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121 - 2121. 광명승천도
우리는 부푼 기대감을 갖고 정상으로 향하는 길을 걷는다.
도명산 정상에 올라서기 직전, 한 노인이 나타나 우리의 앞을 가로막았다. 흔한 행색의 노인이었다. 신묘함도, 신성함도 없었다. 근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네 할아버지처럼 생겼다.
명혼대사도 그렇고 갑자기 나타나 막아서는 놈들이 왜 이렇게 많지? 살의를 일으키자 노인이 손을 휘저었다.
“진정하게. 나는 그대들과 싸울 생각이 없네. 도명산의 정상에 오를 그대들을 축하해 주기 위해 나타났을 뿐이라네.”
“축하는 잘 받도록 하지. 그럼, 이제 꺼지시지?”
“성질이 급하군. 이해하지 못할 건 없네. 명혼대사가 자네들을 공격했으니 말일세. 오랜 친구의 무례는 내가 대신 사과하겠네.”
“사과할 시간에 말리지 그랬나?”
“명혼은 우리 중에서도 고집이 세고 정의를 추구했지. 그는 생전에 사악한 자를 살려두는 법이 없었네. 범죄자가 보이면 죽이고, 사파 무인이 보이면 죽이고, 마두가 보이면 죽였지. 명혼은 그게 세상을 위한 일이라 진심으로 믿고 있네.”
“그리고 놈은 내 손에 죽었지. 땡중의 복수라도 할 셈이냐?”
“아닐세. 규칙을 먼저 어긴 건 명혼일세. 내가 그대들에게 보복할 명분은 없네. 명혼은 자네가 천하에 피바람을 일으킬 것이라 했네만… 그건 속세가 해결해야 할 일이지. 우리 같은 망자들은 그저 숙명을 다할 뿐이네.”
“그래서 진짜 목적은 뭐지?”
“말했잖나. 축하해 주기 위해서라고. 비단 자네들이 정상에 오른 것만이 아닐세. 나는 자네들의 행운을 축하하네.”
“행운?”
“도명산은 천년을 주기로 나타나네. 저번 주기에서는 유감스럽게도 정상에 오른 자가 없었네. 이쯤 말하면 알아들었겠지?”
못 알아들었다.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일단 쥐어팰까.
고민할 때 사마령이 입을 열었다.
“…저번 주기의 기운이 누적되어 이번 의식에까지 이어진 것이군요.”
“그렇다네. 즉, 자네들은 원래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지. 그러니 내가 어찌 자네들과 같은 행운아들을 직접 축하하지 않겠는가! 도명산의 의식을 설계하고 진행한 우리들조차 누리지 못한 해운을 누리는 자들이여! 축하한다네! 하늘은 자네들의 편인 것 같군! 자, 올라가서 달콤한 보상을 취하게!”
짝짝짝.
노인은 박수를 치며 옆으로 이동해 길을 비켰다.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비켜선 것이다. 여전히 나는 놈이 의심스러웠다. 명혼대사처럼 갑자기 뒤에서 통수를 치면? 이 세계에 있는 놈들은 믿을 놈들이 별로 없었다.
‘그냥 내가 먼저 죽일까?’
노인은 나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자네를 이길 수 없네. 또한 우리는 망자에 불과한지라 도명산의 보상을 받을 수 없지. 올라가게. 귀혼흑수는 내가 지켜보고 있겠네.”
노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만, 정상에 오르기 직전에 그의 목소리가 아련히 들렸다.
“천강이 천기를 만났으니… 이것 또한 운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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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산의 전설에는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한 자에게 하늘과 별의 축복이 내린다고 한다.
하늘은 그렇다 치고 별. 대체 어떤 별이 축복을 내리는 것일까.
도명산 정상에 오른 나는 바람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봤다. 내 좌우에 있던 사마령과 성지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뿌연 구름이 보였다. 발아래로는 거대한 산이 보였다.
나는 그 산의 꼭대기에 서 있었다. 시선을 위로 올리면 하늘이 보였다. 높아질수록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 그곳에는 무수히 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중심에 있는 가장 빛나는 별에서 빛이 떨어졌다.
별빛은 천천히 떨어지며 내 몸을 감쌌다.
‘원하는 걸 준다고? 그럼 내가 원하는 게 뭐지?’
혼수상태의 미령을 구한다? 이미 그녀를 구할 방법을 알고 있다. 사마령이 협조해 준다고 했으니, 이 일이 끝나면 바로 미령을 찾아가 그녀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절세의 무공과 경지상승? 절세의 무공은 이미 내 양손에 있다. 경지상승? 내 힘으로 할 수 있었다. 내겐 천강성 시스템이 있으니까.
‘무기는 화련비도가 있지. 갑옷은 스톰브레이커가 있고. 내가 원하는 건….’
갑자기 시야가 바뀐다. 도명산이 내게 다른 무언가를 보여주고 있다는 걸 알았다.
잘생긴 남자와 다 죽어가는 몰골의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두 눈에 힘이 없었고 비쩍 마른 몸은 발끝에서부터 세포가 괴사하고 있었다.
남자가 노인에게 물었다.
“해영선사(海瑛仙士)여, 어찌하여 아름다운 선계를 뒤로하고 다시 인간계로 내려온 것입니까? 저는 선사께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늘 위로 날아올랐던 그날의 광경을 잊을 수 없습니다. 애초에 선계에서 하계로 다시 내려올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신선들은 어째서 인간계에 개입하지 않는 것입니까?”
“선계는 환상이다. 무릉도원 따윈 없었다. 등선은 함정일 뿐이다. 선인(仙人)은 선(善)하지 않고, 신선은 전능하지 않다. 내가 본 선계는 인간계와 별반 다를 것 없었다. 그곳에는 그곳만의 법과 권력이 존재한다.”
“……그렇습니까.”
“별로 놀라지 않는구나. 알고 있었느냐?”
“신선이 선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자들이 모여있는 세계가 이상향일 리 없지요. 등선이 함정이란 건 무슨 뜻입니까?”
“등선이란 신선들이 열어 준 길을 통해 선계로 향하는 것. 그 길을 이용하는 대가로 힘을 잃고 선인이 된다. 그리고 선인의 노예가 되어 일하게 된다. 운이 좋아 힘을 쌓더라도 신선이 되려면 수백 년을 수련해야 한다.”
“…그래서 등선은 함정이란 뜻이군요.”
“아니다. 힘을 잃고 선인의 노예로 사는 것?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힘을 쌓아 세계를 넘었으니. 수련이 뭐가 문제이겠느냐. 오히려 수련은 선계 태생의 선인들보다 우리가 더 유리하다. 등선이란 승천을 가리기 위한 미끼에 불과하다. 그들은 승천자가 나타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승천이란 무엇입니까?”
“승천이란 모든 한계를 벗어나 원신(原神)이 되는 것. 선계와 명계를 비롯한 다른 세계는 신의 탄생을 원하지 않는다.”
“다른 세계에서는 승천할 수 없습니까?”
“할 수 있다. 허나 거의 불가능하지.”
“인간계는 가능합니까?”
“인간계. 달리 중간계라 불리지. 왜 중간계라 불리는 줄 아느냐? 모든 세계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계는 다른 세계보다 승천의 성공 확률이 더 높다.”
“등선이 함정이란 걸 이해했습니다. 하면 어찌해야 승천할 수 있습니까?”
“알 수 없다. 놈들이 철저히 숨기고 있으니…. 확실한 건 놈들은 승천을 무슨 수를 써서도 막으려 할 것이라는 거다. 그러니 승천을 시도한다면 최대한 조용히 행하라. 승천에 관한 정보를 찾는 것만으로도 선계의 시선을 끌 수 있음이라.”
“명계도 그렇고… 선계도 믿을 수 없군요.”
“중간계 또한 마찬가지다. 수호사신(守護四神)을 믿지 말거라. 그들은 선계와 따로 소통할 수 있다.”
“혹시 그들이 승천에 관한 정보를 숨기는 자들입니까?”
“내가 추측하기로는 그러하다. 진현아. 승천에 집착하지 말거라. 내가 본 너는 누구보다 뛰어난 천재다. 너는 결국 승천하게 될 것이니. 조용히 그때를 기다리거라.”
“승천 자체에는 관심 없습니다만, 이 세계의 질서를 위해 승천이 필요하다면 할 것입니다.”
젊은 남자의 말을 끝으로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승천이 무엇인지 알았다. 궁금하긴 했지만 이렇게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사마령에게 물어보면 알려줄 테니까.
‘그보다 진현이라.’
진현.
지금 이 세상에서 그 이름을 쓰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다.
황제.
이 천하의 절대자. 사람들은 감히 그 이름을 쓰지 못하다.
‘설마 보상이 이게 끝은 아니지?’
『천기성(天機星)의 빛이 당신을 감쌉니다.』
나는 고개를 올렸다. 저 하늘에서 가장 환하게 빛나고 있는 별이 천기성임을 알았다.
동시에 천기성의 능력도 알았다.
천기성의 능력은 두 개였다.
하나는 대가를 바쳐 과거, 현재, 미래를 알 수 있는 것.
다른 하나는 대가를 바치고 답을 얻는 것.
그 대가가 골치 아팠다. 나 자신을 대가로 바칠 수 있으나… 가치는 크지 않았다. 완전 회복 때문이었다. 즉, 꼼수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천기성은 얻은 게 아니잖아. 알게 된 거지. 진짜 보상을 내놔라.’
나는 하늘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천지의 기운이 내 앞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십이각형의 금속패가 되었다. 크기는 손바닥보다 작았고 색은 쪽빛이었다. 겉모습은 꽤 괜찮았다. 노리개로 사용해도 괜찮을 정도. 이 작은 패물에서 느껴지는 신비한 기운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노리개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허공에 떠 있는 금속패를 움켜쥐었다.
그 순간 세상이 바뀌었다.
산의 정상에 나타난 것이다.
내 옆에는 사마령이 조용히 서 있었고, 반대쪽에는 성지곤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의 육체에서 황금빛 기운이 쏟아져 나온다. 성지곤의 몸이 허공에 두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황금빛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어쩐지 포근한 기운이었다. 도명산. 아니, 의식이 끝나고 평범해진 산 전체가 황금빛으로 변한다.
사방을 휩쓴 황금빛 기운은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땅과 하늘 사이에 기둥이 생긴 것 같았다.
빛의 기둥은 녹아내리듯 무너져 성지곤의 머리 위편에 세 개의 꽃이 피어난다.
환화게 빛나던 꽃은 이어 연기가 되어 성지곤의 정수리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성지곤은 도명산의 보상으로 삼정(三頂)의 경지를 이룬 것이다.
성지곤은 곧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에 정기가 가득했다.
“삼정을 이뤘구나. 축하한다.”
“축하드립니다, 대협.”
“아, 고마워. 사마가주도 감사합니다. 근데 귀혼흑수는?”
성지곤은 바로 귀혼흑수부터 찾았다. 나는 아래를 가리켰다. 귀혼흑수는 바뷔에 묶여 있었다. 성지곤이 환하게 웃으며 귀혼흑수에게 다가갔다. 귀혼흑수가 잠시 정신이 돌아온 것일까. 노파는 성지곤을 보며 미친 듯이 떨었다.
“꺼, 꺼져라, 더러운 놈! 내 곁에 오지 마!”
“귀혼흑수. 난 당신을 책임지기로 맹세했어.”
성지곤이 귀혼흑수의 구속을 풀고선 등에 업었다. 은근슬쩍 귀혼흑수의 가슴을 주무르는 걸 확인했다. 나와 사마령은 고개를 돌려 못 본 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