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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속으로-2093화 (1,873/2,000)

Chapter 2093 - 2093. 몰락한 제국

박수호는 괴성을 몇 번 지르고 난 뒤에 냉정을 되찾았다.

이대로 모든 걸 포기하고 무너질 수 없었다.

영지전에 패배하긴 했어도 모든 걸 잃는 건 아니다. 5만 명? 굉장히 뼈아픈 숫자지만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1년 정도의 시간이 있으면 복구할 수 있을 것이다.

‘모르크 백작령으로 보낼 5만 명을 정해야 해.’

베로프린의 시민 중 누구도 도시를 떠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시장의 권한을 이용해 강제로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전문 인력은 최대한 보존 해야 한다. 반발을 최대한 없애려면 가족 단위로 보내야겠지.

가슴 아픈 일이었다. 시민들의 자유를 보장해야 할 자신이, 시민들의 자유를 짓밟는 것이나 다를 바 없으니까. 이 이후로 자신들의 지지력이 떨어지겠지. 실망한 시민들이 베로프린을 떠날지도 모른다.

‘그들 앞에서 맹세하겠어. 다시 도시로 데려올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모르크 백작령으로 억지로 이주하게 될 5만 명이 앞으로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지 전혀 알 수 없으니까. 그저 그들이 편안하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다.

‘…다시 영지전을 치르게 된다는 보장은 없어. 제국과 싸우게 된다면 영지전이 아닌 그냥 전쟁이겠지.’

전쟁.

지구에서는 막연했던 단어가 이 세계에서는 친숙하게 다가와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가장 먼저 시급히 처리해야 할 일은… 적광.’

갑자기 도시에 나타난 그놈이 날뛰면서 전쟁이 망했다. 시민들은 적광이 제국이 보낸 스파이라 생각한다. 박수호의 의견은 다르다. 그러기엔 의심스러운 점이 꽤 있으니까. 그리고 적광은 너무 신출귀몰했다. 어쩌면 자신처럼 지구의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시장님. 제국 측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병사 한 명이 굳은 얼굴로 보고를 올렸다. 박수호는 제국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제국이? 모르크 백작령에서 재촉하러 왔어?”

“아뇨. 여성들로 구성된 모험가들입니다. 제국 서쪽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중 한 명은 하이레시온 왕가의 공주라 합니다.”

하이레시온 왕가. 제국의 서쪽을 통일하고 왕의 자격을 얻은 가문.

지금 이 시기에 찾아온 제국의 인물. 비록 모르크 백작과 관련이 없다 하더라도 시민들은 안 좋아할 것이다.

‘하이레시온 왕가의 공주가 모험가? 이해할 순 없지만 내쫓을 순 없어. 일단 만나봐야겠어.’

박수호는 접견실에서 그녀들을 만났다.

여자 바바리안, 엘프 마녀, 여자 도적, 여자 기사. 개성 강한 모험가들은 하나같이 미모가 뛰어났다. 박수호가 저도 모르게 긴장할 정도로.

“처음 뵙겠습니다, 베로프린 시장님. 레이엘 하이레시온이라 합니다.”

“베로프린의 시장인 박수호입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박수호를 조금 당황했다. 공주인 레이엘의 분위기가 척 가라앉아 있다. 자신을 향한 눈초리도 어쩐지 적대적이었다. 그녀에게선 공주라는 밝은 신분과 어울리지 않는 퇴폐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저희 여정대가 시장님을 찾은 것은….”

그녀들의 목적은 대마녀의 예언에 따라 여황을 찾는 것. 그 여황이란 여자 용사를 말하는 거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이세계인으로서 용사로 인정받고 있긴 합니다만…. 다른 용사에 대한 정보는 모릅니다. 셀 교단을 찾아가는 편이 더 나을 것 같군요.”

“그러신가요. 혹시 가족분 중에 여성분은 없으십니까? 용사의 혈통은 특별합니다. 어쩌면 용사님처럼 그분 또한 각성할 수도 있습니다.”

있다. 여동생인 박가인. 허나 박가인은 백택의 저주에 걸려 침대에 누워있는 상태였다. 호전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박수호는 그녀들에게 사실대로 말할지 고민했다. 그녀들로부터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설령 말하더라도 지구에 있는 자신의 동생에게 간섭할 능력도 없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지구로 나갈 수 없으니까.

결국 박수호는 여동생에 대해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들에게 부탁했다.

“여동생의 저주가 호전되면 베로프린으로 데려오고 싶습니다. 그때 여러분이 제 여동생이 예언의 인물이 맞는지 확인하면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뛰어난 모험가라 들었으니 그때까지 베로프린의 힘이 되어주십시오.”

그녀들은 한 명, 한 명이 강자였다. 도시에 있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죄송합니다. 저희는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 대륙을 돌아다녀야 합니다. 시장님의 동생분이 예언 속의 그분이라는 확신이 없으니까요.”

“아쉽네요….”

박수호는 저도 모르게 레이엘의 몸을 훑어봤다. 화려한 금발과 백옥처럼 하얀 피부. 외모만 따지면 그림으로 그린 듯한 공주가 아닌가.

“…….”

레이엘은 경멸섞인 눈으로 박수호를 바라본 뒤 몸을 일으켰다. 그녀들은 미련 없이 베로프린을 떠났다.

박수호는 쌀쌀맞은 그녀들의 반응에 당황했다.

‘내가 뭐 잘못했나…?’

•••

나는 모르크 백작성에 숨어 들어갔다. 귀신 망토를 쓰고 들어가니 놀랍게도 아무도 나를 못 알아봤다. 암살에 대한 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다는 게 어처구니없었다. 어쩌면 마법이 아니라서 속수무책인 것일 수도.

영지전에서 승리한 모르크 백작은 연회를 열며 승리를 축하했다. 모르크 백작의 얼굴에는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하하하! 패배를 선언하는 그놈의 얼굴이 지금도 선명히 떠오르는군!”

“축하드립니다, 백작 각하! 이번 영지전은 완벽했습니다!”

그의 가신들과 기사들은 모르크 백작에게 아부를 떨기 바빴다. 또 다른 전쟁이 코앞으로 다가왔음에도 크게 걱정하는 인물은 없었다. 그래도 정신이 박혀 있는 가신이 있었다.

“백작 각하. 글덴베르흐 자작과의 전쟁은 어떻게 진행하실 계획이십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각하의 고견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부디 제게 깨달음을 주소서.”

“하하하. 어렵지 않다. 나는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여 영지민 5만 명을 얻었다. 그중 병사는 절반도 되지 않지. 허나 병사 이외의 영지민은 전부 팔아버리면 그만이다. 그렇게 마련된 돈으로 용병을 고용하거나, 노예병을 사들일 수 있지.”

“그만한 노예들을 구매할 상인들이 있을지….”

“베로프린의 시장. 그놈에게 팔 것이다. 듣기로는 제 영지민들을 끔찍이도 아낀다더군. 전쟁할 머리는 없어도 돈은 많은 놈이니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지.”

“대단하십니다, 각하!”

“술을 들어라! 다음 전쟁의 승리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숨어 있는 나는 눈살을 확 찌푸렸다. 베로프린의 인구수가 늘어나는 건 원하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아니지. 박수호가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구입할 수 있는 노예는 기껏해야 1~2만 정도일 거야. 이 정도면 뭐, 문제없겠지. 박수호가 너무 약해지는 것도 안 좋으니까.’

연회는 새벽이 되어서야 끝났다. 가신과 기사들은 만취가 되어 떠났다. 몇몇 멀쩡한 기사들은 모르크 백작을 호위했다.

‘백작은 백작인가. 멍청한 듯하면서도 자신의 안전은 잘 지키는군.’

모르크 백작을 죽이기에 앞서 그 자식들을 먼저 죽였다.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전부 죽였다. 이유는 백작위의 계승이었다.

‘기왕 모르크 백작을 죽이는 거, 나와 몸을 섞은 여자가 갖는 게 낫겠지.’

카를라 백작 부인.

그녀를 모르크 백작으로 만들기로 했다. 그러려면 자식과 첫째 부인을 전부 죽여야 했다. 어렵지 않았다. 그들을 지키는 호위는 기사가 아닌 병사들이었으니까. 그냥 가서 조용히 죽여버리면 끝.

‘이러면 카를라가 의심받을 수도 있지. 근데 다 뒈져버렸으니 가신들이 어떻게 나올 수도 없어. 카를라의 외척도 귀족이니 도와주겠지.’

그리고 카를라는 임신했다. 그녀를 임신시키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즉, 내 아들이 모르크 백작위를 계승하게 될 것이다. 오랜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귀신 망토를 쓴 나는 모르크 백작의 침실로 향했다. 침실 앞에 호위 기사 두 명이 갑옷을 입은 채로 서 있었다.

검을 들고 살의를 일으킨다. 호위 기사들이 흠칫 놀라며 내 쪽을 쳐다본다.

[시간 가속을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7]

그들이 검을 뽑는다. 느리기 짝이 없었다. 이미 뽑혀 있는 내 검이 그들의 목을 베며 지나갔다.

‘코튼에 비하면 약해빠졌군.’

호위 기사들이 유독 약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코튼이었다면 이런 공격 정도는 막았을 것이다.

모르크 백작의 침실로 들어갔다. 술에 취한 모르크 백작은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성큼성큼 다가가 피 묻은 검을 휘둘렀다.

부릅! 갑자기 두 눈을 뜬 모르크 백작이 침대를 굴러 검을 피했다.

“이놈!!”

모르크 백작이 소리쳤다. 곧 성안의 기사와 병사들이 몰려올 것이다. 개의치 않았다. 그 전에 죽이고 도망치면 그만이니까!

“데이커트! 역시 살아 있었군! 이 멍청한 놈! 살아 있었다면 도망칠 것이지, 감히 나를 해하려 들어?!”

“내 통수를 갈기고도 무사할 줄 알았나? 이미 네 자식들은 전부 죽였다. 마지막은 너다.”

“……내 자식들을 죽여? 네놈은 명예도 없느냐?!!”

“날 이렇게 만든 건 너다. 내 통수를 갈기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네 자식이 죽은 건 너 때문이다. 네가 나를 믿었다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지. 알겠나? 이 모든 일은 전부 너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닥쳐라! 곧 기사와 병사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여신께 맹세하겠다! 너는 온갖 고통을 겪은 뒤에 죽을 것이다!”

“그럼 난 네게 자비를 내려주마. 넌 여기서 죽을 거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6]

찰나를 사용하고 뛰었다.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진다.

모르크 백작은 품에 숨기고 있던 단검으로 내 검을 쳐냈다. 그의 단검에서 검기가 피어오른다. 과연 기사 출신의 귀족답게 한 수가 있었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5]

다시 한번 공격한다. 이번에도 공격이 막혔다. 대신 모르크 백작의 팔이 부들부들 떨린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4]

이번에도 모르크 백작은 반응했다. 그러나 늦었다. 그의 단검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단검으로 내 공격을 계속해서 막기엔 힘이 약했다. 그의 팔이 떨어졌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3]

푹.

모르크 백작의 가슴에 검이 박혔다.

“이, 이토록 허망하게….”

“네놈의 자리는 내 자식이 차지할 테니 안심하고 죽어라.

”무, 무슨 소리냐?!“

”카를라. 그녀가 내 아이를 임신했다.“

”이…!“

모르크 백작이 무언가를 말하기 전에 검을 비틀어 끝장을 냈다. 그는 단말마와 함께 사망했다.

대마침 기사와 병사들이 침실로 들이닥쳤다. 내가 늦었고 그들이 빨랐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데이커트! 감히 백작 가하를 시해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베로프린을 위하여!“

적당히 상대해 주다가 도망쳤다.

일부러 베로프린을 들먹였는데 효과가 있었다. 최근에 영지전이 끝났다 보니 먹힌 것 같았다. 이 일을 기점으로 모르크 백작령과 베로프린은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이후에 글덴베르흐 자작과 그 가족들을 죽였다.

‘지금 이 상태에서 전쟁을 하면 모르크 백작령이 패배할 테니까.’

갑작스러운 권력의 공백은 내전을 불러왔다.

‘그래도 세상은 어찌어찌 돌아가겠지.’

나는 지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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