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7화 > 2087. 몰락한 제국
코튼은 자신감을 비치며 여바바리안 앞으로 나섰다. 허나 대검을 쥔 그의 양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 원인이 방금 쳐낸 도끼 때문이란 건 뻔했다.
‘근력만 따지면 코튼의 힘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군.’
여바바리안이 꾸준히 단련한 근육을 가졌다고 해도 비정상적으로 강한 힘이었다. 코튼은 힘만 따졌을 경우 나와 비슷한 수준이니까.
‘따지고 보면… 이 제국에서 여자 둘. 그것도 미녀들이 돌아다니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여자들이 들고 일어섰다는 제국의 서쪽은 모르겠지만, 내가 있는 이 지역은 전형적인 남존여비였다. 대우받는 여자는 귀족의 영애거나 여기사뿐이다. 둘 다 희귀한 존재다.
“비켜라! 네놈에겐 관심 없다!”
여바바리안이 소리친다. 어찌나 목소리가 큰지 제법 떨어져 있는 내 눈살이 절로 찌푸려질 정도다. 그래도 코튼을 무시하고 내게 바로 달려들지 않았다. 곧 그녀의 도끼와 코튼의 대검이 허공에서 아우러졌다.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검이 날아온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11]
찰나를 사용해 고개를 옆으로 꺾어 검을 피했다. 갑옷을 입고 있긴 하나 날아온 검에는 검기가 맺혀 있었다. 찰나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반응이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즉사했겠지.
‘절호의 기습 타이밍이긴 한데… 그렇다고 기사가 무기인 검을 던져?’
평범한 기사의 사고방식이 아니었다. 자고로 제국의 기사란 자기 무기를 자신의 분신처럼 여겼다.
감탄의 눈으로 여기사를 바라봤다가 멈칫했다.
그녀는 검을 쥐고 있었다.
처음부터 검이 2개였나? 그럴 리가 없다. 나는 내 뒤로 날아가 나무에 박힌 검을 확인하듯 쳐다봤다. 검이 잿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마법은 아닌 것 같고. 여기사가 가진 비기인가?’
내가 가진 스킬인 유성검과 비슷했다. 물론 속단할 수는 없지만.
여기사가 내게 달려온다. 빠르다. 그 움직임에 규칙성이 느껴진다. 마구잡이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기준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가문에서 내려오는 검술 같은 걸 배운 모양이다.
거리를 좁히는 그녀는 당장이라도 검을 휘두르는 척 팔의 자세를 잡았다.
‘시선 처리까지 한 페이크군.’
허나 안 통한다. 예민해진 내 기감에 마나가 다른 곳에서 요동치는 게 느껴졌으니까.
허공에서 검 3자루가 만들어지고 내게 날아온다. 각각 다른 모양의 검이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검기가 실려있다.
‘제법이군. 어지간한 놈들은 이 공격에 다 당하겠어.’
유성검.
허공에 유성검 3자루를 만들어 쇄도하는 검을 향해 쏘았다. 내구성 면에서 유성검이 확연히 떨어졌다. 부딪치자마자 박살 나 파편이 됐으니까. 허나 날아오는 검의 궤도를 바꾸기엔 충분했다.
여기사의 순간 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녀가 검을 휘둘렀고, 나는 검으로 막아냈다. 검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내 검을 긁어내듯이 밀어내고 다음 검격을 이어간다. 나는 집중하며 검격을 막아냈다.
그녀의 검술은 숙련되어 있었다.
“그게 너의 비기인가?”
“그런데?”
“나와 비슷하군. 필시 비기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비기 일터. 뿐만이 아니라 신체 능력과 검술까지 뛰어나군. 제국에 너처럼 뛰어난 기사는 드물지. 그 좋은 실력을 갖고 대체 왜 산적질이나 하는 거냐?”
“사람에겐 누구나 사연이 있는 법이지. 나는 네 사연이 더 궁금하다.”
검이 부딪칠 때마다 푸른 불꽃이 튀었다. 검기와 검기가 부딪치며 흩날리는 것이다. 그녀는 물론 그냥 싸우지 않았다. 중간중간 허공에 검을 만들어 쏘아낸다. 나는 유성검으로 검을 비껴내며 대응했다.
‘장기전으로 가면 수월하게 이기겠군.’
그냥 검도 아니고 검기가 맺힌 검을 만들어 대고 날려댄다. 딱 봐도 마나 소모가 심해 보이는 기술이다.
그녀의 검이 더 빨라졌다. 검에 실리는 힘도 강해졌다. 이 전투를 빠르게 끝내고 싶어 한다. 즉, 초조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돌연 검술이 바뀌었다. 산처럼 강직하던 검이 바람처럼 변칙적으로 변했다.
‘광명승천도 세계에서 비슷한 검술을 겪은 적 있지.’
그에 당황하지 않고 대응했다. 검술에 재능이 없어도 남들이 쌓을 수 없는 경험이 내게 있었다.
검술이 또 바뀌었다. 이번에는 오직 속도에 집중된 쾌검. 무엇보다 익숙한 종류의 검술이었기에 간단히 막아냈다. 이어서도 검술이 바뀐다. 호흡, 간격, 무릎의 각도, 다리의 자세 등이 순식간에 바뀌는 것이다.
‘주서현에 버금가는 검술의 천재인가?’
아니, 그런 느낌이 아니다.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있었다. 익힌 검술에 비해 정작 실속이 없다고 할까. 경험이 부족한 것 같았다.
‘주서현이었다면 검술의 장점만 골라 자기식으로 만들었겠지.’
여기사가 이를 악물었다.
검은 무겁다. 일반인이라면 검을 연속으로 10번 휘두르는 것도 힘들다. 하물며 지금은 전투 상태. 목숨이 걸렸기에 육체의 긴장은 최대치에 달한다. 체력이 미친 듯이 빠지는 건 당연했다.
검술 변경 12번째. 그녀와 나는 검을 200번 이상 휘둘렀다. 나도 숨이 가빠지지만, 여기사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여기사는 호흡을 갈무리하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으니까.
“…대체 왜? 왜 내 검술이 통하지 않는 거냐?!”
“실속이 없으니까? 네 검술은 적당히 눈대중으로 배운 검술 같군. 차라리 검술 하나에 집중했으면 더 나았을 것 같군.”
“큭, 닥쳐라! 날 조롱하지 마라! 아직 승패는 나지 않았다! 내가 지쳤듯이 너도 지쳤지! 내가 모를 것 같나?”
여기사가 흥분해서 달려든다. 내 도발에 그녀의 집중력이 흔들린 것이다. 호흡은 망가지고 검의 기세는 죽었다.
‘이때를 기다렸다.’
검으로 검을 막아낸다. 검을 돌리며 이끌자, 여기사가 검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내 쪽으로 한 발짝 내밀었다.
마나를 담은 주먹을 그녀의 복부를 향해 찔러넣었다.
쾅!
거대한 충격음과 함께 그녀의 눈동자가 위로 돌아간다. 이어 그녀의 손에서 검이 떨어지고 몸이 쓰러진다. 나는 그녀의 몸을 손으로 받아냈다.
“적당히 강하다 보니 상처 없이 생포하기 힘드네.”
나는 고개를 돌려 여바바리안과 코튼을 확인했다.
“허.”
코튼이 쓰러져 있었다. 그 머리 위에는 여바바리안의 오른발이 올라가 있었다. 코튼은 비기를 쓰고도 졌다. 여자 바바리안의 오른팔에서 피가 흘렀으나 심하진 않다.
“코튼은… 안 죽었나? 왜 안 죽였지? 야만인들은 사람을 가차 없이 죽인다던데.”
“헛소문이다. 우리는 인간을 이유 없이 학살하지 않는다. 뭐, 원래 적은 죽이는 편이긴 하지만… 너도 그 녀석을 죽이지 않았잖냐.”
내가 여기사를 죽이지 않았으니, 코튼을 죽이지 않았다.
“단순명료하군.”
“복잡할 이유가 있나?”
“없지. 결국 강한 놈이 다 가지니까.”
나는 여기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주위에 있는 산적들은 이미 겁에 질려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여바바리안을 향해 전진했다.
“우랴아아아아아!!”
참으로 바바리안 다운 함성을 내지르며 돌격해 왔다. 그녀가 양손에 쥔 도끼의 날에 붉은 검기가 치솟았다.
나는 검으로 그녀의 도끼를 받아내는 척하다가 피했다. 부우웅. 도끼가 살벌한 기세로 허공을 갈랐다. 그 여파가 어찌나 강한지 내 몸이 뒤로 날아갈 정도였다. 당연히 평범한 공격이 아니다.
‘바람? 아니, 힘과 관련된 비기인가. 저건 절대 못 막았을 힘이다. 피하길 잘했군.’
덕분에 반격이 스무스하게 이어졌다. 왼 주먹이 그녀의 단련된 복근을 때린다. 마나를 담은 주먹. 그 충격이 전신으로 퍼져 결국은 여기사처럼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지만… 바바리안은 버텨냈다.
그녀가 히죽 웃으며 도끼를 치켜든다.
“주먹이 좀 맵긴 하군. 그러나 날 쓰러뜨릴 정도는 아니.”
“뇌전.”
파지지지직!
왼 주먹에서 시작된 푸른 뇌전이 그녀의 육체를 질주했다.
나보다 큰, 키 190cm의 거대녀는 전기 찜질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까뒤집은 채 뒤로 넘어졌다.
‘훈련을 겸해서 뇌전이나 찰나 같은 능력은 안 쓰려고 했는데…. 중간에 힘들어졌단 말이지.’
나는 왼 손목을 돌렸다. 그녀의 몸이 얼마나 단단했던지 손목이 뻐근했다.
나는 양손으로 그녀들을 들고 얼타는 산적들에게 명령했다.
“코튼 들고 돌아와라. 거처로 돌아간다.”
“네, 넵! 두목! 그, 근데 두목. 그 여자들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날 건드린 대가를 치르게 해줘야지.”
“그, 그럼 저희에게도 기회가 오겠군요…?”
“당연하지. 내가 맛본 뒤에 너희에게 넘겨주마. 뭐, 일주일 정도는 진뜩히 맛볼 생각이긴 하다만.”
“일주일이나? 아, 아닙니다! 기다리겠습니다! 기회만 주십시오! 헤헤….”
지금부터 산적 새끼들의 수명은 일주일이었다.
기절한 여자들은 내가 머무는 집으로 데려왔다. 남자뿐인 산적 소굴이라 다른 놈들에게 맡길 수 없었다. 산적 놈들을 믿느니 지나가는 개가 더 믿음직스러우니까.
특수 노예용 족쇄를 채우고 수갑과 사슬까지 이용해 구속한 뒤 서로 다른 방에 넣었다. 방에 홀로 감금됐다는 것만으로도 심리적 압박은 강해지니까.
***
“주군!”
여자들보다 코튼이 먼저 일어났다. 코튼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내 앞에 부복했다.
“그 야만인 여자에게 패배한 건… 제 실수입니다. 그 여자가 그렇게 강한 힘을 사용할 줄 몰랐습니다. 필시 기사를 죽이고 빼앗은 비기이겠지요. 다시 싸운다면 패배하지 않습니다! 그 여자와 다시 싸우게 해주십시오!”
“코튼. 그 여자는 내게 지고 구속된 상태다.”
“그 여자의 능욕을 제게 맡겨주십시오! 이 치욕을 반드시 그 야만인에게 갚고 싶습니다! 일주일만 주시면 주군께 복종하는 개새끼로 만들겠습니다!”
나는 코튼을 보며 혀를 찼다.
“선 넘네.”
“…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11]
검을 소환해 손에 쥐고 코튼의 명치에 찔러넣었다.
“주, 주군? 어, 어째서… 입니까?”
“그 여자들은 내 거다. 주군의 여자들을 탐하면 쓰나.”
“마, 말씀하셨다면 그런 일을… 없었을… 겁니다…!”
“말하지 않았어도 알아차려야지. 그리고 넌 그랬어도 선을 넘었을 거다. 그간의 정을 생각해 한 번에 죽여줬으니 감사하도록.”
“이 발정 난 개새끼가…!”
코튼이 죽기 직전에 날 욕했다. 그 보답으로 코튼의 몸을 토막 내 꼬챙이에 꽂아 집 앞에 전시했다. 산적들이 벌벌 떨며 감히 내 집 근처로 다가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