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104 - 2104. 광명승천도
사왕련(四王聯)의 산왕(山王) 백오철은 거구를 일으켰다. 그의 근육질 몸은 맹수들의 가죽이 감싸고 있었다. 그는 짐승을 죽이고 그 가죽을 잘라 옷으로 만들어 입고 다녔다. 하의는 표범의 것이며, 상의는 호랑이의 것이었다.
“슬슬 때가 됐구나. 아우들아. 준비는 했느냐?!”
그의 주위로 비열한 웃음을 짓고 있는 길쭉한 몸의 중년 남자가 다가왔다. 백팔철. 산왕 백오철의 아우였다. 그의 등허리에는 커다란 붉은 도끼가 걸려 있었다.
“형님. 믿음직한 놈들만 준비했소. 다른 놈들이 끼어들더라도 이놈들이 막아줄 거요.”
산왕의 반대편에 다른 중년 남자가 다가왔다. 체구가 작고 무표정했다. 산왕의 또 다른 아우인 백구철이었다. 그의 주위로 작은 해골 5개가 두둥실 떠 있었다. 원숭이 해골에 주술을 걸어 만든 법구였다.
“모든 준비는 완벽합니다. 그 전설이 맞다면… 도명산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하하. 이렇게 준비했는데 도명산의 전설이 구라면 어떻게 되는 거요? 새끼들이 불만을 가질 텐데?”
백팔철이 허리춤의 도끼를 매만졌다. 산왕은 피식 웃었다.
“기어오르는 새끼들이야 언제나처럼 대가리를 깨주면 되지 않겠느냐. 그리고 그건 쓸데없는 걱정이다. 내 감이 말하고 있다. 도명산은 나타날 것이다.”
산왕이 콧김을 뿜었다. 그는 흥분하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준비한 일이다. 산적들을 준동시켜 다른 세력들의 시선이 산적들에게 향하도록 만들었다. 설령 자신의 계획을 알아차렸다 하더라도 산적들이 거슬릴 테니 쉽게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특히 무림맹과 마교 등의 거대세력이 작정하고 움직이기에는 이곳은 먼 곳에 있다.
황궁? 군대? 그놈들이 움직일 거라면 진즉에 움직였다. 먼저 선을 넘지 않으면 이런 일로 움직이진 않을 것이다.
계획에 다른 변수가 생기더라도 결국 도명산의 정상에 오르는 건 자신과 형제들이 될 것이다.
산왕과 그 아우들은 산채 밖으로 나갔다.
“시간이군요. 기운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백구철이 덤덤하게 말하며 하늘을 올려본다. 하늘을 채우고 있던 하얀 구름이 순식간에 증발하여 사라졌다.
하늘 높은 곳에서 빛이 번쩍인다. 그 빛은 별이 추락하는 것처럼 산에 떨어졌다. 그들이 있는 산이 눈부시게 빛났고, 그들의 산 밖으로 강제로 이동됐다.
도명산 입구로 이동된 그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보아라! 내 감이 맞지 않았느냐! 도명산의 전설은 진실이었다!”
산왕은 껄껄 웃었다.
“아. 설마 밖으로 이동될 줄 몰랐는데… 부하들한테 다시 명령해야겠소.”
백팔철은 도끼를 휘둘러 나무를 베면서 산적들에게 자시를 남겼다.
“…조심해야 합니다. 자연과 영맥이 엉망진창으로 뒤틀렸습니다. 제 주술로도 도명산에 정확히 뭐가 있는지 파악하기 힘듭니다. 전이술을 쓰거나, 비행으로 날아갈 수는 없을 것 같군요.”
백구철은 신중한 시선으로 빛나는 도명산을 바라봤다. 도명산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또한 원래의 산보다 5배 이상 커진 상태였다. 도명산의 정상은 구름보다 높았다.
“하하하! 잡설은 됐다! 가자, 곧 우리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산왕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아우들과 함께 도명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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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산을 지켜보는 다른 무리가 있었다. 백호의 가면을 쓰고 검은색 옷을 입은 자들이었다. 조용한 그들은 가면의 능력으로 자기들끼리 의견을 나눴다.
-도명산이 나타났군요. 실제로 보니 더 신비롭군요.
-산왕이 산에 들어갔습니다. 그가 정상에 오르기 전에 우리도 움직여야 합니다.
-조급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다. 도명산의 내부는 뒤틀려 밖에서 보이는 만큼이나 간단한 구조가 아니다. 조금 늦게 출발하더라도 충분히 산왕을 앞지를 수 있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출발하는 게 좋지 않습니까?
-기다려라. 도명산에 입산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파악하고 들어가는 편이 낫다. 알겠지만, 우리의 존재는 알려져선 안 된다. 다른 이들과의 조우는 최대한 피한다. 어쩔 수 없이 마주쳤다면 반드시 죽여라.
도명산 주위에 숨어 있던 자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대부분이 도명산을 향해 헐레벌떡 달려갔다. 그러다 도명산 주위에 있던 녹림의 산적들과 마주쳐 전투를 벌였다. 빛나는 산 주위에는 벌써부터 비릿한 혈향이 풍겼다.
-우연히 도명산의 전설을 듣고 찾아온 낭인들…. 아주 신이 났군요.
-저들의 눈에는 그저 도명산이 기연으로 보이겠지요. 한 치 앞도 모르는 자들입니다.
다른 이들도 있었다. 철저하게 준비하고 찾아온 무인들. 그들은 다른 세력과 신경전을 벌이면서도 먼저 공격하진 않았다. 도명산에 입산하는 걸 최우선으로 삼았다.
딸랑!
이질적인 방울 소리가 울렸다. 백호 가면을 쓴 자들은 저도 모르게 몸을 긴장했다.
-사특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기분 나쁘군요.
-수백 마리의 강시가 군대처럼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검은손의 노파가 있습니다.
-귀혼흑수(鬼魂黑手)다. 섬뜩한 늙은이가 찾아왔군.
귀혼흑수는 정사마(正邪魔) 중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은 고수였다. 소속이 없는 자들을 무야(無野)라고도 부른다.
귀혼흑수는 오백 마리의 강시를 과시하며 도명산에 입산했다. 놀랍게도 그만한 군세가 입산하자마자 존재감이 사라져 느낄 수 없게 됐다. 마치 산을 기준으로 공간 자체가 괴리된 것처럼.
쏴아아아아아아.
검은 구름과 함께 그것들이 도명산 입구에 떨어졌다.
백귀야행(百鬼夜行).
한 마리의 대요괴가 백마리가 넘는 요괴들을 이끌고 나타난 것이다.
대요괴는 용의 뼈와 인간이 뒤섞인 듯한 외형을 가졌으며, 장수처럼 갑옷과 무기를 착용했다. 그는 붉은색의 흉흉한 안광을 빛내며 부하 요괴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백귀야행의 무리를 이루던 절반의 요괴들이 날뛰며 도명산 근처 인간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나머지 절반은 대요괴와 함께 도명산에 입산했다.
-적골악귀(積骨惡鬼) 반오입니다. 인가이든, 요괴든 가리지 않고 뼈를 수집한다고 합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뼈를 통해 강해진답니다.
-무시할 수 없는 거물들이 상당히 많군요.
-그러나 유리한 건 우리다. 우린 명도산에 관한 대략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다.
요괴들이 나타나며 도명산에 입산하는 자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요괴들이 상당히 강했기 때문이다. 요괴들은 괴기한 웃음을 흘리며 인간을 죽이고 그 피와 살을 뜯어 먹었다. 그들만의 연회였다.
-올 거물들은 전부 온 듯합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도 입산해야 합니다.
-…잠깐. 범상치 않은 놈들이 온다. 이번엔 셋이군.
그 셋은 당당하게 걸어왔다. 두 명은 남자였고 한 명은 여자였다. 여자는 면사로 얼굴을 가렸으나, 그 아름다움까지 전부 가리진 못했다. 셋은 느긋하게 느껴질 만큼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인간을 잡아먹고 있던 요괴들이 주춤했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범상치 않았으니까. 그 기운은 앞에 먼저 입산한 거물들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다.
-처음 보는 얼굴들입니다.
-비교적 약해 보이는 남자는 군관 쪽 냄새가 나는군요.
주춤거리던 요괴들은 대요괴의 명령을 떠올렸을까, 아니면 자신들의 수를 믿었을까. 요괴들이 셋을 향해 달려들었다.
선두에 있던 남자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터져 나왔다. 패도적이기 짝이 없는 그 기운은 마기(魔氣)였다.
순간적으로 마기에 압도당한 요괴들이 일제히 요기를 내뿜었다. 마기에 저항한다. 요괴들의 기세가 오르기 시작했다. 역으로 요기가 마기를 압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魔)가 일보를 내딛기 전까지는.
쿵.
무형의 파동이 일어나 세상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에 닿은 모든 것들이 강제로 짓눌리기 시작했다.
요괴들의 기세가 단번에 꺾였다. 약한 요괴는 마음이 꺾인 듯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 여파는 멀리 떨어져 있는 백호 가면들에게까지 닿았다. 그들은 몸을 짓누르는 압력을 느꼈다.
-크윽!
-수, 술법 입니까?!
-아니, 이건….
쿵!
두 번째 발걸음.
간신히 서 있던 요괴들이 전원 바닥에 무릎 꿇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의 주변에 있던 나무가 부러지고 바위가 부서진다. 세상이 짓눌린다.
요괴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남자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허나 남자는 무심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쿵!
세 번째 발걸음.
거대한 마기가 주변을 휩쓸었다.
요괴, 인간, 세상 할 것 없이 모두 터져나갔다.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놈은 소천마 성유진이다! 내기를 이용해 몸을 보호해라!
다행히 마(魔)는 군림하지 않았다. 대신 엉망진창이 된 땅을 걸으며 도명산으로 입도했다.
허나 백호 가면의 무리는 안도할 수 없었다.
-허억, 헉. 머, 머리가 아파! 내, 내가 그때 죽인 건…!
-나, 나는 절대로 구,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다!!
그들은 머리를 붙잡았다. 물리적인 고통은 없었다. 대신에 무언가가 자꾸만 떠올랐다.
그것은 악(惡)이었다.
죄악을 속삭이며 욕망을 충동질한다.
그것은 번뇌(煩惱)였다.
도저히 떨쳐낼 수 없다. 설령 죽더라도 이 번뇌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마라(魔羅)였다.
마(魔)가 스며든다.
“정신 차려라!!”
백호 가면을 벗은 남자가 일갈했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심후한 내공이 다른 이들을 일깨웠다.
“머리를 비워라! 심마(心魔)를 대처하는 방법은 너희도 알고 있을 터다! 백령심결의 구결을 외워라! 백호의 기운이 우리를 가호하니, 이깟 심마 따위는 우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배우고 익혀왔던 백령심결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들의 몸에서 하얀 기운이 흘러나온다.
심마가 점차 물러간다. 심마는 사라지는 와중에도 자신들을 비웃는 것처럼 그 잔향을 남겼다. 백호 가면들이 심마를 완전히 없앴을 때는 일다경이 지난 뒤였다.
-바, 방금 그게 천마군림보였습니까?
-말로만 듣던 것보다 훨씬 무시무시하군요. 강제로 심마를 일으킨다니….
“모르겠다. 내가 알기로 천마군림보에 심마를 일으키는 능력은 없었다. 단순히 압도당해서 일어난 심마일지도 모른다.”
남자는 한숨을 쉬며 벗은 백호 가면을 다시 얼굴에 썼다.
-…가자. 예상 이상의 시간을 소모했다. 소천마 성유진과 마주하게 된다면… 심마에 먹히지 않게 단단히 각오하고 전투에 임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