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6화 > 2146. 이터널 에덴
건물 옥상은 깨끗했다. 신경 써서 청소한 티가 났다.
우리가 올 거라는 걸 알고 청소한 건 아니다. 다른 옥상도 깨끗한 편이었으니까.
‘정부가 지원하는 식량을 드론을 통해 받으니까. 사람들이 옥상을 청소했겠지. 어차피 세상이 이렇게 되고 할 일도 없었
을 테니.’
이 세계는 기술 수준이 기본적으로 높은 편이었다. 세계가 개판이 되기 전까지 기술 수준은 아마 현실보다 더 높을 것이
다. 드론을 조옹해 식량을 지원하는 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최혜진. 호버 보드 챙겨. 호버 보드로 신발 같은 거 바꾸지 말고. 호버 보드 없으면 평생 여기 있어야 할 수도 있어.”
“아이씨. 뭘 당연한 걸 말하고 있어. 호버 보드는 나도 아끼는 거니까 안 바꿔 먹어."
나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최혜진을 바라봤다. 최혜진은 무력과는 별개로 돌발 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니 잘
주시해야 했다.
'얜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은데 머리가 멍청해.'
그렇다고 어디 가서 사기당할 것 같지는 않다. 본능이 뛰어나서 자기한테 불리한 건 귀신같이 알아채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그 본능도 실수하는 경우도 제법 있지만.
철컥!
옥상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옥상에 들어온다. 대부분 남자였는데 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권총으로 우리를 겨누진 않
았으나, 눈빛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몇몇은 최혜진을 곁눈질했다.
또각또각.
이 상황에서 어울리지 않는 구두 소리가 울렸다. 남자들의 어깨와 허리에 힘이 팍 들어갔다. 군기가 바짝 들어간 군인 같
았다.
구두 소리의 주인은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도배한 여자였다. 상의는 고급 블라우스에 재킷을 걸쳤고 하의로는
A라인 치마를 입었다. 성공한 젊은 여자 CEO 느낌이 난달까. 그녀가 신은 구두는 당연히 값비싼 명품이고 어깨에 걸친 가
방 또한 말할 것도 없다.
얼굴은 실망스러웠다. 여배우 분위기라도 내고 싶은 모양인데, 진한 화장은 도리어 표독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나마
몸매는 뛰어났다. 최혜진보단 못하지만.
“정말 직접 와주셨네요. 감사해요, 성유진 씨.”
“하하. 제 도움을 필요로 하시니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저, 성유진은 국민 여러분의 편입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입에 그리며 정치인처럼 말했다. 먼 미래를 위해서라도 이미지 관리는 착실히 해놔야 했다. 여기 어딘
가에 몰래카메라가 있을지도 모르고.
“제가 성악초등학교 홈페이지에 메일을 보낸 이예빈이에요. 샛별 아파트 주민회 회장으로서 샛별 아파트의 대표직을 맡
고 있죠.”
“이렇게 젊은 여성분이 아파트 대표일 줄은 몰랐습니다. 아, 비하의 의도는 아닙니다.”
"알고 있어요. 저와 만나는 사람마다 반응이 다 비슷해서요. 제가 하는 말은 하나뿐이죠. 세상은 나이와 성별보다는 능력
이 더 중요하다고요.”
“음. 공감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상당히 적대적인 것 같군요.”
“그건… 죄송해요. 지금 아파트 내부의 상황이 안 좋거든요. 오늘만 해도 3명이 실종됐어요. 실종은 곧 죽음을 뜻하죠.”
“저런. 상황이 많이 심각한 모양이군요."
“사람이 사라지고 있는데 심각하지 않을 리 없잖아요!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짜증을 냈네요.”
“이해합니다.”
“아무튼 협조 좀 해주셔야겠어요.”
“…저는 여러분을 도우러 왔습니다만, 여러분이 말하는 협조는 그게 아닌 것 같군요.”
“그렇게 들렸나요? 적대할 생각은 없어요. 제가 말하는 협조란 저희 규칙에 따라 달라는 거죠. 지금의 경우에는 소지품
검사에 협조해 주세요. 아시다시피 바깥에는 약탈자가 많잖아요. 우리 아파트에는 외부인의 소지품을 검사한다는 규칙이
있어요."
"무기나 식량이 나오면 빼앗습니까?”
“식량은 아니고 무기는 빼앗죠. 하지만 여러분은 저희를 도우러 와주신 만큼… 정말로 위험한 물건이 아니라면 아무 일
도 없을 거예요.”
“정말로 위험한 물건이란 게 뭡니까?”
“폭탄이요. 한 달 전쯤에 폭탄으로 저희를 협박한 놈이 있었거든요.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아요.”
유명한 말이 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 그런 만큼 일단 샛별 아파트의 규칙을 따라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소지품 검사는 특별히 놀라운 일도 아니다. 성악초등학교 같은 경우도 외부인이 찾아오면 우선 소지품부터 검사
한다. 그런 만큼 소지품 검사에 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소지품에 폭탄처럼 위험한 건 없네요. 이건 호버 보드인가요?"
“예. 그걸 타고 샛별 아파트로 왔습니다.”
“사람은 몇 명을 운송할 수 있나요?”
“2~3명은 가능할 겁니다. 급하게 아파트 밖으로 나가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아뇨. 그런 사람은 없어요. 여긴 우리의 집이니까요. 집을 놔두고 갈 곳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상당
한 미인이신데 조용하시네요.”
“아, 같이 일하는 친구입니다. 이름은 최혜진이고… 양아치 스러워도 실력은 확실하죠.”
“…그렇군요.”
이 와중에도 최혜진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사전에 웬만해선 말하지 말라고 명령해 둬서 그렇다. 괜히 최혜진이 돌발
행동이라도 했다가 일이 더 귀찮아질 수 있으니까. 다행히 최혜진은 내 명령에 잘 따랐다.
소지품 검사는 빠르게 끝났다. 호버 보드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물건은 없었으니까. 우리는 총기도 없었다. 무기는 야구
방망이와 칼이 전부다.
“일단 내려가서 이야기하시죠."
이예빈은 먼저 몸을 돌려 옥상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의 곁으로 사람들이 붙어서 호위한다. 나와 최혜진은 잠자코 그녀의
뒤를 따랐다.
“엘리베이터가 있는데 쓰지 않는군요. 고장이라도 났습니까?”
“전기가 끊겼어요. 밖의 괴물들이 전봇대를 박살 냈거든요. 엘리베이터를 제외하고도 여러 가전 제품이 먹통인 상태죠.
그나마 정부에서 준 작은 발전기가 있어서 꼭 필요할 때는 쓸 수 있어요.”
“혹시 수도나 가스도 끊겼습니까?”
“가스는 끊겼고 수도는 괜찮아요.”
"……."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은 더 열악했다. 명품을 걸치고 있는 이예빈은 고생한 티가 전혀 없었지만.
복도를 걷다가 현관문에 빨간색 페인트로 X자 표시된 걸 발견했다.
“현관에 X자 표시된 건 무슨 뜻입니까?"
“좀비가 있는 곳으로 판단되는 곳이에요.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으니 표시만 해두고 들어가지 않았죠. 자, 안으로 들어
오세요."
“여긴 예빈 씨의 집입니까? 깨끗하군요.”
"아뇨. 손님용 집이에요. 유진 씨와 혜진 씨는 이 집에서 머물러 주세요."
“저희는 성악초등학교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곳에서 오래 머물 생각은 없습니다.”
“네. 일을 빨리 처리해 주시면 저희야 좋죠. 하지만 쉽지 않을 거예요. 아파트 내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 괴물들은… 사
람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사람의 행세를 하고 있거든요.”
이예빈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생충 타입의 변이체란 걸 알아차린 건가?
“의심 가는 사람이라도 있으십니까?”
“…잠깐 둘이서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민감한 이야기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최혜진에게 눈짓했다. 최혜진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이예빈은 한차례 노려보다가 혀를 차고는
방을 나갔다.
이예빈이 남자들에게 손짓했다. 호위하던 남자들도 방 밖으로 나갔다.
둘이 남자 이예빈은 한숨과 함께 재킷을 벗었다. 하얀 블라우스 아래로 검은색 속옷이 비쳐 보였다.
“샛별 아파트의 대표로서 정말 곤혹스러워요. 아파트 주민들이 하루아침에 2~3명씩 사라지고 있으니까요. 사람들이 겁
에 질려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해요.”
묘한 냄새가 났다.
남자를 흥분시키는 암컷의 냄새와 비슷하다.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음란하다고 해야 할까.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이예빈을 바라봤다. 내 앞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는 이예빈은 노골적으로 블라우스 단추를 풀었다.
"음. 걱정이 많으시겠군요.”
내 시선이 그녀의 가슴팍으로 향했다. 그녀는 내 시선이 반응하지 않았다. 내 시선이 향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다.
“네. 저번에는 현관문까지 부숴서 안에 있는 사람을 죽였다니까요.”
“그래도 남자들을 보니 총으로 무장까지 했던데.”
“총이 있다고 괴물을 이긴다는 보장은 없어요. 저희 아파트에는 보다 강한 남자가, 전문가가 필요해요. 바로 유진 씨 같은
남자가요.”
블라우스 단추를 모두 푼 그녀가 내 옆자리로 와서 앉았다.
여자의 냄새가 더 강렬해졌다. 심장이 팔딱팔딱 뛰는 것은 덤이었다. 나는 그녀의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이예빈은 저항
하지 않았다.
“아흑…. 유진 씨. 계속 샛별 아파트에 남아 있지 않으실래요? 저희를 위해 힘써주신다면… 제가 뭐든지 해드릴게요. 뭐
든지요."
“허벅지를 쓰다듬던 손은 그녀의 사타구니 쪽으로 들어갔다. 팬티에 손가락이 닿는다. 푹신한 감촉이 손가락을 통해 느껴
졌다.
”뭐든지 말입니까?“
"네. 뭐든지요."
이예빈은 각성자다. 확실했다. 남자를 흥분시키고 조종하는 능력 같다. 호위하던 남자들도 이런 식으로 꼬셔 샛별 아파트
의 대표가 된 거겠지.
‘내가 능력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일단 한 번 따먹을까.’
이예빈의 팬티를 벗기려는 순간이었다.
쾅!
충격음과 함께 최혜진의 짜증 서린 목소리가 울렸다.
"아이씨, 이게 무슨 짓이야?! 보자 보자 하니까 사람이 병신으로 보여?! 앙?!"
흥이 깨졌다.
무시하고 이어가려 하니 이예빈보다 최혜진이 더 신경 쓰였다.
"밖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군요.“
"별일 아닐 거예요. 우린 하던 걸 계속하죠."
"별일 맞습니다. 저래 보여도 혜진이는 이유 없이 사고 치진 않습니다.“
밖으로 나갔다. 좁은 복도에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최혜진을 제외하고 전부 남자였다. 최혜진에게 얻어맞은 듯한 남자는 경비복을 입은 중년 남자였다. 그는 배를 맞은 듯 한 손으로 복부를 감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이 미친년이 갑자기 발차기를 날려?!“
"갑자기는 지랄! 네가 내 엉덩이를 만지려고 했잖아!"
"날 치안으로 몰아가지 마라! 그냥 지나가려던 거였다! 이 미친년아!“
남자가 분개하며 권총을 꺼냈다. 물론 최혜진은 쫄지 않고 야구 방망이를 들어 올렸다. 나는 최혜진의 앞으로 나섰다.
"오, 유진!"
"넌 또 뭐야?!"
"감히 내 여자를 건들려고 해?“
스르릉. 허리춤에 걸고 있던 칼을 뽑았다. 깜짝 놀란 경비가 총구를 내게 겨눴다.
"씨, 씨발! 난 이곳의 경비다! 경비라고! 너희들 따위가 나를 무시해?! 칼 따위로 총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보냐?! 내가 사
람 한 명 못 죽일 것 같아?!"
”그만! 둘 다 그만 하세요! 여기서 뭐 하는 짓이에요?!"
뒤늦게 나온 이예빈이 소리쳤다. 그녀의 뾰족한 목소리가 아파트 전체에 울렸다. 경비는 기가 죽은 듯 총을 살짝 내렸다.
”이, 이 회장. 오해야. 난 이 회장의 손님에게 이럴 생각은 없었다. 저 미친년이 날 치안으로 몰지만 않았어도…. 이 회장
은 날 믿어줄 거지? 내, 내가 얼마나 성실히 일하고 있는지 이 회장이 잘 알잖아.“
"그럼요. 알죠. 서로에게 오해가 생긴 것 같으니, 말로 풀죠.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요.“
"오해는 지랄."
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칼을 휘둘렀다. 깔끔한 궤적을 그리며 경비의 양팔을 베었다. 툭 떨어지는 양팔. 나는 이어서 경비
의 양다리도 베었다. 사지를 잃은 놈이 바닥에 떨어진다.
”내 여자를 건들려 했는데, 내가 조용히 넘어갈 줄 알았냐? 죽어, 이 새끼야."
분노를 담아 칼을 휘두른다.
놈의 몸통이 갈라지고 피와 내장이 튀었다.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칼을 휘둘렀다. 1분도 지나지 않아 그것은 단지 고깃덩
어리가 되어 있었다.
"……."
"……."
주변은 싸늘한 침묵 속에 잠겼다. 어느새 남자들은 내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뒤지기 싫으면 총 내려라. 3초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