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100 - 2100. 광명승천도
나와 성지곤은 둘이서 도시밖으로 나갔다.
산적 토벌. 원래였다면 성지곤이 휘하의 부하들과 함께 진행했을 일이다. 내가 성진곤을 돕기로 하면서 계획이 변경되었다. 쓸데없이 병력을 이끌고 가는 것보다 나와 성지곤이 나서서 처리하는 쪽이 더 빠르고 확실하다.
“패릉산채라는 산적 놈들도 주제를 모르고 날뛰더니… 요즘 전국적으로 산적들이 나대는 모양이군.”
“어, 맞아. 다른 도시에서도 산적들 문제로 골치 아파하더라.”
“황제가 직접 명령을 내리면 군대가 앞장서서 산적들을 다 쓸어버릴 텐데.”
“황제는 인간 일에는 크게 관심 없어.”
“인간 일에는?”
“응. 만무탑에서 있었던 일 기억하지? 명계의 존재랑 싸웠잖아. 황제는 명계와 관련된 일에 집중하고 있어. 진짜 최정예 부대는 명계의 괴물들과 싸우고 있어. 겨우 산적들 일로 직접 나서진 않을 거야.”
산채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나와 성지곤은 의도적으로 기척을 죽였다. 목소리도 낮춘다.
“지염산채(枝苒山寨)라고 했던가? 원래 이 근처에는 산적이 없었어. 3개월 전쯤에 생겼다던가? 별 존재감이 없어서 있었는지도 몰랐어. 알아차렸을 때는 쉽게 손댈 수 없는 수준이 됐더라.”
나는 성지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고작 산적이잖아.”
“산적 중에도 영리한 놈이 있었어. 산적질을 하며 얻은 재물 일부를 도시의 권력자들에게 바친 거야. 덕분에 나도 뒤늦게 알게 된 거고. 정치란 게 쉽지 않더라.”
성지곤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의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성지곤이 어렸을 때 협객이 되고 싶어 했다는 걸 떠올렸다.
“뭐, 너무 실망하진 마. 산적 중에 영리한 놈이 있다면 장부를 작성해 놨겠지. 장부만 손에 넣으면 뇌물을 받아먹은 놈들을 처벌할 수 있을 거야.”
권력자에게 뇌물을 바칠 머리가 있는 놈이니 분명 장부도 작성했을 것이다. 장부가 곧 권력자들을 찌르는 비수가 될 수도 있으니까.
“있으면 좋고. 없어도 딱히 상관은 없어. 일이 끝난 뒤에 보고하면 윗선에서 처리할 테니까. 아마 금의위가 파견되겠지. 그보다 유진아. 산적이라 하니 옛날 생각나지 않아?”
“나긴 하네. 산적 두목 애미랑 아내를 우리가 따먹었지.”
“가끔 옛날이 그리워져. 그땐 아무 생각 없이 즐겁게 지낼 수 있었으니까.”
우리는 실실 웃으며 산채로 다가갔다. 나와 성지곤의 대화는 곧 사라졌다. 바닥에 쌓인 나뭇잎들을 밟는데도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눈을 밟아도 발자국이 남지 않는 경지. 답설무흔(踏雪無痕)이라 하던가. 나와 성지곤은 이미 옛적에 그 경지에 도달했다.
산채에 도착한 우리는 이상함을 감지했다.
시체 썩은 내가 났다. 그리고 산채의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나와 성지곤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뛰듯이 산채 안으로 들어갔다. 무언가 일이 틀어졌다는 느낌이 팍 들었다.
산채 안으로 들어갔다. 시체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이미 부패했는지 살점은 시커멓게 썩어가고 구더기와 파리가 시체를 파먹었다. 바닥과 나무벽에는 피가 스며들어 얼룩졌다.
성지곤은 조용히 시체들을 살펴봤다.
“하나같이 복부가 뜯겨나갔어. 마공을 익힌 인간의 짓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 대놓고 일을 벌이는 경우는 드물어. 아마 요괴 짓인 것 같아.”
“요괴가 내장을 파먹었나?”
“음. 한입씩 파먹은 듯한 흔적이 있긴 해.”
“한입 충이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면서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요괴가 아직 산채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른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도 혹시 모른다. 특수한 능력으로 감각을 속이고 숨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산채 중심, 가장 큰 건물에 들어선다. 다를 것 없었다. 건물 내부의 인간들은 모두 복부가 파헤쳐져 죽어 있었다.
“살아있는 산적은 없군. 어쩔래?”
“요괴가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니 수색해야지. 이런 사악하고 강력한 요괴를 방치할 순 없어.”
성지곤이 품에서 작고 볼품없는 목함을 꺼냈다. 공간함이었다. 뚜껑을 열고 상자보다 훨씬 큰 물건을 꺼낸다. 강철 십자가였다. 신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법기가 확실했다.
“전투용 법기 같지는 않네. 무슨 법기야?”
“요역기(妖力器). 현장에 남은 희미한 요기를 흡수해 추적하는 법기야. 부대장급에게 보급되는 법기 중 하나인데 꽤 쓸만해.”
가능한가?
내가 느끼기로 현장에 남은 요기는 없었다. 요기가 없는데 어떻게 흡수하고 추적할까.
내 부정적인 생각을 비웃듯, 요역기의 십자가 끝이 붉은색으로 변했다. 요기를 흡수한 것이다.
“진짜 요기가 있었다고?”
“사람이 느끼기 힘든 아주 희미한 요기도 발견하고 흡수하는 법기니까.”
“상당히 쓸만한 법기네.”
“효과는 뛰어나지만 오래 사용하지는 못해. 몇 번 사용하고 나면 새 걸로 바꿔야 해. 요괴가 너무 멀리 있어도 발동하지 않고.”
요역기는 어느 한 방향을 가리키며 우리를 이끌었다. 나와 성지곤이 달리기 시작했다.
도착한 곳은 산 끝의 다 쓰러져 가는 집이었다. 2층짜리 집이었는데 근처 나무들에 가려져 잘 눈에 띄지 않았다.
끼이이이이익.
우리가 집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문이 열리고 한 노파가 나타났다. 한 손에 지팡이를 쥔 노파였다. 반백의 머리털은 산발이었고, 두 눈은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요역기는 그 노파를 가리키고 있었다.
“두 분께선 이 누추한 곳에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노파가 예의를 차리며 말했다. 요기가 느껴지는 걸로 보아 요괴는 확실한데 인간을 향한 적의와 무시가 느껴지지 않는다.
요괴로부터 느껴지는 힘은 대략 오기 3단. 싸운다면 우리가 압도적으로 이길 것이다.
“…아름답구나.”
성지곤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못 들은 척했다.
요괴에게 홀린 성지곤을 무시하고 질문했다.
“산적들을 죽이고 내장을 파먹었나?”
“아, 그 멍청한 놈들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제가 놈들을 죽이고 내장 일부를 먹었습니다.”
“인간을 죽이고도 당당하군.”
“그놈들은 인간이지만, 산적입니다. 범죄자지요. 요역기를 들고 계신 걸로 보아 진군(秦軍)에서 나오신 듯한데… 맹세코 산적들을 제외한 인간을 건드린 적 없습니다. 제가 미쳤다고 황제 폐하의 무고한 백성을 건드리겠습니까.”
요괴도 황제를 두려워했다. 황제의 위상은 이런 곳에서 느낄 수 있을지 몰라 헛웃음을 흘렸다.
“너는 뭔가 내가 아는 요괴와 다르군. 군대가 두려웠다면 이곳에 머물지 않고 멀리 떠났겠지.”
“제 잘못이 없는데 왜 제가 거처를 버리고 도망가야 합니까?”
“대부분의 요괴는 인간 사회에 관심 없다. 산적이나 농민이나 다 거기서 거기지. 요괴들이 인간을 구분하는 척도는 강함이다.”
“실로 그러합니다. 허나 저는 요괴이되 요괴가 아니고, 인간이되 인간이 아닙니다.”
“……반요인가.”
요괴와 인간의 혼혈.
요괴와 인간, 양측에서 배척받는 존재.
“요괴 중에는 인간을 보며 식욕을 느끼는 부류가 있습니다. 흔히 식인귀라고도 부르지요. 제 몸에 흐르는 절반의 피가 식인귀의 것입니다. 식인귀는 인간을 먹으면 건강해지고 힘이 세집니다. 반대로 인간을 먹지 않으면 약해집니다. 저는 살기 위해 인간을 먹었습니다. 허나 맹세컨대 죽어 마땅한 인간들만 잡아먹었습니다. 부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시큰둥하게 그녀를 쳐다봤다. 인간을 잡아먹든, 요괴를 잡아먹든 관심 없었다. 눈앞의 반요를 죽이고 일을 끝내는 편이 훨씬 이득이다. 내가 바로 나서지 않는 건 성지곤 때문이다.
이 구역은 성지곤의 것이다. 그런 만큼 나는 그를 존중한다.
“저를 살려주신다면, 한 가지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산적들을 죽일 때 우연히 알게 된 정보입니다. 제겐 필요 없는 정보이나… 나으리들 께는 꼭 필요한 정보일지도 모르지요.”
거래인가.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성지곤을 바라봤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반요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지곤이 입을 열었다.
“반요여.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박달이라 합니다.”
“박달아, 너의 의견은 잘 들었다. 그러나 산적이라 하여도 네가 그들을 처벌할 권한은 없다.”
“……저를 죽이시려는 겁니까?”
“너는 반요다. 반은 인간이란 뜻이지. 너 또한 황제 폐하의 백성이다. 극악무도한 산적을 죽이고 협과 정의를 바로 세웠으니… 어찌 내가 너를 벌하겠느냐.”
“…….”
박달이 침묵했다. 성지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확실했다. 나도 그러하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성지곤은 제 말을 지껄였다.
“통탄스럽게도 너의 절반은 요괴다. 하양시의 장군인 나는 요괴를 죽이고 백성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정말 통탄스러운 일이지.”
“…저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죽고 싶은 생물이 어디에 있겠느냐. 허나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내가 묘수를 떠올렸다.”
“네. 듣고 있습니다.”
“박달이여, 내 여자가 되어라. 내 여자가 되어 너의 인간성을 증명하라!”
“…….”
“…….”
나는 물론이고 박달까지 입을 벌렸다. 이야기가 왜 그렇게 끝나는 거지? 슬쩍 성지곤을 봤다. 그의 얼굴은 한없이 진지했다.
“저를 농락할 목적이시군요.”
박달의 눈이 날카로워진다. 그녀의 몸에서 요기가 흘러나온다. 일그러진 얼굴에선 분노가 느껴졌다.
“농락당할 바에야 싸우다 죽겠습니다.”
농락이라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박달의 외모는 최소 70대의 노인이었다. 남자가 호감을 느끼는 외모는 절대 아니었다. 딱 한 사람, 성지곤을 제외하고.
“이런… 내 진심이 전해지지 않았다니 안타깝군. 어쩔 수 없지, 유진아. 도와줘. 박달을 제압해서 억지로라도 취해야겠어. 저런 미인을 놓치면 분명 난 평생을 후회할 거야.”
성지곤이 간절한 눈빛으로 내게 도움을 청했다.
“어, 그. 그래.”
성지곤에게 받은 것도 적지 않으니 협력하기로 했다.
성지곤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고는 박달을 향해 달려갔다.
“어디 너의 짬지 좀 보자꾸나!!”
진짜 미친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