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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속으로-2148화 (1,928/2,000)

< 2148화 > 2148. 이터널 에덴

이예빈은 죽기 싫었는지 내 명령을 지켰다. 아파트 주민의 명단을 가져온 것이다.

“빨간 X표가 되어 있는 건 실종되거나 시체가 확인된 사람들이에요.”

“파란 X표는?”

“좀비요.”

마주한 김에 이예빈과의 면담을 이어갔다. 면담이라고 해서 불을 건 없었다. 주민 명단에 적힌 신상정보는 굉장히 한정적이라 할 수 있는 건 한정적이었다.

그리고 이예빈은 각성자인 이상 기생충이 아니다. 기생충은 각성자에게 기생하더라도 각성자의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니까.

달콤하면서도 야릇한 냄새와 함께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이예빈이 페로몬 능력을 또 사용한 것이다. 이예빈이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가슴과 허벅지가 강조된다.

나는 이예빈에게 홀리는 대신 옆에 앉은 최혜진을 힐끔거렸다. 이예빈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얼굴과 F컵의 풍만한 가슴과 완벽에 가까운 육체의 비율. 이예빈이 아무리 페로몬을 뿜어도 내 시선은 최혜진에게만 향했다.

나는 아예 최혜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최혜진은 그러려니 했다. 내 스킨십에 익숙해진 것이다. 고작 이 정도로 난리 치기엔 우린 너무 멀리 가긴 했지.

이예빈은 일이 풀리지 않자, 눈살을 찌푸리며 나와 최혜진을 쏘아보았다.

“총으로 무장하고 있던데. 어디서 난 거야?"

“두 달 전쯤인가. 고립되기 시작했을 무렵에 상인들이 와서 저희에게 총을 팔았어요.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놈들이었죠."

"얼마에 샀는데?"

“금 1돈에 권총 한 자루와 총알 30발이요. 식량이나 돈은 받지 않고 오직 금만 받더라고요.”

느낌이 왔다.

아마 일우 그룹일 것이다. 총기 공장이 서울에만 있으리란 법은 없다. 기업이니까 나중을 생각해 금을 모으는 거겠지.

“나머지 총은 아파트에 찾아온 약탈자들을 죽이고 빼앗았어요.”

“나보고 살인자라 비난하더니. 딱히 너희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하, 정당방위예요. 약탈자들에게 순순히 죽을 수는 없잖아요.”

“네가 의심하는 기생충들은 누구지?"

기생충이 아니고, 아파트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만큼 그녀의 의견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예빈은 기다렸다는 듯이 아파트 주민의 이름들을 쏟아냈다.

20명의 이름이 나왔을 때는 흥미롭게 듣다가, 50명쯤 되었을 때는 대충 흘려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기생충이 50명이나 될 리 없으니까. 지금 이 예빈은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자들의 이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나를 이용해 정적을 없애려는 정치질이지.'

어떤 의미로 대단한 여자였다.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은 역시 강상기. 그 남자죠. 그 남자가 있는 103동에서 유독 실종자가 많거든요.”

“강상기? 뭐 하는 놈이야?”

“동대표예요. 제가 102동 대표고, 그 남자가 103동 대표. 아파트 경비를 책임지는 남자인데 늙고 못생긴 게 저한테 추파까지 던지는 남자죠. 뭐, 예전에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는데… 최근에 성격이 바뀐 것처럼 행동해요. 이유가 뭐겠어요. 기생충에 감염된 거죠. 그 남자가 기생충이에요."

“100% 확실해?”

쏘아붙이며 물었다. 내 목소리가 낮아지자, 이예빈은 살짝 겁을 먹었다.

“……100%는 아니고 90%? 기생충을 죽이자고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의견을 냈을 때도 그 사람은 끝까지 거부했어요. 왜 거부했겠어요? 기생충이니까 그렇지.”

“경비원에 관해 말해봐. 아니, 아파트 전체에 대해서 말해. 아파트 돌아가는 꼴을 알아야겠어. 네가 아니어도 말할 사람은 많아. 그러니 쉽게 쉽게 가자고."

“……하, 원래부터 이러진 않았어요."

101동, 102동, 103동.

원래는 3개 동의 주민들은 사이가 좋았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이니까. 하지만 아파트가 고립되고 나서 분위기가 변해갔다.

“원래 101동 대표는 제 남친이었는데 103동 사람들이랑 싸우다가 죽었어요. 아파트 복도에서 사고로 추락했죠. 정말 사고인지는 미심쩍지만요…. 이 일 때문에 101동은 103동과 급격히 나빠졌죠. 그나마 제가 중재하고 있어서 현상 유지가 되는 거예요."

“남친이 죽었는데 아무렇지도 않나?”

“그럴 리가요. 지금도 그 일과 관련된 사람들은 다 죽여버리고 싶죠. 근데 그래서 얻는 이득이 없잖아요. 지금 우리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뭉쳐야 해요."

이예빈은 아주 침착했다. 남친의 죽음을 아예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강상기가 남친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나?"

"당연히 있죠. 강상기가 당사자 중 한 명이니까요.”

이후에 이예빈과의 면담을 끝내고 최혜진에게 물어봤다.

"이예빈을 어떻게 생각해?"

최혜진을 데려온 다른 이유는 그녀의 본능이다. 그녀의 뛰어난 본능은 육감이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어쩌면 기생충을 본능만으로 찾아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그녀에게 걸고 있었다.

“몰라. 그냥 좀 찝찝한 년 같은데? 방 밖으로 나가면서 내 몸을 훑어보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내 옷을 보고 비웃는 것 같았단 말이지."

명품을 덕지덕지 걸친 이예빈으로선 야구 점퍼를 걸친 최혜진이 가소로울 수 있었다.

어쨌든 면담은 계속했다.

102동은 이예빈의 말을 들었는지 순순히 면담을 받았다. 나는 최혜진이 찝찝하다고 평가한 놈들을 따로 체크해 뒀다.

101동은 분위기가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면담에는 협조적이었다.

특히 101동 대표가 인상적이었다.

후드가 달린 회색 점퍼와 마스크를 쓰고 자신의 모습을 꽁꽁 감추고 있었다. 허나 머리카락은 밝은 금색이고 눈은 푸른색이다.

또한 그녀가 여자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서양인답게 몸매가 굴곡졌으니까. 서양인 버프라 그런 걸까. 가슴이나 키는 최혜진보다 더 컸다.

"101동의 이리나?"

"……."

성이 이고 이름이 리나였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대표라고 들었어. 마스크는 벗지?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으면 기생충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어.”

"……."

이리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과 함께 마스크를 벗었다.

‘합격.’

화장기가 전혀 없는 얼굴은 이예빈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녀를 본 것만으로도 샛별 아파트에 온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외국인?"

“부모님이 귀화하고 절 낳아서 한국인이에요. 외국어 할 줄 몰라요.”

이리나가 기계처럼 딱딱하게 말했다. 마치 버튼을 누르면 음성이 나오는 것처럼. 아마 어렸을 때부터 저런 말을 했겠지.

“사교적인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101동 대표가 된 거지?”

“…어쩌다 보니…."

정말 어쩌다 보니 동대표가 된 것 같았다.

나는 그녀에게 관심이 많았으므로 이것저것 더 물어봤다. 이리나는 원래부터 말수가 많은 성격은 아닌 듯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대학생이자, 양궁 선수인데 양궁으로 좀비를 죽이다 보니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 101동 대표가 됐다는 거군.”

“…네. 동대표가 되면 식량을 조금 더 준다고 해서요.”

양궁 선수 캐릭터.

한국 좀비 물을 보면 흔히 나오는 설정의 캐릭터가 여기에 있었다. 금발 벽안이었지만.

“별명이 엘프였지?"

문득 물어보자, 이리나의 두 눈이 커진다.

“…어떻게 알았어요?"

"그럴 것 같았어."

금발벽안에 양궁 선수면 뻔하지 않나.

“101동은 103동과 사이가 안 좋다며.”

"…네. 그렇죠.”

“넌 어떻게 생각해?”

"……."

“다른 사람들에게 말 안 할 테니 솔직하게 말해줘.”

“…딱히 흥미는 없어요. 전 제 일만 하면 되니까요.”

이리나가 어떤 성격인지 감이 잡힌다. 자기 일이 아니면 관심 없는 것이다.

"양친은?”

"……감염돼서 돌아가셨어요.”

이리나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좀비가 어떻게 죽었을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형제나, 자매는 없고?”

“네.”

“아파트 내에서 가장 친한 인물은?"

“……이예빈 언니요."

“아까 들어올 때 보니까 등에 뭔가 메고 있던데. 활이야?"

“네. 활이랑 화살이요."

“총은? 총이 더 위력이 좋잖아.”

“……총은 잘 못 쏘고, 활이 편해서요."

“알았어. 나가 봐.”

이리나는 살짝 고개를 꾸벅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최혜진이 입을 열었다.

“의왼데? 난 네가 바로 저 여자를 덮칠 줄 알았어.”

“그러기엔 아까운 여자니까.”

“데려갈 생각이지? 왜 제안을 안 했어? 다른 여자들한텐 성악초등학교로 같이 가자고 제안하더니."

면담을 하면서 쓸만한 기술자나, 미녀급 여자 몇 명에게 스카웃 하는 제안을 던졌다.

“제안해도 바로 거절당했을걸. 저런 타입은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을 테니까."

“기생충이 돌아다니며 사람을 죽이고 있는 데 만족한다고? 얌전해 보이는데 미친년이야?"

“보니까 죽거나 실종된 사람은 대부분 102동, 103동 사람이야. 101동은 대부분 안전한 거지. 이리나는 실감하지 못하고 있을걸?"

말수가 적은 것과는 별개로 그녀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있어 보였다.

‘총이 있는데도 활을 고집한다라….'

이리나는 각성자일 확률이 컸다. 활과 관련됐거나 다른 힘을 가진 거지.

“뭐, 보통 년 같지는 않긴 해. 근데… 너 무슨 사악한 생각을 하는 거야? 표정이 개 같은데.”

“크크. 재밌는 생각을 하고 있지. 쟤는 억지로 데려가봤자 협조도 대충 할 테니… 데려가달라고 애원하게 만들어줘야지."

“어떻게?”

"지옥에서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러니까 여기를 지옥으로 만들겠다고?”

최혜진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날 쳐다봤다.

나는 낄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건은 이미 충분했다.

개별 면담은 103동을 제외하고 완료되었다.

103동은 감히 내 말을 무시했다. 면담은 아무 의미 없는 뻘짓이라는 게 그들의 의견이었다.

결과적으로 뻘짓이 맞긴 했다. 실제로 내가 얻은 소득은 별거 없었으니까. 기껏해야 최혜진이 찝찝하다고 느낀 수십 명을 분류한 것이 전부. 이들 중에 기생충이 있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103동이 내 명령을 무시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나는 다음날에 바로 행동을 옮겼다.

“103동에 기생충이 있다는 밀고를 들었다. 기생충을 처형할 테니 모두 아파트 주차장으로 모이도록.”

아파트 단지 내부에 있는 1층 주차장. 원래라면 차가 그득해야 할 그곳은 비어 있었다. 자동차를 입구와 외곽에 모아 바리케이드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광장이 된 주차장에 1,000명에 가까운 아파트 주민들이 모였다.

주민들은 자기 아파트 건물 앞에 모여 섰다. 101동과 103동은 원수지간임을 증명하듯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이리나는 후드를 쓰고 마스크를 낀 채 사람들 사이에 있었으나, 이상할 정도로 존재감이 적었다.

반대로 103동의 대표인 강상기는 존재감이 대단한 남자였다.

경비복을 입은 떡대. 목과 팔뚝에는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인상이 좋지 않았다. 아파트 주민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우리 동에 기생충이 있다고? 이봐, 전문가 양반. 그 말 책임질 수 있소?"

"있소? 내가 씨발 네 친구냐?”

짝!

강상기의 뺨을 후려친다. 부서진 이빨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지고, 놈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다 바닥에 떨어졌다.

싸커킥.

바로 강상기의 복부에 발차기가 작렬했다. 강상기가 배를 부여잡고 꺽꺾거렸다. 허벅지에 나이프를 꽂아 넣었다.

"끄으으악!"

강상기의 카리스마는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방해만 된다. 처음부터 내 명령을 무시한 놈이니만큼 확실하게 밟아둘 필요가 있었다. 죽이는 건 미뤄둔다. 당장에는 쓸만한 놈이니.

“강 형님에게 무슨 짓이냐!!"

경비원 중 한 명이 총을 꺼내 들고 앞으로 나섰다.

“어이, 아저씨. 상황 파악이 안 돼? 눈치가 없네.”

최혜진이 나섰다. 야구 방망이 한 번 휘두르자 경비원은 3m는 붕 날아가서는 기절. 주변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나는 강상기를 계속 구타했다. 회복까지 사용했다. 놈의 터진 눈알이나 이빨이 실시간으로 회복됐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강상기는 3분 만에 굴복했다. 나는 10분을 더 팬 뒤에 구타를 멈췄다.

“지금부터 호명하는 새끼는 앞으로 나와라. 김호식."

고요했다.

"안 나와? 마지막 기회다. 김호식.”

고요했으나 김호식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김호식에게 향했으니까.

경비원 복장을 한 김호식은 무언의 압박에 결국 앞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아까 말했잖아. 밀고가 있었다고.”

“저, 전 기생충이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며 두 손을 싹싹 빈다.

"당연히 기생충은 자기가 기생충이 아니라고 말하겠지.”

나는 칼을 들어 김호식을 반으로 갈랐다.

김호식은 기생충이 아니었습니다!

"...다음, 손만덕."

첫인상은 중요했다.

나는 전문가로서 이 아파트에 초빙되었다. 그러니까 아파트 주민들에게 내 능력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내 능력을 증명하는 건 기생충을 찾아내 죽이는 것뿐이다.

고로 기생충이 나올 때까지 죽인다.

나는 실패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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