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38화 > 2138. 이터널 에덴
영천류(影天流) 벽계(碧溪)
블레이더에게 달려들었다. 정확히는 달려든 척을 했다. 진심으로 달려들 생각이 없었다. 페이크를 줘서 낚은 뒤에 벌어지는 빈틈을 노릴 생각이었다.
블레이더가 반응했다. 놈의 왼팔이 움직인다. 칼날이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벽계는 착시 현상을 이용한 기술. 놈이 낚인 것이다.
옆구리에 틈이 벌어진다. 키가 큰 만큼 그 틈도 컸다.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상체를 낮추고 파고들며 칼을 휘둘렀다.
은빛이 번쩍인다.
뇌천류(雷天流) 뇌광(雷光).
카앙!
최속의 일격이 블레이더의 오른팔에 막혔다. 칼이지만 금속이 아닌 생물의 팔인 그것은 갈치검을 쉽게 막아냈다. 흠집조차 없었다. 갈치검보다 훨씬 더 날카롭다는 증거였다.
블레이더가 왼팔을 치켜올렸다. 보법을 밟아 뒤로 물러났다. 부우웅. 놈의 왼팔이 허공을 갈랐다.
이어 블레이더가 움직였다. 현란하게 발놀림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양팔을 휘두른다.
'이놈의 힘을 생각하면… 이 공격은 못 막는다.’
뇌천류(雷天流) 비뢰신(飛雷神).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했다. 허나 뺨에 상처가 생겼다. 닿지도 않았는데 그 여파만으로 뺨이 베인 것이다. 신경 쓰지 않고 공격에 들어갔다.
파지직.
갈치검이 은빛으로 빛나며 놈의 목에 들어간다. 회심의 찌르기는 놈이 목을 까딱이는 것으로 비켜나갔다.
"크케케케케케.”
블레이더가 웃는다. 이 상황이 즐겁기 짝이 없다는 듯이.
블레이더의 양팔이 어지럽게 움직인다. 질서 따윈 없다. 검술 따윈 개나 줘버렸다는 듯이 자기 기분에 맞춰 검을 휘둘렀다. 빠르면서도 경쾌하다. 하지만 그뿐이다. 날카로운 칼날과 강대한 힘이 없다면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움직임.
나는 춤을 추듯이 블레이더의 칼을 피했다. 못 피할 공격은 칼로 흘렸다.
땀이 비 오듯이 흐른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죽는다. 다음 기회? 글쎄. 회복도 무한하지 않았다. 놈이 내 시체를 가만히 놔둔다는 보장이 없었다. 높은 확률로 내 시체를 먹겠지. 최악의 경우 영원히 놈에게 잡아 먹히는 신세가 될 수 있었다. 뭐, 그때는 미사일이 날아와 놈을 죽여버리겠지만.
'존나 힘드네.'
팔이 무겁다. 칼을 쥔 손바닥에선 피부가 까졌는지 피가 흐른다. 허벗지는 터질 것 같고 종아리는 경련한다.
'지친 건 나만이 아니야.'
계속해서 칼을 휘두르는 블레이더도 지쳤다. 그 상체는 아지랑이가 보일 정도로 뜨거웠다. 변종도 생물이다. 한계가 존재한다.
파지지직.
뇌전을 일으켜 근육을 자극했다. 느려지는 팔을 전기로 이끌고, 힘이 빠지는 하체를 전기로 지탱했다. 그럼에도 한계까지 혹사당한 육체는 주춤거렸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
블레이더가 기합을 지르며 양팔을 휘두른다. 틈을 놓치지 않고 온 힘을 다한 최후의 일격.
‘피할 수 없다. 억지로 다리를 움직여도 늦어.'
그러니 막아야 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검을 옆으로 세워 들어 올렸다.
흘리는 것도 아닌 정면으로 막아내는 것. 카아앙! 블레이더의 양팔을 튕겨냈으나, 갈치검의 칼날이 박살 났다. 그 파편이 아래로 쏟아진다.
“크케케케!”
블레이더가 승리를 확신하며 웃었다.
“크크. 병신.”
나도 승리를 확신하며 웃었다.
'회복'
내 능력인 회복은 사람의 상처만 회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물건 또한 회복의 영향을 받는다. 마치 시간이 되돌아가듯이.
칼자루에서 부서진 칼날이 회복된다. 마치 새로운 칼날이 돋아나는 듯한 광경이다.
블레이더의 웃음이 사라졌다. 부릅뜬 두 눈에 경악이 서린다. 양팔을 볼품없이 허우적거리며 내 공격을 막으려 하지만….
'늦었어.'
뇌천류(雷天流) 뇌광(雷光).
파란 번갯불이 번쩍이며 블레이더의 목을 베었다. 그 목이 바닥에 떨어지고 몸통은 우뚝 멈췄다. 한 박자 뒤, 잘린 목에서 피 분수가 솟구쳤다.
놈의 강인한 육체가 바닥으로 쓰러진다.
나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온몸이 쑤신다. 피곤하다. 씻고 자고 싶다는 욕망이 들었다. 나는 블레이더의 시체로부터 거리를 벌리고 그늘 아래로 들어가 드러누웠다. 조금이지만 살만했다.
30분 정도 지나자 호송차와 탑차 몇 대가 나타났다. 차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내려 시체로 다가갔다.
“수고하셨습니다.”
그중에는 이연희도 있었다. 그녀가 내게 다가와 시원한 생수를 건넸다.
“직접 여기까지 나올 줄이야.”
“많은 연구원이 블레이더의 시체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전략 물자급이라는 뜻이죠.”
"부탁이 하나 있어."
“네. 시체의 일부를 달라는 건가요?”
“아니. 블레이더의 칼을 연구한 자료를 줘. 아주 쓸만한 칼이더라고.”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애매한 말이었다. 따지기에는 내가 너무 피곤했다.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사람을 붙여드릴까요?”
“아니. 조금 쉬다가 알아서 돌아갈게.”
-유진! 약탈자야! 약탈자 무리가 성악초등학교를 습격 중이야!
나채영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쉬고 있던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몇 명?! 무장 상태는?!”
-50명. 무장 상태는… 총으로 무장했는데 보니까 별거 없네. 이 정도는 알아서 처리할게.
나채영은 순식간에 냉정함을 되찾았다.
약탈자.
약탈을 전문으로 하는 범죄자를 일컫는다. 약탈자는 대부분 자기들끼리 무리를 이뤄 활동한다. 위험한 것과는 별개로 성가신 놈들이었다.
“총으로 무장한 약탈자들이라니…. 수상하군요.”
“아. 그것도 그렇군.”
“아무래도 일우 그룹의 후원을 받는 약탈자 무리인 것 같군요.”
나를 협박하던 일우 그룹의 이사 진충현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약탈자들 뒤에 일우 그룹이 있다는 이연희의 추측은 확실할 것이다.
나채영은 전기 바이크와 트럭을 이끌고 도로를 달려오는 약탈자를 싸늘한 눈으로 지켜봤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지금은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우와, 많네. 그 녀석도 없는데 어떻게 할 거야?"
옆에서 최혜진이 야구 방망이를 까딱이며 말했다. 성유진과 블레이더의 전투 영상을 보고 몸이 달아오른 그녀는 지금이라도 달려 나가고 싶어 했다.
"유진이 없어도 이 정도는 우리가 처리할 수 있어. 고작해야 50명. 총은 있어도 방탄복은 갖춰 입지 않았어. 방어의 이점을 살리면 보안팀만으로 해결할 수 있어. 드론을 이용해 폭탄을 떨어뜨린 뒤 전투를 치르면 피해 없이 승리할 수 있을 거야."
폭탄과 드론을 아낄 생각 따윈 없었다. 이럴 때를 위해 준비한 것들이니까.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것 같진 않은데?”
"뭐?"
“저기 봐. 저 앞에 달리는 트럭 위에 턱 하니 앉아 있는 대머리 새끼. 저 새끼 뭔가 느낌이 안 좋아. 좀 강해 보인다고 할까?”
나채영은 최혜진의 특성 중 하나인 본능을 떠올렸다. 본능에 의해 최혜진의 육감은 말도 안 되게 발달한 상태다. 그녀가 느낌이 안 좋다고 하면 정말로 뭔가 있다는 것이다.
'아마 각성자겠지.'
그래도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물었다.
“유진과 비교하면?”
“비교도 안 되지. 성유진은 범접 불가의 괴물이야."
“……너랑 비교하면?”
“싸워보지 않았으니 몰라. 근데 적어도 질 것 같지는 않아.”
“혹시 모르니 전투 준비해. 가서 죽을 것 같으면 그냥 죽어. 어차피 유진이가 널 다시 살려줄 테니까.”
“소모품 취급이야? 존나 너무하네.”
그리 말하는 최혜진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나채영이 떠나고 최혜진은 이어서 손태형에게 연락했다.
“손태형 씨. 약탈자 50명이 습격 중이에요. 아직 입구에는 도착하지 못했지만 이제 곧 도착하겠죠. 뒷문으로 나가서 약탈자들의 뒤를 공격하세요. 보안팀 몇 명을 데려가셔도 됩니다.”
-네․ 박사님.
보안팀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동안의 훈련이 빛을 발했다. 학교 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쌓고 정면에 총을 겨누었다.
약탈자들은 입구와 가까워지는데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전투용으로 개조한 트럭을 앞에 내세우고는 입구에 꼬라박았다. 입구가 무너지고 총격전이 시작되었다.
-여긴 우리 베어링이 접수한다!
약탈자 리더로 보이는 대머리가 소리쳤다. 그의 피부는 회색의 강철로 변해 있었다. 총알을 맞아도 튕겨 나갈 뿐이다.
'역시 능력자였네.'
출동한 전투 드론이 하늘에서 폭탄을 떨어뜨린다.
-폭탄이다!
-트럭으로 아래로 들어가 엎드려!!
약탈자 무리의 피해는 미미했다. 개조 트럭이 폭탄의 화력을 견뎌낸 것이다.
‘…단순히 트럭에 철판을 덧대 개조한 수준이 아니야. 최소 장갑차 수준. 전문가의 기술이 들어갔어.'
전투 드론들을 자율 전투 모드로 이행했다. AI가 전투 드론을 조종하며 각개 전투를 벌인다. 아직 데이터가 많이 쌓이지않아 AI의 전투 드론 조종은 완벽하지 않았다. 전투 드론이 하나씩 추락한다.
‘괜찮아. 적들의 수는 벌써 반으로 줄었어. 이쪽이 더 우세해.'
변수가 없다면 무난하게 끝날 전투.
-이 자식들이! 항복이나 할 것이지 끝까지 저항하는군. 이것만큼은 안 꺼내려고 했으나… 어쩔 수 없지. 얘들아, 버티기만 해라!
약탈자의 리더는 트럭에서 모닝 스타를 꺼내 들고 정면으로 돌진했다. 자신의 능력을 믿고 들이받는 것이다.
까아앙!
청명한 금속음이 울리고 리더의 강철 몸이 뒤로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아저씨. 손맛 죽이는데?
금속 야구 배트를 든 최혜진이 등장했다. 총탄이 빗발치는 곳에 티셔츠와 청핫팬츠, 독수리 야구 점퍼를 입고 야구 모자를 쓴 그녀가 양아치처럼 걸었다. 신기하게도 그녀의 몸에 닿는 총알은 없었다. 본능을 이용해 총알이 없는 곳으로 움직인 것이다.
-크으윽. 이 년…. 너도 각성자구나! 그 새끼가 없다고 해서 왔더니 다른 각성자가 있었을 줄이야! 계획이 틀어졌다! 후퇴다!
-누가 보내 준대?!
최혜진이 달려들어 대머리 리더를 상대했다. 약탈자들이 리더를 구하려 했으나….
-뒤다! 뒤에서 놈들이 나타났다!
-젠장! 퇴로가 막혔어!
-이거 졌잖아! 항복!
약탈자들이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그들의 리더는 최혜진의 야구 배트에 곤죽이 되도록 맞고 있었다. 성유진에게 훈련받은 최혜진의 상대가 아예 되지 않았다.
‘…과연 5성. 저 정도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거네.'
-하하하하! 스트레스 확 풀리네! 아저씨, 단단해지기 쓰라고!!
대머리 리더는 전투가 끝났음에도 10분 내내 처맞았다.
-아아아악! 씨발! 누가 이 미친년 좀 말려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