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097 - 2097. 광명승천도
혼수상태의 미령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무것도 없는 삭막한 동굴에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미령의 방 침대 위에 나체의 미령을 눕혔다. 그것만으로 방안의 온도가 5도는 올라간 것 같았다.
“한여름이 찾아온 것 같군요. 에어컨이라도 트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대로 두는 게 낫다. 주변의 온도가 낮아지면 흘러나오는 화기의 양이 늘어날 것이다. 그럼 예상보다 더 빨리 말라 죽겠지.”
미령을 바라봤다. 두 눈을 꼭 감고 있는 그녀는 조용히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몸을 잡고 흔들면 지금 당장에라도 일어나 배시시 웃을 것 같다. 실제로는 위유가 옷을 입혔음에도 아무 반응이 없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혀를 찼다. 경지를 넘어서려다가 실패하는 자들. 이야기는 들었으나 설마 미령이 그 당사자가 될 줄은 몰랐다.
“반쯤은 네가 이유다. 말도 안 되는 속도로 강해지는 널 보고 자극받은 거겠지. 이 녀석은 평소에도 네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말하더군.”
“…이렇게 무리하지 않아도 충분히 도움이 됩니다만.”
“당사자는 그렇게 느끼지 않은 모양이군.”
우리는 일단 방 밖으로 나가 의논했다. 나온 답은 하나였다. 전문가를 찾아가 대처할 방법을 찾는 것. 나는 회귀자 백란을 찾아갈 계획이었다. 어쩌면 위유는 나보다 더 좋은 계획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기에 물어봤다.
“스승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술법가를 알고 계십니까?”
“속세와 연을 끊은 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지. 내가 알고 있는 술법사들은 모두 이승을 떠났다. 그나마 남궁세가와 같이 희미한 인연을 유지하고 있는 자들이 있으나… 이번 일에 도움이 될 것 같진 않구나.”
“남궁세가에 도움을 요청하면….”
“남궁세가는 무가(武家)다. 가문에서 일하는 술법사는 있겠지. 허나 조화의 경지를 시도했다가 실패한 술법사에게 도움이 될 것 같으냐?”
“안 될 것 같군요.”
아무리 생각해도 백란을 찾아가는 게 타당한 듯했다. 다른 고명한 술법사? 그놈들은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정 방법이 없다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갈 수밖에 없겠지만.
나는 위유와의 짧은 대화를 끝내고 낙월산을 떠났다. 위유는 낙월산에서 미령을 돌보기로 했다. 그녀라면 만일의 경우도 대처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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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천마 백란. 회귀자인 그녀는 현재 천마신교가 아닌 황궁 소속인 일급금위(一級錦衛)로서 일하고 있다.
내가 만나고 싶다 해서 무작정 만날 수 있는 신분이 아닌 것이다. 물론 연락 수단은 있었다. 그녀와 나는 함께 손을 잡은 협력자이기도 하니까.
‘최대한 빨리 만나서 대화를 나누려면… 내가 직접 움직여야 한다.’
뇌천류(雷天流) 비뢰신(飛雷神).
낙월산에서 한 줄기의 번개가 되어 하늘을 내달렸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이동 수단은 공간 이동 주문서지만, 유감스럽게도 목적지의 좌표가 찍힌 공간 이동 주문서가 없었다.
‘비뢰신은 말보다 훨씬 빠르니, 지금 상황에선 비뢰신으로 달리는 게 최선이다.’
목적지는 제도(帝都) 근처에 있는 도시. 땅이 워낙 넓다 보니 며칠은 내달려야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쉬지 않고 비뢰신을 이용해 달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경신법이라 해서 체력이 소모되지 않는 건 아니니까. 비뢰신의 경우 그 이름처럼 겉보기엔 날아가는 느낌이긴 하더라도 열심히 달리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쳐간다.
원래는 중간에 쉬다가 체력을 보충하지만… 나는 심장이 터지도록 내달렸다. 몸이 지쳐서 다리가 움직이지 않을 때는 완전 회복을 사용했다. 내가 지치는 것보다 완전 회복의 쿨타임이 더 빨리 돌기에 거의 무한히 달릴 수 있었다. 음식? 달리면서 먹었다.
나흘째.
오늘도 어김없이 하늘을 달리며 산을 넘을 때였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멈추시오!!”
명백한 나를 향한 외침에는 숨길 수 없는 적의가 느껴졌다.
무시하고 지나가려 했다. 멈추라고 해서 멈출 내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놈들은 나를 그냥 보내지 않았다.
‘진법인가?’
앞으로 나갈 수 없다. 막혀 있다. 어느새 나는 커다란 산에 설치된 진법 속에 갇혀 있었다.
나는 이런 쪽으로는 식견이 낮았다. 정확히 어떤 진법인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삼정에 이른 나도 무시할 수 없는 성가신 진법이라는 것.
하늘에서 내려갔다. 낙뢰가 떨어지는 듯했다. 내 몸 주위에는 스파크가 파지직 튀었다. 뇌기를 갈무리하지 않고 말했다.
“나와라.”
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법의 영향인지 짙은 안개 속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듯한 광경이었다.
꾀죄지한 몰골에 가죽을 덧대어 만든 옷을 입고 무기를 들었다. 산적이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산적 새끼들이 감히 내 앞길을 막는다고?”
두목으로 보이는 놈이 앞으로 나선다. 얼굴에 흉터가 가득해서 이목구비를 알아보기 힘든 놈이었다. 놈은 응당 그래야 하는 것처럼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어느 고명한 고수님인지 모르겠으나, 여 기랑산(二狼山)은 우리 패릉산채(霸陵山蔡)의 영역이오. 산을 지나가려면 누구도 예외 없이 통행세를 내야 하오.”
눈을 가늘게 뜨고 산적 두목을 가늠했다.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아 경지는 오기 중단(五氣 中段). 일개 산적 두목의 경지 치고는 지나치게 높았다.
“녹림 소속이냐.”
녹림은 무공을 익힌 산적들의 모임으로 사파의 연합인 사왕련(四王聯) 중 산왕(山王) 휘하에 있는 세력이다.
녹림이니 뭐니 하면서 있어 보이는 척은 하지만 실제로는 범죄자 출신으로 이루어진 범죄자 집단에 불과하다. 산적들이 무공을 익힌 이유도 원래 무림 문파 출신이라 그렇다. 범죄를 일으켜 파문되거나, 쫓기는 신세가 된 범죄자들이 모였다고 보면 된다.
“하하. 녹림이 아니면 뭐겠소. 이 산을 지나가고 싶으면 우리에게 통행세를 내야 하오. 예외는 관군이지만… 대협은 딱 봐도 관군이 아니지. 통행세는 사람마다 다르게 책정하오. 대협의 경우엔 천옥 10개요.”
이딴 놈들에게 천옥을 넘겨라? 천옥은 내게 화폐이면서도 강해지기 위한 자원이었다. 산적 놈들에게 천옥하나 넘겨줄 수 없었다.
“뒈지고 싶어 환장했군. 너희 따위가 나를 막을 수 있다고 보는 거냐?”
“왜 그렇게 날이 서 있소? 뭐, 최근에 가족이라도 뒤진 거요? 냉정히 생각하시오. 우리가 아무것도 없이 대협의 앞을 막았겠소? 이 산에 설치된 진법은 대협의 길만 막는 게 아니오. 우리의 힘을 강화해 주지.”
산적 두목과 그 휘하의 산적들의 기운이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진법의 힘을 이용해 일시적으로 강해지고 있었다. 대가 없는 힘은 아닐 것이다. 그 대가가 뭔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지만.
“대협이 삼정의 경지에 오른 절대 고수라 할지라도 무적인 건 아니지. 알았으면 통행세를 내시오. 좋게 말할 때 말이오.”
“당장 무릎 꿇고 빌어도 모자란 놈들이….”
천마신공(天魔神功).
내 몸에서 묵빛의 마기가 흘러나온다. 마기는 위로 상승하지 않고 음울하게 가라앉아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산적 두목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얼굴에 새겨진 흉터들이 벌레처럼 꿈틀거린다.
“마기?! 제길. 이름 없는 고수인 줄 알았더니 마교 쪽이었나?!”
산적 두목이 칼을 휘둘렀다. 붉은 강기가 마기를 가르고 지나갔다. 허나 마기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으으, 두목….”
“기현상에 쫄지마라. 저놈만 죽이면 된다! 공격해!”
산적들이 일제히 달려들기 전, 나는 오른발을 들어 지면을 밟았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파형(波形).
지면에 낮게 깔린 마기의 파동이 나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진다. 파동에 닿은 산적들은 학질에 걸린 것처럼 덜덜 떨었다. 그중에는 호흡도 제대로 내쉬지 못해 바닥에 쓰러진 자들이 있었다.
산적 두목의 안색도 일변했다.
“이런 씨발…. 진각 한 번에 속을 뒤집힐 것 같다니… 이거 천마군림보잖아?! 설마 30년 전에 소천마로 등극했다는…?!”
화련비도를 소환해 손에 쥐었다. 붉은 칼날 위로 새까만 마기가 밀려들어 칼날의 형상으로 변한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천마검(天魔劍).
“제길! 소천마가 왜 여기에 있는 거냐?!”
절규하듯 외친 산적 두목이 나를 향해 칼을 던진다. 화련비도로 가볍게 칼을 쳐냈다. 그의 칼은 허공을 빙글빙글 돌더니 두목의 손아귀로 돌아갔다. 평범한 칼이 아닌 법기였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천마검(天魔劍) 회천(回天).
화련비도를 휘둘렀다. 강기가 주변을 한순간에 휩쓸었다. 공기가 그에 공명하듯 떨린다. 주변에 있던 산적들의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어 떨어진다.
허나 이것으로 부족하다. 죽은 놈들보다 살아 있는 놈들이 더 많았다. 몸에 호신강기를 두르고 내게 달려드는 두목은 말할 것도 없다.
의지를 움직인다. 주변에 낮게 깔린 천천히 시계 방향으로 움직인다.
천마신공(天魔神功) 회천마룡(回天魔龍).
마기가 회전하며 한순간 세상과 단절된다. 단절이란 곧 참(斬)이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회전이 거듭될수록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갈려 나갔다. 산적 두목을 비롯한 산적들의 토막 난 신체가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지상으로 떨어졌다.
나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순간적으로 무리해서 그런지 내부가 살짝 흔들렸다. 내상이라 말하기엔 민망한 수준이지만.
’진법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군.‘
산적놈들이 이 진법을 설치했을 리는 없을 테고, 누군가가 그들에게 진법을 설치해 준 것이다. 아마 뛰어난 술법사겠지.
’술법으로 진법을 해제하는 방법은 모른다. 그렇다고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지.‘
진법에는 주체가 있다. 그걸 파괴하거나 바꿔버리면 진법은 사라질 것이다. 내가 직접 찾아 나서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린다. 진법의 핵심은 기본적으로 숨겨져 있으니까. 문외한인 내가 단숨에 찾을 수 없다.
’이런 진법의 경우 산의 힘을 이용하지. 즉, 산을 박살 내면 된다.‘
나는 다시 한번 화련비도를 휘둘렀다. 검은 회전은 작은 폭풍이 되어 산을 휩쓸었다.
천마신공(天魔神功) 회천마룡(回天魔龍).
나무가 썰리고 땅이 뒤집히며 바위가 저 멀리 떨어졌다.
역시나 산이 훼손되자 진법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나는 한줄기의 번개가 되어 하늘을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