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5화 > 2085. 몰락한 제국
코튼과 함께 말을 타고 가도를 내달렸다. 그러다 상인이나 여행자, 용병들과 마주치기도 했다. 물론 그들 전부 고개를 숙이며 경의를 표한다. 기사는 귀족 아래의 준 귀족인 신분이라 당연한 일이었다.
말을 타고 달리는 건 마냥 지루하지 않았다. 간간이 몬스터가 튀어나와 공격해 왔다. 야생의 고블린이나 코발트 같은 놈들이다. 나와 코튼의 검에 3분도 지나지 않아 학살당했지만.
“역겨운 몬스터들은 죽여도 죽여도 사라지지 않는구려. 수고했소, 데이커트 경.”
“수고랄 것까진 아니오. 오늘만 다섯 번째 습격이군. 근처에 몬스터가 많은 듯한데 토벌하지 않는 거요?”
“트롤이나 오크 같은 놈들이 있으면 백작 각하께서 병력을 이끌고 토벌하오. 고블린이나 코발트는 무기가 있으면 성인 남성도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으니 내버려 두는 편이오. 애초에 영지민들은 마을이나 도시를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지 않소. 이놈들도 사람이 사는 곳엔 잘 내려오지 않는지라 토벌대가 구성되는 일은 적소.”
지구와 달리 이 세계는 몬스터를 맹수 취급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들은 몬스터가 있는 게 당연한 것이니까.
“모르크 백작 각하의 편지를 전해야 할 귀족인 트리웨이 남작은 어떤 인물인지 아시오?”
코튼에게 물었다. 얽히고 얽힌 여기 귀족들의 관계에 대해 잘 모르기도 했고, 말을 타고 가려니 심심했다.
“각하의 셋째 부인의 아버지. 즉, 각하의 장인이시오.”
“과연. 가족이라면 도와주겠군요.”
영지전이 임박한 모르크 백작이 살려면 동맹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다시 말해 동맹의 힘이 있으면 양면 전선을 피할 수 있다.
가깝고 길도 잘 닦여 있었던지라 이틀 만에 트리웨이 남작령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백작령에 비하면 확실히 규모가 작긴 해도 있을 건 모두 있었다. 나름 발전하는 도시인 건 틀림없다.
우리는 저택에서 트리웨이 남작을 만났다. 몸이 마른 남자였는데 눈빛이 형형했다. 그의 자녀와 하인들은 남작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권위적인 인물 같다.
“모르크 백작의 전서를 가져왔다지? 트리웨이는 경들을 환영하는 바이오. 경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해 두었소. 부족한 게 많겠지만 지금은 푹 쉬시오.”
트리웨이 남작은 편지를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편지 봉인을 풀고는 내용을 읽었다.
“글덴베르흐 자작과의 전쟁이라…. 드디어 그 검은 속내를 드러낸 것인가. 전쟁은 마뜩잖지만 해야 할 때는 해야 하는 법. 군대를 소집하라!”
트리웨이 남작이 소집령을 내렸다. 나는 차분한 그에게 물었다.
“전쟁이 일어날 걸 알고 계셨습니까? 편지를 읽고 군대를 소집하기까지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군요.”
“본인은 평화를 사랑하오. 허나 시대가 평화를 원하지 않소. 그러니 평소에 준비해 둬야 하지 않겠소? 모르크 백작에게 전해주시오. 베로프린과의 영지전이 진행되는 동안 후방을 지켜드리리다.”
모르크 백작의 계획이 눈에 보인다.
영지전에 승리하고 베로프린으로부터 5만의 영지민들과 전쟁 물자를 받아 글렌베르흐 자작을 공격한다. 5만의 영지민을 무장시켜 전장에 밀어 넣는다면 승리는 거의 확실하겠지.
결국 중요한 건 승리다. 승리자가 모든 걸 독식하리라.
트리웨이 남작령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에 다시 길을 떠났다.
다음으로 만난 건 올스레그 남작. 콧수염을 기른 남작은 차가운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모르크 백작의 뜻은 잘 알았소.허나 모르크 백작은 그 속내가 음흉하여 함께 할 수 없소. 반면 글덴베르흐 자작에겐 대의가 있소. 나는 글덴베르흐 자작을 지지하오. 그러니 지금 당장 내 영지에서 나가주시오.”
문전박대.
우리는 물 한 잔 얻어먹지 못하고 쫓겨나야 했다. 코튼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적이 늘어난 꼴이니까.
“데이커트 경. 서둘러야겠소. 다른 귀족들의 동향을 확인해야 하오!”
그렇게 사흘 동안 달려 4명의 귀족을 추가로 만났다. 결과는 반반이었다.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전쟁이 더 커지겠군.’
모르크 백작이나, 글덴베르흐 자작이나, 이놈들이나 모두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몰락한 제국에 진정한 평화는 없었다.
말이 걸어갔다. 달리는 데 특화된 말이라고 해도 지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말도 생명이니까.
그런데 오늘따라 옆에 있는 코튼의 안색이 어두웠다.
“코튼 경. 얼굴이 안 좋군. 다가온 전쟁 때문이오? 아니지. 이건 코튼 경에 대한 모욕이군. 미안하오.”
“……데이커트 경. 진심으로 모르크 백작을 섬길 마음은 없소?”
“이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운명의 주군을 찾고 있소. 모르크 백작 각하는 뛰어난 귀족이나, 운명이란 느낌이 들지 않소. 약속했던 대로 이번 영지전에는 참가해서 모르크 백작을 승리로 이끌 것이오. 그리고 서임장을 받은 뒤에 떠나게 되겠지.”
“……데이커트 경. 부탁이 있소. 서임장을 포기하고 지금 떠나시오. 경은 서임장이 없어도 한 사람의 뛰어난 기사요. 기사의 비기를 가졌고 견고한 갑옷과 검으로 무장했소. 서임장이 없다 하더라도 경은 명예를 아는 기사요.”
“서임장이 없으면 무시당하오. 코튼 경이 그러지 않았소?”
“그때 일은 잊어 주시구려. 내 실수요. 경은 젊소. 서임장을 얻을 기회가 또 올 것이오. 그러니 이번에는 포기하시오.”
서임장이 없는 기사는 공식적으로는 기사가 아니라는 것을 기사인 코튼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서임장을 포기하고 떠나라?
짐작 가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모르크 백작이 나를 죽이라 했소?”
“그러하오.”
“모르크 백작에겐 실망했군. 명예를 아는 귀족이라 생각했소만….”
“글덴베르흐 자작의 선전포고는 각하께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소. 각하는 현재 글덴베르흐 자작이 자신의 영지에 어떠한 수작을 부렸다고 의심 중이오. 가장 의심스러운 건….”
“나겠지. 전쟁이 터지기 전에 갑자기 나타났으니…. 모르크 백작은 날 믿지 못했군.”
무엇보다 사람을 시켜 조사시켰으면 내 행적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데이커트란 기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르크 백작은 코튼을 시켜 불안의 싹을 없애버리기로 한 것이다.
“경은 그걸 왜 내게 전부 말하는 것이오? 경이라면 조용히 날 죽일 수 있었소. 명예 때문이오?”
내가 잘 때 몰래 다가와 검으로 찌르거나, 내가 마시는 물에 독을 타는 등. 죽이는 방법은 많았다. 솔직히 최근에 방심하고 있었다. 코튼은 내게 첩까지 갖다 바친 놈이니까.
“데이커트 경은 내 목숨을 구해주지 않았소? 그 마을에서 수면제 당해 쓰러진 날, 데이커트 경이 없었다면 난 죽었을 거요. 그러니 이미 떠나시오.”
모르크 백작이 내 뒤통수를 쳤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모르크 백작을 죽여버리고 싶다. 허나 지금 모르크 백작이 죽으면 영지전이 망한다. 베로프린이 승리하고 박수호는 성장할 것이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박수호가 나보다 먼저 S급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그건 반드시 막아야했다.
“나는 이미 모르크 백작과 약속했소. 영지전까지 그를 위해 싸우고 서임장을 받겠다고. 지금 떠난다면 명예를 버리는 짓이오.”
“명예는 다시 쌓을 수 있소. 경이라면 어디를 가든 환영받을 것이오.”
“그런다고 한번 버린 명예가 돌아오는 것도 아니잖소.”
“…정말 그래야겠소?”
“코튼 경. 날 막을 수 없었다고 보고하면 되오. 모르크 백작도 평판을 신경 쓰일 테니 대놓고 날 죽이진 않을 것이오.”
“내가 왜 지금 여기서 말하는지 아시오? 이 앞에는 병사와 기사들이 도적 차림으로 매복해 있소. 지금 여기서 돌아가지 않으면 경은 도적에게 살해당하는 것이오. 굉장한 불명예지.”
“글쎄. 질 것 같지 않소만.”
“오만. 아니, 자신감이 뛰어나구려. 다른 기사도 아닌 데이커트 경이니 이해하겠소.”
코튼이 말에서 내리며 검을 뽑았다. 나는 여전히 말에 탄 채로 그를 바라봤다.
“데이커트 경! 검을 뽑으시오!”
“여기서 싸우겠다는 거요? 이 앞에 매복이 있다 하지 않았소?”
“나는 내 명예를 위해 행동할 뿐이오.”
“…그렇군. 코튼 경. 그대는 진정한 기사요.”
말 머리를 돌린다. 말의 배를 차자 말이 울부짖으며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데이커트 경?!”
뒤에서 당황한 코튼이 큰 목소리로 날 불렀다. 무시하고 질주했다.
지나칠 정도로 고요한 숲길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옆에 있는 나무의 몸통을 꿰뚫고 창 한 자루가 나타났다. 창은 정확히 날 노렸다.
검을 들어 창을 쳐낸다. 곳곳에 숨어 있던 도적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정확하게는 도적인 척하는 기사와 병사들.
‘총 33명. 기사는 3명이고 나머지는 병사로군.’
코튼까지 합하면 기사가 4명. 병사 30명은 어설프다. 그 역할은 고기 방패에 가깝다. 여차할 땐 희생시켜 틈을 만들려 할 것이다.
확실하게 나를 담그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점프하듯 날아올라 말에서 내렸다. 여기서 말은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창이 일직선으로 날아온다. 앞에 나무가 있어도 관통하여 전진한다. 결코 멈추지 않는 창. 검을 위로 올려 베며 창을 쳐냈다. 창은 그제야 힘을 잃고 허공에서 지상으로 떨어진다.
[천안(天眼)을 개안합니다.]
내 눈에는 창을 던진 기사가 있는 방향이 보였다. 떨어지는 창을 쥐고 날아온 방향 그대로 던졌다. 기사는 피하지 못하고 심장이 꿰뚫려 죽었다.
뇌천류(雷天流) 전자기파(電磁氣波).
나를 중심으로 전자기파가 퍼진다. 직접 두 눈으로 보지 않아도 숨어 있는 놈들의 위치가 직접적으로 느껴진다. 의외로 눈으로 직접 보는 것보다 편하다.
‘땅 아래에 숨어 있는 기사가 하나 있군. 이것도 기사의 비기인가? 대체 기사의 비기가 뭐길래 이런 것도 가능하게 하는 거지? 확실한 건 비기는 무술이 아니야.’
유성검.
하늘에서 푸른 뇌전을 휘감은 검 한 자루가 지상으로 낙하한다.
콰아아앙!
땅에 박힌 유성검이 번개와 함께 폭발한다. 땅이 뒤집어지며 크레이터가 생겼다. 땅속에 숨어 있던 기사가 산산조각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가서 놈을 죽여라! 놈을 죽이는 자를 내 종자로 삼겠다!”
“와아아아아아아!”
숨어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돌격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