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096 - 2096. 광명승천도
나는 기절할 당시의 상황이 이해가 안 가 위유에게 물었다.
“그때 대체 절 어떻게 기절시킨 겁니까? 무언가 베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했는데… 몸은 멀쩡하더군요.”
“아, 그때 말이더냐. 너의 의식을 베었다.”
“네?”
대답을 들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정신을 벤 것입니까?”
“네 정신을 베었더라면 네가 지금 내 앞에 멀쩡히 서 있었겠느냐.”
“……정신이나, 의식이나 벨 수 있는 개념은 아니지 않습니까.”
“개념을 인식하고 있다면 벨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이를 심검(心劍)이라 하더군.”
나는 삼정(三頂)의 경지에 올랐다. 대문파의 문주급. 무림맹과 마교에서는 장로급이라 할 수 있는 경지. 아직 초단에 불과하더라도 삼정의 경지에 올랐음에도 위유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심검을 얻으려면 어떤 수련을 해야 합니까?”
위유는 드물게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심검이란 기술도 뭣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일종의 경지라고도 할 수 있겠구나. 하지만 그에 다다르는 방법은… 나도 모른다.”
“스승님이 모르시면 누가 압니까? 알려주기 싫으시다면 그렇게 말씀하시지.”
“이놈. 고작 그게 뭐라고 제자에게 알려주지 못하겠느냐. 심검은…. 어느 순간부터 휘두를 수 있었다. 정확히 내가 심검을 휘두를 수 있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구나.”
위유의 표정을 보니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애초에 위유는 거짓말 자체를 안 한다. 거짓말을 할 바에는 차라리 입을 다무는 스타일이다.
어쨌든 나는 위유를 따먹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럭키 스케베와 미약이 안 통했으니…. 정공법으로 갈까.’
강간은 논외였다. 내가 위유보다 약했으니까. 반대로 위유가 나를 강간할 의도가 있었다면 막을 수 없었다. 그런 의도가 없다는 게 문제지.
정공법은 고백이었다.
그냥 하는 고백보다 분위기 잡고 하는 고백이 훨씬 낫다.
노을이 지는 시간, 수련장에서 가까운 공터에 위유를 불렀다. 위유는 별 의심 없이 나와주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나왔느냐.”
“스승님. 사랑합니다. 제자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남자로서! 스승님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위유는 당황하지 않았다. 눈동자는 차분했다. 나를 비웃지도, 무시하지도 않았다.
“너는 착각하고 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성욕이자 육욕이다. 네가 내 몸을 어떻게 보는지 모를 것 같으냐? 성욕을 풀고 싶다면 마을에 내려가서 창관에 가거라. 딱히 뭐라 할 생각이 없다. 네 아내인 설이에게 부탁하던가.”
“스승님! 이건 틀림없는 사랑입니다!”
“억지 부리지 말거라. 너는 그저 내 몸을 안아보고 싶을 뿐이다.”
“……그럼 한 번만 안게 해주십시오!”
“적당히 하거라. 나는 스승이고 너는 제자다. 저녁때가 되었으니 들어가자꾸나. 오늘 저녁은 네가 준비하거라.”
위유는 몸을 획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 한 점 흔들림 없는 그 뒷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나를 이성으로 보지 않는다. 이건 이것대로 거리낌 없이 지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관계를 추구하는 데는 걸림돌이 된다.
물론 나는 겨우 이 정도로 포기하지 않았다.
위유의 앞에서 멋있는 포즈를 취하거나 스윗한 말로 꼬셔보기도 했다. 위유는 피식 웃으며 넘어갈 뿐이었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위유를 꼬실 수 없었다. 이토록 강적인 여자는 처음이었다.
‘다짜고짜 스킨십을 하면 수련이라는 명목하에 얻어터진다. 잔소리는 덤이지. 효과도 별로 없어.’
그렇다고 다른 방법을 떠올리지 못한 건 아니었다.
내가 떠올린 방법은 협박이었다.
협박이 꼭 무력을 앞세워야 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녀의 소중한 걸 손에 넣는다면 협박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솔직히 뒷감당이 안 될 것 같긴 한데… 모르겠다. 무릎 꿇고 애원하면 봐주지 않을까.’
뒷생각은 하지 않고 일단 해보기로 했다.
위유가 소중히 여기는 건 위여신검(慰餘神劍)이다. 위유는 집 밖을 나갈 때면 항상 위여신검을 가지고 다녔다. 집에 있을 때는 자기 방 안에 있는 거치대에 놓고 다녔다. 집안에서는 거추장스러우니 당연했다.
위여신검은 신검이라 불릴 만큼 어마어마한 검일까? 그건 나도 모른다. 위여신검에 대해 자세히 말한 적 없었다. 질문을 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위유의 무공을 이은 남궁설에게도 위여신검을 넘겨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위유의 방으로 들어가는 건 쉬웠다. 청소를 핑계로 방에 들어갔다. 위유는 나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약간의 죄의식을 느꼈지만… 말 그대로 약간일 뿐이다.
‘날 이렇게 만든 건 위유, 너다.’
방안에 놓여 있는 위여신검을 들었다. 명검이라는 말도 부족했다. 드워프들이 만든 검보다 훨씬 뛰어났고 알 수 없는 기운까지 느껴졌다.
‘신검이란 말이 아깝지 않군.’
내 계획은 위여신검을 인벤토리에 넣는 것이다. 나는 인벤토리의 물건을 소환하고 역소환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내 계획은 시작부터 망했다.
‘위여신검이 인벤토리에 들어가지 않잖아.’
물건이 인벤토리에 들어가지 않는 경우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내가 들 수 없는 물건. 크기는 상관없었다. 집채만큼 커도 내가 들 수만 있으면 인벤토리에 들어간다. 반대로 한 손에 들어올 만큼 작아도 내가 들지 못하면 인벤토리에 들어가지 않는다.
위여신검은 들 수 있었다. 무게만 따지면 다른 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경우는 살아있는 생물인 경우.’
살아있는 생물은 인벤토리에 넣을 수 없었다.
위여신검은 두 번째 경우일 것이다. 비록 생물은 아니지만, 인벤토리가 살아있는 것으로 인식하는 게 틀림없었다.
‘에고 소드 같은 건가. 아니면 살아있는 뭔가가 이 검에 봉인되어 있다던가?’
계획이 틀어졌다.
인벤토리에 넣지 않고 가져간다? 바로 위유에게 들켜 뺏길 가능성이 있었다. 죽기 직전까지 얻어터지는 건 덤이겠지.
‘제기랄. 잘 풀리는 일이 없군.’
협박 계획은 파기했다. 위여신검이 위유에게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위유 본인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물건일 수도 있다. 그럴 경우엔 나와 위유의 관계가 파탄 나겠지.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위여신검을 조용히 내려놓고 방 청소를 했다.
• • •
크르르르르릉.
어느 날 갑자기 낙월산에 지진이 일어났다. 나와 위유를 밖에서 수련을 하다가 지진을 느끼고 검을 내렸다. 위유는 땅의 진동이 느껴지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낙월산의 동굴 쪽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콰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막대한 열기가 파동이 되어 주변을 휩쓸었다. 내가 있는 곳까진 괜찮았으나, 파동의 진원지로 보이는 동굴 주위에는 시퍼런 화염이 치솟았다가 사라졌다. 그곳에 있던 나무와 풀들은 한순간에 불타 재가 되어 주변을 휩쓸었다. 잿빛 눈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큰일 났군.”
심각한 어조로 말한 위유가 동굴을 향해 달렸다. 나도 그녀의 뒤를 따라 달렸다.
동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으나, 저 동굴에서 미령이 벽을 넘기 위해 수련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원래는 동굴 가까이 다가가기 힘들었다. 미령이 방해받지 않으려고 설치한 결계가 있었으니까. 허나 그 결계는 지금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땅이 불타는 듯한 열기를 느끼면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미령이 알몸으로 쓰러져 있었다. 원래 완전한 인간 형태를 하고 있어야 할 그녀의 머리와 꼬리뼈 부근에는 여우 귀와 4개의 여우 꼬리가 늘어져 있었다. 그녀의 주위로 타오르는 푸른 불꽃들이 보인다.
위유가 위여신검을 뽑아 한 차례 휘둘렀다. 검풍이 주변을 스치고 지나갔다. 푸른 불꽃은 꺼지고 열기는 한풀 꺾였다.
위유가 미령을 안았다. 미령은 땀을 잔뜩 흘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스승님! 미령은 어떻습니까?!”
“의식이 없다. 육체는 비교적 멀쩡한데…. 정신을 자신의 심상 안에 가둔 건가?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술법사가 아닌지라 자세히 모르겠군.”
나는 미령의 앞으로 다가갔다. 손을 내밀어 그녀를 만지려다가 멈췄다. 그녀의 몸에서 뜨거운 기운이 느껴진다. 화기(火氣)를 전혀 다스리지 못하고 있었다. 정상인 상태가 아니다. 함부로 만졌다가 사태가 악화 될지도 모른다.
위유는 손가락을 들어 미령의 혈도를 일부를 콕콕 찔렸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화기가 줄어들었다.
“응급처치는 했다만… 안 좋군. 기운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다. 본래 육체에서 순환되어야 할 기운이 빠져나오고 있다. 한시라도 의식을 차려서 갈무리해야 하건만…. 정신이 심상에 갇혔다면 언제 깨어날지 장담할 수 없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겁니까?”
“벽을 억지로 넘으려다가 실패한 거지. 성공했더라면 모를까. 실패했으니 대가를 치르는 거다.”
“…….”
억지로 벽을 넘는다. 그 위험성은 무인에게도 통용된다. 무인의 경우 주화입마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허나 이 증상은 내가 알고 있는 주화입마와는 달랐다.
“이대로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말라 죽을 거다. 미령도 보통 녀석은 아니니 1년은 버티겠지. 그 안에 정신만 차린다면 아무 문제 없다.”
“……미령이 일어날 수 있으리라 보십니까?”
“이런 쪽으로는 지식이 없으니 모르겠다. 주화입마를 생각해 보거라. 주화입마는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하는 건 절대 쉽지 않다. 허나 타인의 도움이 있다면? 좀 더 수월하게 극복할 수 있지.”
“저희가 미령을 도와야겠군요.”
“그래. 문제는 우린 술법사가 아닌지라 미령을 도울 방법을 모른다는 거다.”
“1년…. 미령이 1년을 버틸 수 있는 건 확실합니까?”
“미령의 역량을 보면 1년은 버틸 수 있다.”
“제가 방법을 찾겠습니다. 스승님은 미령을 돌봐주십시오.”
“…방법을 찾겠다? 어떻게 말이냐?”
“답을 알고 있을 만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백란.
회귀 천마인 그녀는 술법이나 주술 쪽을 공부한 적 있다고 했다. 그게 아니어도 회귀자인 만큼 여러 정보를 알고 있을 터. 그녀는 분명 이 상황에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