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123 - 2123. 광명승천도
“아니, 진짜!”
내 품 안에서 미령이 버둥거렸다.
의미 없었다. 미령은 나를 밀쳐내지도, 벗어나지도 못했다. 귀여운 앙탈일 뿐이었다. 정말로 이곳에서 날 어떻게 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아아. 정말. 그냥 여기서 나가자구요! 여긴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보세요. 시시한 자연뿐이잖아요!”
“네가 고향을 좋아한다는 증거지. 그게 아니라면 심상이 고향의 광경일 리 없잖아.”
“굳이 따지자면 고향을 좋아하죠. 하지만 서방님은 뭔가 착각하고 있어요.”
“착각?”
“제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멋대로 착각하시는 거죠. 아니에요?”
“고향에 돌아가기 싫어?”
나는 품에서 내렸다. 계속 끌어안고 있으면 여기서 섹스를 해버릴지도 몰랐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미령의 심상을 둘러보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았다. 내게서 풀려난 미령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간 돌아가더라도 지금 당장은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구유곡은 이 세계에서도 유독 심심한 곳이에요. 허락 없이는 인간이 들어오지 못하는 곳…. 거기서 할 거라곤 수행밖에 없어요.”
“자급자족이 가능한 완전히 폐쇄된 곳인가. 좀비 아포칼립스가 터지면 구유곡으로 가야겠어.”
“자급자족은 무슨. 인간인 척하고 교류를 하는 호인족이 존재해요. 자급자족이 가능한 건 식량 정도가 전부예요. 그 외의 옷이나 향신료 등등 구하기 어려운 물건들은 밖에서 구해오죠. 저희에게 여우 귀와 여우 꼬리가 달렸다 해서 인간과 크게 다를 것 없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령과 오래 붙어 지냈기에 안다. 그녀의 습성 같은 건 없었다. 여우 귀와 꼬리가 달린 인간이었다. 가끔 여우짓을 하긴 해도 그건 인간 여자도 하는 짓이다.
“그런 시시한 곳에 돌아가고 싶을 리 없잖아요. 옛날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전 재밌는 걸 많이 알아버렸어요. 문명화된 차가운 도시 여우라는 거죠. 그리고 절 이렇게 만든 건 서방님이고요.”
알몸의 미령이 요망하게 웃으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내 오른팔을 끌어안는다. 팔이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 사이로 파묻혔다.
“그러니 책임져 주실 거죠?”
두 눈을 반짝이며 날 올려다본다. 얼굴의 각도와 가슴의 접촉과 몸매를 부각시키는 자태. 고운 미소까지. 전부 의도된 것이 틀림없었다. 현대 문물을 통해 완성된 여우짓이라고 할까.
여우짓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남자라는 생물은 알면서도 당해줄 수밖에 없었다. 알몸으로 이러니 더 그랬다.
“당연하지. 넌 내 여자니까.”
“그럼요. 전 서방님만의 여자죠. 그러니 심상 밖으로 나가서 사랑을 확인하죠? 천국이 뭔지 알려드릴게요.”
발꿈치를 들고 색기 가득한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인다.
피식 웃었다. 그녀의 허세 가득한 말이 귀여울 뿐이다. 결국 침대 위의 승리자는 무한 정력의 섹스킹인 나일 테니까.
나는 앞으로 걸어갔다. 미령이 힘을 주어 버텼으나 소용없었다. 나를 따라서 질질 끌려가게 됐다.
“아, 진짜! 이 정도면 한 번 져줄 수도 있잖아요!”
“어림도 없지.”
앞으로 나아갔다.
구유곡의 경치는 감탄을 절로 나올 정도로 뛰어났다. 허나 그것도 잠시. 이 절경에도 사람은 적응해 버린다. 몇 번 보다 보면 질리는 것이다. 오직 풍경만으로 받을 수 있는 자극은 한계가 있었다.
“벌써 지겹죠? 서방님은 특히나 풍경 같은 거에 관심 없잖아요. 아까부터 제 몸을 힐끗거리던데… 이런 풍경보다 제 몸이 더 좋죠?”
“…….”
반박하지 못했다. 미령의 말대로 이런 풍경들보다 그녀의 몸이 더 아름답게 느껴졌으니까.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나는 애써 시선을 떼며 앞으로 나아갔다. 방금은 꽤 위험했다.
“아까부터 자궁이 큥큥거려요. 이거 다 서방님 때문인 거 맞죠? 자, 밖으로 나가서 좋은 시간을 보내죠?”
“늦었어.”
산속에서 집이 나왔다. 위대한 자연과는 어울리지 않다 못해 이질감이 드는 현대적인 건축물이었다. 낙월산에 있는 저택과 똑같은 형태인 것이다.
심상 밖으로 나가자고 칭얼거리던 미령이 조용해졌다.
“낙월산에 있는 저택과 똑같이 생겼네.”
“…심상은 외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아시잖아요. 낙월산의 상황은 즐거워요. 무엇보다 위유 님을 현대 문명으로 타락시키는 맛이 있거든요. 흐흐.”
지금의 위유가 탄생한 건 대부분 미령의 탓이다. 나는 현대 물건을 제공한 것 말곤 한 게 없었다.
“사실 난 네 심상이 현대 도시일 줄 알았어. 넌 서울의 도시를 좋아했잖아.”
“서울을 좋아해요. 지금도 서방님이랑 같이 백화점에서 쇼핑하고 싶고, 영화관에서 최신 영화도 보고, 카페에서 커피도 보고 싶어요. 하지만 제 인생 대부분을 구유곡에서 보냈어요. 구유곡에서 보낸 세월이 있는데 단순히 도시를 열망하는 것만으로는 심상이 변할 리가 없죠.”
하긴 수백 년의 시간을 구유곡에서 보냈는데, 갑자기 심상이 현대 도시로 바뀌면 더 이상한 일이다.
“삼정은 심상을 인식하는 경지라고 하지. 넌 심상을 전부 인식했어?”
“당연하죠! 라고 말하고 싶지만, 조화경의 벽을 넘어서지 못한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저는 제 심상을 전부 파악했다고 착각했던 거죠. 그러니 지금 심상에 갇혀 있고요.”
오기(五氣)는 심상의 밑그림을 그린다. 심상의 중심을 잡는다. 즉, 의식을 세운다고 할 수 있었다.
삼정(三頂)은 심상을 인식하는 경지였다.
조화(造化)는 심상을 그리는 경지다. 심상의 힘을 본격적으로 끌어내 사용하여 현실에 투영하는 경지.
라고 위유가 말했다.
덤으로 심상은 중요하나, 거기에 매몰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심상이 특별하다고 해서 현실의 내가 특출나게 강해지는 것도 아니고, 심상이 빈약하다고 해서 현실의 내가 약해지는 것도 아니다. 강함의 척도에서 심상은 큰 의미가 되지 못한다.
심상이 중요한 이유는 정신적인 성장과 관련 있다는 게 위유의 의견이었다.
아마 위유의 말이 맞겠지. 그녀는 강함과 경험은 결코 무시할 수 없으니까.
미령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특별히 이상한 건 없었다.
미령의 방으로 향한다.
어째 미령이 아까부터 조용했다. 슬쩍 보니 얼굴을 잔뜩 붉힌 채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도망갈 것 같은 모양새였기에 그녀의 품 안에 있는 팔을 빼내 그녀의 어깨에 둘렀다.
미령의 방에 들어갔다. 나는 게임기나 만화책, TV나 컴퓨터 같은 현대적인 물건들이 있을 거라 예상했다. 현실 그녀의 방이 그랬으니까. 그러나 드러난 방은 내 예상과 달랐다.
미령의 방에는 내 사진이 가득했다. 나 혼자 찍힌 사진이 대부분이었지만, 미령과 함께 찍은 사진이나, 유리아나 엘레나, 주서현이 찍힌 사진도 간간히 있었다. 공통점은 그 사진 모두에 내가 찍혀 있다는 것.
“아, 아아아….”
미령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뺨은 토마토처럼 빨갛게 변해 있었다. 이 상황이 부끄러워 죽겠다는 듯이.
“이거. 미령의 비밀의 방이었군. 내가 그렇게 좋아?”
“뭐, 뭔가 오해하시나 본데요.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서방님을 사랑하긴 하지만, 아주 죽고 못 살 정도는 아니거든요? 그냥 이건… 추억이에요. 추억!”
“크크. 추억이 나와 관련된 것밖에 없어?”
“으, 그, 그건… 아, 정말이지! 어쩔 수 없잖아요! 서방님을 미친 듯이 사랑하게 돼버린걸!”
미령이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이대로 그녀를 따먹어 버릴까 몇 번이나 고민했다. 심상속에서 따먹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역시 더 둘러보기로 했다. 더 재밌는 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 섹스야 조금 뒤에 하면 되고.
방안을 구석구석 살폈다. 책상 서랍과 옷장, 침대 아래까지.
“속옷도 없네.”
“뭐 때문에 제가 알몸인 상태로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심상이라 벗고 있는 줄 알았지.”
“전 노출증 환자가 아니에요.”
방에는 다른 특이한 건 없었다. 다른 방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시시한 곳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수도꼭지를 틀어도 물이 나오지 않고, TV는 켜지지도 않는다. 적당한 책을 펼쳐보면 내용이 없었다.
“제가 여기서 얼마나 심심했을지 아시겠나요?”
“자위라도 하지 그랬어.”
“여긴 심상이에요.”
“보지 젖어 있잖아.”
“서방님의 영향 때문이에요. 원래는 육체의 감각도 옅어요. 배도 고프지 않고 잠을 잘 필요도 없어요. 시간 감각도 없어요. 여기선 해가 저물지 않거든요. 백마 탄 서방님이 절 구해주러 오리라 믿고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어요. 그리고 예상대로 서방님이 절 구하러 왔죠.”
“내가 오지 않았다면?”
“아마 심상에 잡아먹혀 자아를 잃지 않았을까요? 그리곤 심상과 함께 무너졌겠죠.”
“그럴 일은 없었을걸.”
“네. 서방님이라면 어떻게든 절 구해주셨을 테니까요.”
나는 그녀와 함께 심상을 돌아봤다. 구유곡 깊숙한 곳에 있는 마을을 발견했다. 사람은 없고 건물만 있었다.
“호인족들의 마을이에요. 호인족은 없지만요. 현실의 마을과 똑같을걸요? 이 세계는 몇십 년이 지나도 크게 발전하지 않거든요.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이 세계에 통하지 않아요.”
“깡촌이네. 깡촌녀.”
“아니, 잠깐! 그 폭언은 뭐죠? 구유곡이 시골인 건 인정해요. 하지만 깡촌이라 불릴 정도는 아니에요. 곳곳에 술법이 있어서 이 세계의 다른 마을보다 얼마나 살기 편한데요.”
“인터넷 없잖아.”
“윽.”
“코팡도 안 되고 배민도 안 되지.”
“이 세상은 혀, 현대가 아니니까요.”
“이 세상이 현대처럼 문명이 발전했어도 안 될 것 같은데.”
“……인터넷 정도는 되지 않을까요?”
생각해 보니 시골 깡촌에서 상경한 촌녀 미령이 도시의 우월한 문물을 맛보고 배달 타락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촌년 미령을 데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재밌는 게 하나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없었다.
“경치만 좋은 깡촌이군.”
“깡촌이라 하지 말라니까요. 구유곡은 자연보호지역이에요. 공기 좋고, 물 좋고… 수련하기 좋은 곳이죠.”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구유곡의 구석진 곳에 도착했다.
“어라…? 이런 곳이 있었나….”
미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작 본인도 모르는 곳인 모양이다.
우리는 곳곳에서 활활 타오르는 파란 불꽃을 발견했다. 불꽃은 여우의 형태로 이쪽을 빤히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