연히 빠르지도 않았고.

내 머리 위에 유성검 하나가 나타났다. 대각선 방향으로 비스듬히 눕혀진 상태의 유성검 한 자루가 떨어지지 않고 떠 있다.

손가락을 들어 놈을 가리키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유성검이 쏘아진다.

데릭의 오른쪽 허벅지에 유성검이 박혔다.

“아아아아아악!”

데릭이 비명을 지른다. 일반 유성검 보다 마나를 2~3배는 소모해서 그런지 허벅지에 박힌 유성검은 바로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데릭을 향해 걸어갔다. 바닥에 쓰러진 데릭이 나를 돌아보고 초조해졌다. 안간힘을 써서 허벅지에 박힌 유성검을 뽑아내고 한쪽 다리를 절뚝이며 도망간다. 처절한 발버둥은 나름 보는 맛이 있었다.

손을 까딱인다. 허공에 유성검 한 자루가 나타나 쏘아졌다. 왼쪽 허벅지에 유성검이 박힌다. 쓰러진 데릭은 유성검을 뽑는 대신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자결? 어림도 없지.’

이번엔 유성검 4자루. 데릭의 양쪽 어깨와 양쪽 팔목을 꿰뚫는다. 놈은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기껏해야 혀를 씹는 것뿐. 놈은 기사에 비할바는 못되어도 일반인보다 강했다. 혀 좀 씹는다고 죽을 일은 없다. 느긋하게 놈에게 걸어갔다.

“나, 날 그냥 죽여주십시오! 제발!”

“내가 궁금한 게 있어서 말이야.”

“말씀하십시오! 전부 말해드리겠습니다!”

“마녀가 너희 의뢰인이라고 들었다. 맞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딴 마녀가 전쟁 물자를 뭐 하러 훔치지? 차라리 마을을 몰살시키고 금단인가 뭔가를 연구할 년인 것 같은데.”

“갈레나가 우리를 고용한 건 맞습니다! 그리고 갈레나의 뒤에는 글덴베르흐 자작이 있습니다! 사실상 이 일을 꾸민 건 글덴베르흐 자작입니다!”

“도적에서부터 귀족까지. 아주 가관이군.”

글덴베르흐 자작. 이름을 들어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모르크 백작령 바로 옆이 글덴베르흐 자작령이다. 그리고 모르크 백작에게 돈을 빌려준 귀족 중 하나가 글덴베르흐 자작이다.

“워, 원래라면 안전하게 글덴베르흐 자작령으로 넘어가고 의뢰는 끝났을 겁니다. 기사님들이 쫓아오셔서 마녀에게 부탁했습니다만….”

“결국 우리가 이겼지.”

“그렇습니다! 빼앗은 물자도 전부 있습니다! 저, 절 그냥 죽여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경! 제가 가진 금화도 경에게 드리겠습니다!”

“감히 기사의 명예를 돈으로 살려고 하는가?!”

“힉! 죄, 죄송합니다! 실언했습니다!”

“모르크 백작 각하께서 네놈의 처우를 결정하실 거다. 뭐, 대충 고문당하다 처형당하겠지.”

“크으으으윽….”

귀족의 물건을 강도질하고, 마을에 협박해 기사를 죽이려 하고, 영지민을 마녀에게 바쳤다. 이 짓거리를 하고 편하게 죽기를 바라는 건 미친 짓이다. 내가 귀족이라면 세금을 써서라도 고문할 것이다.

“데이커트 경! 나머지는 처리했소! 우리 쪽 부상자는 없소! 데이커트 경이 마녀를 압도적인 힘으로 처리해 준 덕분이오!”

“마녀를 처리할 때의 경은 전설 속의 영웅 필리우스와 같았소! 혹시 필리우스 경의 비기의 계승자요?!”

제국의 영웅 필리우스 경. 제국에선 기본 상식과도 같아서 나도 대충은 알고 있다. 필리우스는 검의 군주라 칭송받으며, 그의 비기는 천 개가 넘는 검을 만들고 다루는 것이라 한다.

“미안하오. 비기에 관해선 말할 수 없소.”

“음. 이해하오. 이놈이 용병 단장이군. 살아 있어서 다행이오. 자초지종을 알 수 있을 테니.”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놈을 가리켰다.

“이대로 두면 과다출혈로 죽을 것이오. 혹시 포션을 가진 사람 있소?”

“내게 포션이 있소. 어렵게 구한 물건이지만… 모르크 백작 각하께선 인색하신 분이 아니니 나중에 내게 포션을 줄 것이오.”

락구스가 나서서 포션을 이용해 데릭을 지혈했다. 이걸로 일이 일단락됐다.

“경들은 쉬고 있으십시오. 제가 마을로 가서 종자들에게 병사들을 데려오라 명하겠습니다.”

이후 상황 정리는 종자들과 병사들의 몫이었다. 나를 비롯한 기사들은 희희낙락거리며 용병들을 데리고 모르크 백작 성으로 돌아갔다.

용병들은 고문받다 처형당할 것이고, 마을 여자들은 다른 마을이나 도시에서 살아갈 것이다.

모든 상황을 알게 된 모르크 백작은 당연히 분노했다. 그는 바로 글덴베르흐 자작에게 전령을 보냈다. 전령은 일주일 후에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편지 대신 마도구가 들려 있었다. 모르크 백작이 마법 도구를 사용했다.

허공이 물결치더니 글덴베르흐 자작의 모습이 나타났다. 마도구는 반투명한 홀로그램 통신구였던 모양이다.

제국은 마법에 문외한이지 않았다. 깊은 역사가 있는 만큼 쌓인 마법적 지식도 상당하다. 애초에 마탑의 시작점은 제국이기도 했다. 하지만 몰락한 지금. 제국에 있는 마법사는 굉장히 적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마법사도 점점 제국을 떠나는 추세다.

“오랜만이오, 모르크 백작.”

“글덴베르흐 자작! 그대가 내게 어찌 이럴 수가 있소?! 우린 동맹이 아니었소? 그런데 마녀와 용병단을 보내 도적질을 시키다니! 발뺌할 생각은 하지 마시오! 이미 용병 나부랭이가 진실을 토해냈으니!”

“허허. 발뺌? 발뺌할 생각은 없소. 모르크 백작. 이 시대에 영원한 동맹은 없소. 내가 그대에게 이 통신구를 보낸 것은 선전포고를 위함이오.”

“…영지전을 하자는 말이오?”

“그렇소. 알고는 계시겠지만 같은 제국의 귀족들이 영지전을 벌일 때는 중재자가 필요 없소. 뭐, 말이 영지전이지. 실제로는 전면전에 더 가깝지 않소. 물론 그대의 백성들을 죽이진 않을 것이오. 곧 내 백성이 될 테니까.”

모르크 백작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진다.

“이렇게 배신하고도 주변 귀족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소? 우리는 평화를 해치는 그대를 비난할 것이며, 마땅한 처벌을 내릴 것이오!”

“평화? 이 시대에 진정한 평화는 없소. 설령 평화가 있더라도 제국에는 없소!”

“이…! 제국의 귀족으로서 부끄럽지도 않은가!!”

“예전의 제국은 없소. 암군의 시대가 끝나고 제국에게 남은 건 통제를 잃은 힘과 추락한 권위, 제국이란 껍데기뿐이지. 20년 전, 제국은 타협했소. 북쪽의 야만인들을 품으며 영토를 늘렸으나, 야만인은 제국의 문화와 품격을 갖추지 못했소. 그런 주제에 권력에 대한 탐욕은 엄청난 수준이오. 설산에 처박혀 있던 야만인들이 스스로를 귀족이라 부르는 시대라니… 셀브레니타 맙소사. 지금에 와서 저 야만인들의 탐욕은 끝을 모르고 황위까지 노리고 있소.”

글덴베르흐 자작은 진심으로 한탄했다. 연설과도 같은 그의 말에는 기이한 힘이 있었기에 모르크 백작은 마른침을 삼키며 자작의 말에 집중했다.

“서쪽의 계집들은 주제도 모르며 설치고 있소. 여황제? 천박한 단어를 현실로 만들려 하고 있소. 황위는 계집 따위에게 허용되는 자리가 아니거늘. 하물며 마녀 황제라니! 절대로 있어선 안 되는 일이오! 상상만 해도 참담하구려. 누군가가. 누군가가 저 계집들의 머리를 눌러줄 필요가 있소!”

분노를 터트린 자작은 끝이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스스로 복속되기를 청한 남쪽 사막은 어떻소? 그들은 야만인들과 마찬가지로 영토만 제국일 뿐이오. 빌어먹을 모래의 장벽과 모래 폭풍이 제국과 사막을 막아서고 있소. 극복할 의지는 전혀 없으면서!! 그러면서 제국의 자비를 원하고 있소. 물과 음식? 제국은 풍요로우니 마땅히 사막에 물자를 보내야 한다? 같은 제국이니까? 뭐, 여기까지는 그래도 이해할 수 있소. 사막의 척박함이야 이미 유명한 이야기니까. 허나, 그거 아시오? 사막의 중심에서 이단이 퍼지고 있소. 알음알음. 전염병처럼. 마녀 갈레나. 그 금단의 마녀가 사막 출신이오. 금단의 마법을 사막에서 얻었다 하더이다.”

그는 실소를 터트렸다.

“제국의 중심부, 중앙에서는 제국 통치에 아무런 관심이 없지. 황제는 허수아비고, 허수아비의 주인은 돈과 향락에 빠져 있으니…. 제국은 차라리 완전히 멸망하는 것이 나았소. 어중간하게 몰락해서는 안에서부터 썩어가고 있지.”

“……그대가 직접 이 제국의 황제가 되겠다는 건가? 제국을 위해?”

“그렇소. 제국에는 새로운 제국이 필요하오. 내가 황제가 되어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오.”

“더는 못 들어주겠군! 네놈에겐 자격이 없다!”

“자격? 나는 제국에서 태어난 제국인이오. 나는 제국을 위해 맹세한 기사요. 나는 영지를 가진 귀족이요! 자격은 이미 충분하다!! 황제가 되어 야만인들을 몰아낼 것이며, 계집들에게 주제를 알려줄 것이오! 사막의 모래는 이단의 피로 적시리라!!”

분노에 가득 찬 외침! 그에 모르크 백작 또한 노성을 터트렸다.

“이런 어리석은 놈!! 전쟁이다! 글렌베르흐!! 황제 폐하를 대신하여 역적을 멸하리라!!”

“허…. 모르크 백작. 지금 웃고 있는 거요? 아, 아아. 그렇군. 그대는 솔직하지 못하군. 내겐 자격이 없다? 그대에겐 있다는 뜻이었나. 양면 전쟁에 자신 있나 보오. 어디 한 번 해보시오. 물론 그대가 패배하면 그대의 모든 것은 내 것이 되리라.”

뚝.

글덴베르흐 자작의 홀로그램이 끊어졌다. 마도구는 그대로 바스러져 재가 되었다.

모르크 백작은 문을 향해 걸어갔다. 두꺼운 철문을 양손으로 밀어 젖히고는 밖을 향해 소리쳤다.

“전쟁이다! 전쟁을 준비하라! 우리는 전쟁에서 승리하여 더욱 위대해질 것이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준비된 기사와 병사들의 함성이 성내로 울려 퍼진다.

이어 모르크 백작은 나를 돌아봤다.

“데이커트 경. 경에게 부탁이 있소. 코튼 경과 함께 나의 전령이 되어주시오. 동맹들이 필요하오. 아마 글렌베르흐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어떻게든 방해하겠지. 이미 놈에게 붙은 자들도 있을 테지. 위험한 일이니 그대와 같은 명예로우면서도 강한 힘을 갖춘 기사여야 하오. 날 도와주시오.”

정말로 위험한 일인가? 아니면 충성을 바치지 않은 나를 스파이로 보고 밀어내려는 건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따분한 전쟁 준비보다는 괜찮겠지.

나는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기꺼이 수행하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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