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0화 > 2090. 몰락한 제국
케이린은 마녀 모자를 만졌다.
“…그녀들이 산적들에게 끌려간 건 확실합니까?”
“레이엘과 비샤라의 시체는 없었어. 알잖아. 걔들 미모 뛰어난걸. 특히 레이엘의 외모는 남자라면 사족을 못 쓸걸?”
“산적들의 본거지는 확인하셨습니까?”
“위치만 확인하고 접근하진 않았어. 레이엘과 싸워 이길 상대라면 내 은신을 꿰뚫어 볼 실력자니까.”
“잘하셨습니다. 그만한 강자가 있다면 함부로 접근했다간 오히려 당할 테죠.”
케이린이 팔짱을 꼈다. 그녀의 커다란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가슴 큰 레이엘과 비샤라보다 훨씬 큰 폭유. 메르는 결코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그 가슴을 노려봤다.
“어떻게 할 거야? 미리 말해둘게. 내가 잠입해서 암살하는 건 불가능해.”
“너도 알겠지만, 걔들 지금 범해지고 있을걸? 산적들에게 윤간당하고 있을지도 몰라. 아니, 100% 확실해.”
“다행이군요.”
케이린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뭐?”
“범해지더라도 살아 있으니까요. 그럼 기회가 있습니다.”
“냉정하네. 300년 이상 묵은 처녀인 주제에 동정하지도 않는 거야?”
“그녀들을 동정합니다. 하지만 마냥 동정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저희는 그녀들을 구출해야 합니다. 그러니 정보부터 수집하도록 하죠.”
“구출하더라도 팔다리가 잘렸거나 정신이 나가버렸을 수도 있잖아.”
“팔다리는 제가 고쳐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들이 범해진다고 정신이 나갈 정도로 나약합니까?”
“……일단 비샤라는 아니지. 걘 진짜 미친년이니까. 레이엘도 며칠 버티겠지만… 의외로 쉽게 정신을 놓을지도?”
“메르. 그런 건 나중으로 미뤄도 됩니다. 우선 그녀들을 구할 계획부터 짜야 합니다.”
“그래. 우리 힘만으로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
레이엘 하이레시온은 눈을 떴다. 방에 갇혀 구속된 그녀는 바닥에 누워있었다. 벽에 구속되어 억지로 서 있는 것보단 편하긴 했지만, 여전히 수갑과 족쇄를 차고 있다. 이어진 족쇄만 늘어났을 뿐이다.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머리카락부터 시작해서 온몸에 오물이 묻어있었다. 그 남자, 애런 데이커트의 정액들이다. 지금은 모두 말라 있다. 머리카락에 묻은 것이 가장 성가셨다. 허나 몸을 씻을 수 없었다. 그가 씻을 물을 주지 않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 비릿한 정액 냄새를 맡을 수밖에.
방에 나 있는 창문이 보인다. 사람이 나가기에 충분한 창문이다. 구속구가 어떻게 할 수 있으면 당장 창문을 통해 나갈 수 있으리라.
“하아아아아아아악! 조, 좋다! 더 세게 박아라!”
“이년 이거 부끄러움을 모르는군!”
짜악! 짜악!
비샤라와 그 남자가 관계를 갖고 있다. 비샤라는 은근히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레이엘은 동료지만 비샤라를 이해할 수 없었다.
‘비샤라 다음은 나겠지. 저 남자는 어제부터 잠도 자지 않고 우리를 범했으니까.’
밤하늘의 보름달을 바라본다.
손발이 묶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녀는 머릿속의 기억을 되새겼다.
그녀의 할머니. 하이레시온의 공작부인이자, 지금은 마녀왕이라 불리는 여인은 강인했다. 공작이 죽고, 그 후계자인 아들도 부부도 죽었음에도 흔들리지 않고 가문을 이끌었다. 그녀는 마녀회와 함께 제국의 서쪽 지역을 통일하여 왕이 되었다.
황제를 목표로 한다면 황제가 될 수 있었으리라. 허나 그 자리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말하였다. 진정한 여황이 나타날 것이니, 그 여황을 찾는 임무를 자신과 동료들에게 내렸다.
그 후로 1년 넘게 제국을 떠돌았으나 별 성과는 없었다. 그러다가 한 남자에게 당했다.
산적 두목.
분명 기사 출신이었을 한 남자에게 패배하고 범해졌다.
까득.
이가 갈렸다.
분노가 치솟는다. 어떻게든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허나 케이린과 메르라면 자신과 비샤라를 구해줄 것이다. 그녀들은 똑똑하고 신중하니까. 그 남자에겐 일부러 그녀들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비샤라도 마찬가지겠지.
아직 희망은 있었다.
버티다 보면 분명 그녀들이 나올 것이다.
그때였다. 창문을 통해 참새 하나가 날아왔다. 그녀가 두 눈을 치떴다. 참새가 밤에 활동한다? 상식 밖의 일이었다.
‘패밀리어 마법! 캐아란이구나!’
참새는 창틀에 앉아 레이엘을 계속 구경했다. 레이엘은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다부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버틸 수 있어.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
그녀의 의지가 전해진 것일까. 참새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때 문이 열리고 그 남자가 들어왔다. 알몸의 남자. 레이엘은 분노와 증오 가득한 눈으로 남자를 노려봤다. 저 남자에게 몇 번이나 범해지며 알아차린 게 하나 있다.
얼굴. 저 남자의 얼굴은 가까이서 보면 묘하게 어색했다. 그리고 지금 보면 목 부분에 이상한 흔적이 남아 있다. 저 얼굴은 진짜 얼굴이 아닌 가면인 것이다. 가죽으로 만든 정교한 가면. 끝까지 비열한 남자였다.
“우와. 정액 냄새 오지네. 내 정액 냄새는 잘 맡았고?”
남자는 경박한 말투로 크크 웃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무게를 잡더니… 이제는 그런 것도 없었다. 추악한 본성을 아낌없이 드러낸다.
“개 같은 놈. 언젠간 반드시 널 죽여버릴 거다!”
“아까까지만 해도 조용했던 주제에 왜 갑자기 지랄이야?”
남자, 성유진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레이엘은 오늘 낮까지만 해도 죽은 듯이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눈에 생기가 생겼다? 뭔가 있는 것이다.
“어? 참새?”
레이엘이 굳어졌다. 밤에 날아와 있는 참새. 명백히 이상한 일이었다. 어쩌면 패밀리어 마법을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뭘 꼬나봐. 꺼져.”
성유진이 참새를 향해 살기를 내비쳤다. 참새가 깜짝 놀라 날갯짓하며 날아갔다. 성유진은 레이엘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 그럼….”
레이엘에겐 다행히도 성유진은 패밀리어 마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밤중에 참새가 나타난 것인데도 이상함을 조금도 못 느낀 것이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케이린과 메르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윽, 냄새. 일단 씻자. 정액이랑 보지 냄새가 너무 심하잖아.”
성유진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강아지용 배변 패드가 젖어 있었다. 이것도 갈아줘야 한다. 혀를 찼다. 감금은 재밌고 꼴리는 시츄에이션인데 관리가 귀찮았다.
“지린내가 여기까지 퍼지네.”
코를 막고 고개를 흔든다. 사실 냄새는 그리 심하지 않았다. 레이엘에게 수치심을 주기 위한 계산된 행동에 불과했다.
“…….”
효과는 뛰어났다. 레이엘은 분노와 함께 수치심을 느꼈다.
“어이, 암캐. 치우기 전에 오줌싸라. 명령이다.”
성유진은 레이엘의 머리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모두 계산된 행동이었다. 드높은 공주 기사의 자존감을 깎아 내기 위한.
레이엘은 주먹을 꽉 쥐면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성유진의 발길질에 맞아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누가 일어나래? 인간인 척하지 말라고.”
“…나는 개가 아니야. 인간이다.”
“암캐년이 말대꾸? 내 오줌 받아먹고 싶어?”
“…….”
레이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항해야 한다. 그게 맞다. 허나 저 남자는 한다면 하는 남자였다. 자신의 입에 소변을 싸는 것? 태연히 할 미친놈이었다.
지금으로선 저항해도 결코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저항하지 않으면….’
독기를 끌어올리자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머리채를 휘어잡는다. 그 고통에 신음을 흘리며 눈살을 찌푸린다. 남자는 이어 자신의 뺨을 억지로 잡고 벌렸다. 남자의 귀두가 입안으로 들어온다. 이제는 익숙해진 맛과 감촉.
뱉어내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깨무는 건 더더욱 불가능했다. 남자의 힘이 너무 강해서 얼굴이 단단히 고정됐으니까.
“머저리 같은 년. 어떻게 비샤라보다 말귀를 못 알아듣냐? 걔는 자지를 빨라면 빨고, 보지를 벌리라면 벌렸어. 기특해서 고기랑 술도 주고 왔지. 근데 네년은… 어휴, 안 되겠다.”
비샤라와 비교당하며 욕먹는다. 일부러 저러는 거다. 자신을 길들이기 위해.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도 마음이 욱씬 거린다.
‘비샤라…! 네가 그러면 안 되잖아. 남자 따위를 아무것도 아니라며! 남자에게 아양 떠는 여자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 건 너였어!’
비샤라는 눈앞의 남자에게 아양을 떨었다. 그리고 고기와 술을 받아서 먹었다. 자신이 오늘 뭐 먹었더라? 눈앞에 있는 남자의 정액이 들어간 스프와 남자의 침으로 젖은 빵, 남자의 자지를 씻긴 물.
그리고.
“어우, 시원하다. 안 마셔? 그럼 강제로 먹여줘야지.”
남자의 오줌.
그의 자지가 목 깊숙이 박힌다. 삼키지 않더라도 위장에 강제로 들어온다.
기분 나쁘다.
내장이 남자의 오물로 범해지고 있다. 남자에게 범해질 때와는 다른 종류의 불쾌함이었다.
부르르.
마지막 한 방울까지 싼 성유진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자지를 빼냈다.
“커헉, 컥! 우욱!”
머리를 움직일 수 있게 된 레이엘이 바닥에 엎어졌다. 구역질이 올라온다.
“토하면 알지? 토한 거 그대로 먹어야 할 거다.”
“크우욱….”
레이엘은 필사적으로 입을 막았다. 눈을 꾹 감고 진정되기 시작했다. 남자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낄낄 웃었다. 악마보다 역겨운 새끼였다.
“사실 너한테도 고기랑 술을 주려고 했어.”
남자가 문밖에서 김이 피어나는 스테이크와 잔에 담긴 와인을 가져왔다.
꼬르르륵. 냄새를 맡자마자 배에서 신호를 보낸다. 공주로서 온갖 귀한 걸 먹어 온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건 최상급의 고기와 와인이다. 입에 저절로 침이 고였다.
레이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네놈이 주는 음식 따위… 먹을 것 같으냐!”
입안에 오줌 찌꺼기가 남아 있어도, 짐승처럼 볼일을 봐야 하더라도 동료들이 곧 자신을 구해줄 것이다. 기회는 온다. 그때까지 놈에게 굴하지 않을 것이다.
“샹년이. 토를 참는 게 기특해서 그냥 줄까 했는데…. 넌 안 되겠다. 이건 비샤라 줘야지.”
성유진은 일부러 문을 열어두고 밖으로 나가 비샤라의 방으로 들어갔다.
덕분에 레이엘은 비샤라와 성유진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또 하러 왔냐?”
“고기랑 술 더 먹고 싶지?”
“오오! 주면 고맙지! 그렇게 맛있는 고기와 술은 처음 먹어본다! 네가 직접 만든 거냐?!”
“알려고 하지 마라.”
“알겠다! 고기 줘!”
“자. 맛있냐?”
“맛있다! 이런 고기라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음. 배도 채웠으니 한판 할 테냐?”
“잠이나 자라.”
레이엘은 멍해졌다.
비샤라라면 끝까지 저항할 줄 알았다. 허나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남자를 향한 적대감이 없었다. 그 비샤라가 그냥 굴복했다고? 그럼 자신은? 자신은 뭐 하러 끝까지 버티는 거지?
‘아니야. 난 비샤라와 달라! 난 레이엘 하이레시온! 하이레시온의 공주이자 기사다! 저딴 남자에게 굴복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