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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속으로-2086화 (1,866/2,000)

< 2086화 > 2086. 몰락한 제국

여긴 숲이었다. 달려드는 병사들을 피하는 건 녹록지 않았다. 그리고 피할 생각도 없었다.

검기가 맺힌 검을 휘두른다. 달려들던 병사의 몸이 두동강 난다.

깡!

병사의 검과 창이 갑옷을 때렸다. 충격이 느껴지긴 했으나 갑옷은 멀쩡했다.

“갑옷을 벗겨!”

“관절 부위를 노려!”

“눈! 눈을 찔러!”

악에 받친 병사들은 나를 두려워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마치 나를 죽이지 않으면 자기들이 죽는 것처럼.

검을 휘두른다.

서걱.

그들의 피와 내장을 뒤집어쓰며 살육을 이어 나간다.

‘어딨지?’

작은 꼬챙이로 내 눈을 노리던 병사의 머리를 한 손으로 붙잡아 터트리면서 계속해서 주변을 살폈다.

기사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의 기운을 완벽하게 숨기는 게 기사의 비기인 것 같다.

‘직접 보고 찾기 힘들군. 죄다 도적 차림새다.’

천안을 이용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천안을 통해 투시할 수 있더라도 기사의 얼굴을 모르니까.

마나의 흐름을 본다? 소용없다. 놈은 이미 완벽하게 자신을 숨기고 있었다.

‘그냥 보이는 놈들을 다 죽이면 되겠지. 어차피 다 죽이려고 했어.’

복잡한 생각은 멈추고 살육에 집중했다.

검을 들고 휘두른다.

적이 방패를 들면 방패째로 벤다. 적이 검을 들면 검과 함께 벤다. 누구도 내 검을 피할 수 없었다.

개수작을 부리는 놈들도 있었다. 당하지 않았음에도 바닥에 쓰러져 죽은 척하는 놈들. 나는 친히 그놈들의 머리통을 밟아 터트렸다.

죽이고 죽여 발아래의 피 웅덩이가 발목까지 차오른 순간이었다. 오른쪽 어깨에 화끈함이 느껴졌다. 손에 힘이 풀리며 검이 떨어진다.

어깨에 검을 박은 놈이 입을 벌리며 실실 웃고 있었다.

“대단하더군. 네 힘은 같은 기사가 봐도 전율적일 정도다. 그런데 어쩌나. 이 검은 갑옷을 무시하고, 검날에는 독이 묻혀 있는데?”

“넌 기사가 아니라 암살자로군. 기사로서 부끄럽지도 않나?”

“내가 실리를 추구하는 편이라서. 사실 암살자인 것도 맞아. 기사랑 겸직하고 있지. 그나저나 꽤 버티는군. 평범한 인간은 10초도 못 버티는 맹독인데… 과연. 강한 기사라고 하더니 틀린 말은 아니군. 허나 그것도 이제 한계겠지.”

확실히 몸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오른팔은 아예 감각조차 없다. 죽음이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네가 죽는 모습을 천천히 감상해 주마. 덤으로 너의 비기도 내가 가져가마. 흐흐. 너 정도 기사의 비기라니… 아주 기대되는구나.”

[천심(天心)을 발동합니다. 1분 동안 지속됩니다.]

“남의 비기도 가져갈 수 있는 거냐?”

“마법사의 도움이 있다면… 아니, 잠깐. 왜 아직도 말을 하는 거지?!”

“그냐 지금 나는 중독 상태가 아니니까.”

왼손으로 놈의 머리를 붙잡아 땅바닥에 처박았다. 놈의 머리가 그대로 터져 죽었다. 암살자 출신이라더니 맷집이 약했다.

‘비기에 대해 궁금하긴 했는데… 뭐, 됐나.’

비기가 없어도 기사 이상으로 강했으니까.

나머지 병사들도 모조리 죽였다. 머릿속으로는 모르크 백작을 어떻게 죽여야 할지 생각했다.

“이럴 수가…!”

코튼이 나타나 참혹한 현장을 둘러보고 경악했다. 진정한 기사인 그는 심호흡을 하더니 말에서 내려 검을 뽑아 내게 겨누었다.

“데이커트 경! 경의 강함을 알았소! 이제 우리가 결착을 낼 때요!”

나는 왼손으로 검을 들었다. 오른손은 어깨 부상 때문에 검을 쥐기 힘들었다. 전투가 끝나고 포션으로 치료할 생각이다. 다른 습격자들이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방심은 금물이다.

“경은 도망칠 수 있는데도 도망가지 않았군. 날 이길 자신이 있는 거요?”

“없소. 이미 경과 나는 결투를 하지 않았소. 근력만 따지면 비등비등하지만… 경의 경험과 비기. 심지어 장비의 질까지 경이 모두 우세하오. 내가 경을 이길 가능성은 없는 거나 다름없겠지.”

“알고 있으면서 왜?”

“나는 기사이기 때문이오!”

코튼의 검에서 검기가 불꽃처럼 타오른다. 동시에 그의 왼쪽 어깨에서 세 번째 손이 돋아난다. 코튼의 비기다. 세 번째 손은 코튼의 허리춤에서 짧은 칼을 꺼내 쥐었다. 코튼이 달려든다.

나는 최대한 빨리 전투를 끝내기로 했다.

[가속을 사용합니다. 10분 동안 유지됩니다. 남은 스택: 11]

빠르게 달려가서 그의 대검을 비스듬히 받아서 쳐냈다. 힘의 방향과 중심을 교묘하게 쳐내는 일종의 잔기술이다.

경험에 따라, 어쩌다 보니 습득하게 된 이 잔기술은 제국의 기사들을 상대로 효과적이다. 그야 제국 기사들의 검술 대부분은 무식하게 힘에 의존하는 검술들이 대부분이니까.

그의 세 번째 손이 움직인다. 이럴 때를 위한 세 번째 손이니 당연했다.

[시간 가속을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6]

내 시간이 빨라진다. 반대로 그의 세 번째 손이 느릿하게 느껴졌다. 그가 이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면 전투는 내 일방적인 승리로 끝날 것이다.

까앙!

코튼이 내 검을 막아냈다. 우연이 아니다. 그의 세 번째 손이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시간 가속 중에 내게 이끌리듯 그 또한 가속하고 있는 것이다.

공격을 이어갔다. 코튼은 뒷걸음질 치며 내 검을 막아내나 싶었으나, 결국 검을 놓쳤다.

[시간 가속이 끝났습니다.]

때마침 시간 가속도 끝났다. 나는 마무리 하듯 검면으로 그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코튼이 비틀거리다 주저앉았다.

“커헉! 왜, 왜 죽이지 않는 것이오?!”

“경은 진정한 기사요. 여기서 죽기 아깝지.”

나는 검에 묻어있는 피를 털어내고 검집에 넣었다.

“경은 돌아가시오. 내가 살아 있다면 곤란할 테니… 모르크 백작에겐 내가 죽었다고 말하시오. 음. 그냥 가면 안 믿을 수도 있으니 내 검을 드리겠소.”

데이커트의 신분이 없어져도 상관없었다. 처음부터 대충 만든 신분이었으니까. 다른 신분으로 갈아타면 그만이다.

‘슬슬 지구로 돌아갈 시간이기도 하고. 몰래 지구로 돌아가서 생활하는 것도 지겨워지던 참이야.’

일단 박수호의 영지전은 확실하게 방해한 뒤에 모르크 백작을 죽일 것이다.

“…하. 결정했소. 나는 경을 따르겠소. 아니, 따르겠습니다.”

“나를?”

“경을 이기지 못한 순간부터, 모르크 백작의 명을 완수하지 못한 순간부터 기사로서의 나는 죽은 거나 다름없습니다. 부디 경을 따르게 해주십시오.”

“…나 또한 기사로서의 나는 죽었소. 아마 용병이나 도적이 되겠지. 그런데도 따라오겠다고?”

“경을 따라가면 더 재밌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판단했습니다. 경은 이미 저를 매료시켰습니다. 도적이니, 용병이니… 다 좋습니다. 기꺼이 진창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경. 아니, 주군. 당신의 시작은 미미하나 그 끝은 창대할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경의 가족들은? 가족은 버릴 것이오?”

“가족들에게 해줄 것은 모두 해줬습니다. 내가 사라지더라도 남긴 재산을 가지고 잘 살 테죠.”

눈빛을 보면 안다. 코튼은 내가 뭐라 해도 따라올 작정이다.

“……마음대로 하시오.”

코튼을 끝까지 데려갈 생각은 없다. 데려갈 수도 없었다. 적당한 곳에서 헤어지면 그만이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일단 거처부터 구해야지 않겠소. 근처 적당한 곳에 자리 잡고 앞으로의 일을 계획해야겠지.”

“근처에 산적들이 자리 잡았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일단 그곳을 점령하고 산적들을 부하로 삼는 게 어떻겠습니까?”

“산적들을? 그놈들이 어디에 쓸모 있겠소.”

“잡일을 시키면 됩니다. 나중에 노예로 팔아버리면 제법 돈 좀 만질 수 있을 겁니다.”

나는 감탄했다. 이게 기사의 사고방식인가?

“정말 좋은 생각이오. 당장 실천합시다!”

우리는 산적의 거처를 찾아 점령했다. 산적 놈들은 대부분 도적 출신의 범죄자 놈들이었다. 산적이나 도적이나 뭐가 다른지는 잘 모르겠다.

***

산적 두목을 맨손으로 찢어 죽이고 산적 두목의 자리를 차지한 지 이틀째.

별 저항 없이 내 부하가 되기로 한 산적들이 다급히 내 앞으로 달려왔다.

“두목! 기사와 바바리안이 나타나 저희를 죽여대고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부하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옆에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던 코튼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사와 바바리안? 제국인과 야만인이 함께 나타난 거냐? 이거 참 특이한 조합이로군. 주군. 제가 가서 썰어버리겠습니다.”

“그래라.”

코튼이 대검을 챙겨 들며 부하에게 물었다.

“어이. 그 기사와 바바리안은 뭐 하는 것들이냐? 어디 출신이지?”

“모, 모르겠습니다. 예쁘장한 년들이 보통이 아닙니다!”

“예쁘장한 년들?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멍청한 놈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기사와 여자 야만 전사? 이건 못 참지. 여기사 대부분은 우락부락하고 못생겼다고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가자. 안내해라.”

결론적으로 말하면 대박이었다.

여기사는 정석이었다. 화려한 금발에 도도한 얼굴. 코튼보다 훨씬 뛰어난 강인한 기운까지. 날 능욕해달라는 페로몬을 마구잡이로 뿌리고 있는 여자였다.

여자 바바리안 또한 정석이었다. 커다란 체구, 커다란 가슴, 근육질의 몸. 허나 이목구비는 상당히 뛰어났다. 곰 가죽옷에 뼈로 된 경장을 입었다. 양손에는 도끼를, 등에는 커다란 대검을 착용했다. 복근은 알로 가득 찼고 드러난 피부에는 작은 상처들과 기형학적인 문신들이 있었다. 그야말로 야만 전사!

‘둘 다 먹음직스러운데? 왜 갑자기 여기에 나타난 거지?’

“아아아악!”

산적 하나가 쓰러진다. 그녀들의 주위로 10구가 넘는 시체들이 즐비해 있었다. 모두 산적들이다.

“두, 두목! 이년들 보통이 아닙니다! 도와주십시오!”

여자들이 산적들을 죽이다말고 나를 쳐다본다.

“기사처럼 갑옷을 입은 주제에 두목이라고? …그렇군. 도망친 기사인가. 기사주제에 산적이라니 부끄러운 줄 알아라!”

여기서가 일갈하며 피에 묻은 검을 내게 겨누었다.

여바바리안은 손에 든 도끼를 빙글빙글 돌리며 나를 빤히 바라봤다. 이내 씩하고 웃는다.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은 삐죽삐죽하고 빳빳했다.

“느껴진다. 저자는 강하다. 전사가 확실하다! 저 전사를 이기면 난 더 강해지겠지!”

여바바리안이 내게 도끼를 던졌다. 코튼이 빙글빙글 날아오는 도끼를 쳐냈다.

“코튼. 저 야만인은 네가 맡아라. 여기사는 내가 제압하겠다. 반드시 제압만 하도록.”

“흐흐. 물론이지요. 저 여자들은 상등품입니다. 특히 여기사는 고귀함이 느껴지는군요. 귀족 출신이 확실합니다. 전투 후가 기대되는군요.”

“…….”

코튼, 이 새끼. 선 넘으려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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