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0화 > 2150. 이터널 에덴
강상기와의 면담을 시작했다.
강상기는 들어오자마자 허리를 숙였다. 90도. 완벽한 직각으로 꺾이는 허리를 보니 완전히 내게 굴복한 모양이다.
그럭저럭 만족스러웠다. 꼿꼿이 허리를 펴고 들어왔다면 대가리를 후려쳤을 텐데.
어쨌든 알아서 기겠다니 두고 보기로 했다.
면담은 대충 이어갔다. 남자 새끼에게 별로 궁금한 것도 없었다.
“아파트 내에 숨어 있는 기생충이 누구라고 생각하냐?”
움찔.
강상기가 멈칫했다. 그는 눈동자를 굴리다가 되물었다.
"혹시. 이게 밀고입니까?"
“확대 해석하지 마라. 단지, 네 의견을 묻는 거다. 지금 상황은 외부인인 나보다 아파트 주민인 네가 더 잘 알 거 아니야.”
“…기생충으로 가장 의심 가는 건 역시 이예빈입니다. 그 여자는 사람들을 교묘하게 조종할 줄 압니다.”
“다른 이는? 설마 이예빈만 기생충이라 말하지 않겠지?”
“101동의 이리나. 그 여자도 기생충으로 의심됩니다.”
순간적으로 튀어 나가 강상기를 죽여버릴 뻔했다. 감히 내 여자를 기생충이라 모함해?
빠드득.
내가 분노로 이를 갈자 강상기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이고 내 눈치를 봤다.
“샛별 아파트의 정치적 상황은 알고 있다. 적당히 하는 게 좋을 거다.”
“…옙. 죄송합니다."
강상기는 다른 이름들을 쏟아냈다. 대부분 101동과 102동 사람들이었다. 내 엄포 때문인지 103동 사람의 이름도 몇 번나왔다.
“오케이. 나가 봐.”
"저, 성유진 님."
"뭐."
“별거 아니고… 어제 제가 무례를 저지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사과의 표시로 선물을 조금 가져왔습니다.”
그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귀금속이었다. 금과 보석. 적어도 돈 보다는 훨씬 가치가 있었다. 금은 안전 자산이기도 하고.
“흠. 선물은 받지."
준다는 데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앞으로 잘하리라 믿는다. 나가 봐.”
“그, 선물은 더 있습니다. 103동으로 가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모시겠습니다. 차라리 면담도 거기서 하시는 편이….”
"이 새끼가…. 내 시간이 값싼 것처럼 보이나? 아니면 가서 날 죽이려고? 함정인 게 뻔히 보이는구만.”
“아닙니다! 함정이 절대 아닙니다! 성유진 님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준비한 선물들일 뿐입니다! 술과 여자들을 준비했습니다! 결코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우리 애들 중에서 노래도 잘 부르는 녀석이 있습니다!”
“…술과 여자? 음. 날 위해 준비했다는 데 안 갈 수도 없군. 최혜진. 넌 집 지키고 있어라.”
최혜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거 또 발정 났네.”
강상기의 접대는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다음날, 정오.
나는 아파트 사람들을 다시 광장으로 불러 모았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불길한 기색이 가득했다. 나는 우선 사람들에게 식량을 배분했다. 한 사람당 이틀 치의 식량.
정부가 준 지원품인데 통조림과 묵은쌀들이 대부분이었다. 라면의 양은 적었는데 상당히 인기가 좋았다. 듣자 하니 라면이 화폐 대용으로 쓰일 정도라던가. 뭐, 내 알 바 아니었다.
식량을 독점해서 이용하는 건 쉬운 일이나, 관리는 귀찮았기에 공평하게 분배했다. 공평하게 분배했음에도 식량은 남았다. 어제 죽은 자들과 오늘 아침에 실종자 1명이 추가로 나왔기 때문이다.
"강상기."
"예. 성유진 님.”
“내일 오후에 식량 지원이 온다지? 나머지 식량은 103동이 가져라."
“그, 그래도 됩니까?”
강상기는 당연히 반색했다.
“그래. 어제 네 성의가 마음에 들었거든.”
강상기가 희희낙락하며 남은 식량들을 가져간다. 다른 동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103동 사람들은 그 시선을 신경도 쓰지 않고 환호성을 질렀다.
식량 배분이 끝난 뒤에 칼을 뽑아 어깨에 걸치며 분위기를 잡기 시작했다.
“간밤에 기생충이 활개를 쳤다. 102동 사람 한 명이 실종됐지. 가장 의심되는 건 역시 실종된 사람과 친했던 사람들 아니겠어? 호명되는 놈들은 나와라.”
나는 실종자의 가족과 친구 3명을 죽였다. 기생충은 없었다.
“기생충 새끼들… 용의주도하군.”
"……."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다. 특히 102동의 사람들의 눈이 차가웠다. 나는 그들을 보며 침을 뱉었다.
“뭐, 불만 있냐?”
102동 사람들이 눈을 깔았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대표인 이예빈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무고한 3명이 죽었어요. 그런데 할 말이 그거뿐이에요?”
“기생충을 찾아내기 위한 과정에서 발생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
"……당신 방식은 틀렸어요. 적어도 확실한 근거가 있어야죠! 이대로 우리 모두를 다 죽일 생각이에요?”
나는 이예빈에게 성큼 다가갔다. 칼에 묻은 피를 본 그녀의 눈동자가 요동친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날 피해 뒤로 물러났다.
“사람이면 기생충을 옹호하는 발언은 하지 마라. 기생충처럼 보이잖아."
내게 반하는 놈은 기생충이다.
“아, 알겠어요.”
이예빈이 찌그러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다른 사람들을 호명했다. 총 15명. 각 동에서 5명씩 호명되어 광장 중심에 나오게 된 것이다.
그들은 사형수처럼 벌벌 떨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우는 놈도 있었다. 시끄럽게 구는 놈은 최혜진이 야구 방망이로 기절시켰다.
“이들은 모두 밀고를 통해 기생충이라는 의혹이 있는 자들이다. 전부 죽여서 기생충인지 확인하는 건 쉽지만… 그래선 너희가 납득 못 할 것 같더라고. 귀찮지만 민주주의 방식으로 가기로 했다. 기권표는 제외하고 찬성이 과반 이상이면 처형한다.”
원래 마피아 게임에선 시민들의 투표가 재밌는 부분이 아닌가. 지금 군중 속에 숨어 있는 기생충은 심장이 쫄깃할 것이다. 아마 주민들도 그렇겠지만.
“투표는 비공개로 이루어진다. 방식은 버튼을 누르는 식이다.”
나채영의 도움을 받아 간단한 투표 기계를 만들었다. 드론을 통해 오늘 아침에 배달받았고, 설치도 간편했다. 무엇보다 기계인 만큼 내가 조작할 수 있었다.
“처형 대상자는 투표 직전에 마지막 변론 기회를 1분을 주마. 자, 첫 번째 투표를 시작하자. 황형수. 1분 주마. 아가리를 털어 봐.”
“저, 전 기생충이 아닙니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집에서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살려주십시오! 바, 반대를 눌러주십시오! 제발!”
내용은 살려달라는 구걸에 가까웠다. 나는 개입하지 않고 지켜봤다.
투표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찬성 127. 반대 320. 기권 521. 황형수의 처형은 없다.”
“사, 살았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흐흐흑!”
황형수가 바닥에 주저앉아 기쁨의 눈물을 줄줄 흘렸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반대표가 생각보다 더 많았으니까. 그래도 기권표가 많다는 데 위안을 얻었다. 기권표를 던진 사람은 사람이 죽든 말든 관심 없다는 뜻이니가.
이어서 다음 투표가 계속 진행되었다. 10번의 투표가 진행되었으나 처형자는 나오지 않았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103동을 투표할 때였다.
뺨이 홀쭉한 중년 경비원이 식은땀으로 옷을 적시며 사람들 앞에 무릎 꿇은 것이다.
“내, 내가 지금까지 한 것들은 모두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야. 강상기! 강상기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한 거라고! 3달 전에 있었던 투신자살 사건도 강상기가 뒤에서 조작한 사건이라고! 난 아무 잘못 없어!”
“이 미친 새끼가! 어디서 개지랄이야!"
강상기가 바락바락 소리쳤다. 강상기가 뛰쳐나와 중년 경비원을 패려는 걸 최혜진이 막았다.
“아저씨. 규칙은 지켜야지. 앙?"
“저, 저놈이 거짓부렁을 하고 있다고!”
“그거야, 내 알 바 아니고. 사람들이 알아서 판단하겠지.”
최혜진이 강상기의 머리를 야구 방망이로 쿵쿵 때렸다. 강상기는 인상을 쓰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중년 경비원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이 개새끼야! 개소리하지 말고 그냥 뒈져! 넌 처형이다!"
“다 네가 시킨 일이잖아아아아아! 어제도 저 새끼한테 술이랑 여자, 돈도 바쳤고!! 씨발! 네가 제일 개새끼잖아아아!!"
“이 미친 새끼가 진짜!!”
재밌어서 보고 있었는데 이미 1분은 지나 있었다.
“그만. 시간 됐다. 투표 시작해.”
결과.
“찬성 420, 반대 207, 기권 321. 처형 확정.”
전혀 조작하지 않았다.
이놈이 기생충이라서 죽는 것도 아니다. 이놈은 평판이 쓰레기라서 죽는 것이다.
“아, 안 돼. 살려주십시오!"
“닥쳐라, 기생충. 샛별 아파트의 민의는 네놈의 처형을 선택했다.”
그는 나를 원망하는 대신 아파트 주민들을 원망했다.
"개씨발!!! 너희 전부 다 살인자야! 너희 다 살인자라고!! 귀신이 돼서 네놈들을 저주해 주마! 특히 강상기랑 이예빈! 너희 원래 붙어먹었던 연놈들이잖아!"
이예빈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뭐라 소리치려 한다. 그보다 먼저 내가 칼을 휘둘러 그를 처형했다. 그는 죽기 직전에 의혹을 뿌렸다. 아파트 주민들이 벌써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특히 103동은 대표인 강상기를 경계하고 있었다.
이후에도 투표를 시작했다.
반대표와 기권표의 비율이 줄어들며 찬성표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아, 면담은 무작위로 진행되니 그렇게 알아라."
면담의 시간이 곧 밀고의 시간이란 걸 모르는 이가 없었다.
면담을 시작하기 전에 최혜진을 시켜 아파트 분위기를 살펴봤다.
“아주 살벌해. 자기들끼리 말도 잘 안 하고 있더라. 몇몇은 아예 싸우던데? 특히 103동 분위기가 완전 씹창이야."
“101동은?”
“다른 곳보다 나아. 적어도 고성방가는 안 하니까.”
“그래? 이리나 불러와. 면담 좀 해야겠어."
이리나가 들어왔다. 커다란 점퍼로 몸을 가리고 후드와 마스크로 얼굴까지 가린 그녀는 날 경계했다.
“101동에 기생충이 있다는 밀고가 들어왔어. 이에 어떻게 생각하지?"
“…최근 101동에는 아무 문제 없었는데요."
“아무 문제 없으니까 오히려 의심받는 거지.”
"……."
“밀고 중에는 네가 기생충이라는 말도 있어.”
"전 기생충이 아니에요."
“네가 아니면 101동 중에 의심 가는 사람은?”
“……101동엔 기생충이 없어요."
“네 의견을 잘 알았어. 나가봐."
이리나가 몸에 들렸다. 나는 그녀가 문을 열기 전에 말했다.
“참고로 널 밀고한 사람은 101동 사람이야.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나 네게 호감을 갖고 있으니까. 어떻게 해서든 도와줄게."
"……."
이리나는 조용히 떠났다.
최혜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효과가 있는 거야?"
"당연히 있지. 모르긴 몰라도 당연히 흔들리고 있을걸.”
나는 크크 웃었다.
투표는 계속 이어졌고 일주일이 쏜살같이 지났다.
투표가 아예 의미 없지 않았다. 밀고와 투표를 통해 실제로 기생충 2마리를 찾아냈다. 문제는 매일 밤 실종되는 사람이 생긴다는 거였지만. 어쩌면 내 생각보다 기생충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101동과 103동의 갈등이 격해지더니 기어코 전투가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