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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속으로-2152화 (1,932/2,000)

< 2152화 > 2152. 이터널 에덴

이리나는 요즘 미칠 것 같았다.

101동 주민들이 그녀에게 지금 터진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식량이 필요해요! 어제 배가 고파서 기절까지 했어요!”

자칭 굶주린 아줌마가 소리쳤다. 굶은 것 치고는 안색이 좋았다. 세상이 세상이다 보니 집안에 비상식량을 숨겨두고 있으니까. 당장 식량 지원이 없더라도 바로 굶은 일은 없었다.

“103동 놈들이 또 시비를 겁니다! 우리를 만만히 보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 새끼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합니다!”

101동 주민들은 저번에 있었던 사건 때문에 독기가 바짝 올랐다. 103동만 떠올리면 전투를 부르짖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103동과 전투를 한다? 그건 그냥 다 죽자는 뜻이었다. 아니, 성유진이 나설 테니 101동만 손해 볼 것이다.

“성유진. 그놈은 103동만 너무 편애합니다. 듣자 하니 103동이 성유진에게 접대를 한다고 하던데…. 저희도 하죠. 그래야 차별을 안 받을 겁니다.”

요컨대 뇌물을 바치자. 그러나 그 의견을 주변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반대했다. 바칠 물건이 없다는 뜻이었다. 실제로는 자기 것을 내주고 싶지 않았다. 손해를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기생충! 기생충을 죽여야 합니다! 이러다가 우리 모두 기생충에게 죽을 겁니다!”

좀 더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기생충을 구분할 방법이 없었다. 기생충이 의심된다고 막 죽일 수도 없었다. 투표도 중단된 상태. 생충이 의심되더라도 죽일 수도 없었다.

“이리나 씨. 이대로 계속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리나 씨. 식량이 필요해요!”

“이라나 씨!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결정을!”

여기저기서 자신의 이름을 불릴 때마다 이리나의 눈빛이 죽어갔다. 그녀는 지금 후회하고 있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동대표가 되는 게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나보고 어쩌라고?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저번에 동대표 자리를 확실하게 거절했어야 했는데…. 약간의 식량에 정신이 팔려서는.

101동의 전 대표였던 신지훈이 살아있을 적이 더 좋았다. 그때는 조용히 시키는 것만 하면 됐으니까.

“여러분! 너무 과열됐습니다! 일단 진정하시죠! 이리나 씨도 곤혹스러워하지 않습니까!"

젊은 청년이 나서며 주민들을 진정시켰다. 우태현. 항상 이리나를 도와주는 남자였다. 101동의 부대표에 가까웠다. 이리나가 동대표가 된 원인이기도 했다. 우태현이 이리나를 동대표에 추천했으니까.

우태현이 이리나를 보며 웃었다. 사람 좋은 미소. 허나 이리나는 부담스러웠다. 우태현은 선을 긋는데도 그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으려고 한다. 좋은 사람이란 건 알겠는데… 이리나에겐 조금 짜증 나는 타입이었다.

주민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인다. 후드를 쓰고 있는 이리나의 금발 머리 아래로 땀방울이 흘렀다. 옛날부터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건 안 좋아했다.

“그, 일단은 지켜보죠.”

“지켜보기만 하자고요? 가만히 있으면 호구가 됩니다!”

"……."

“이리나 씨. 결단을 내려야 한다니까요!”

"……."

“내 친구가 죽었어요! 103동 새끼들이 총으로 쐈다고요!!”

"……."

사람들은 가만히 있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리나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곧 식량 지원이 올 거예요. 식량 분배는 확실하게 할 테니 굶어 죽지는 않을 거예요. 103동 문제는… 제가 예빈 언니랑 이야기해 볼게요. 저희만으로 해결할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전투는 안 돼요. 기생충 문제도 전문가인 성유진 님에게 말해볼게요."

“아니, 전부 남에게 맡기는 일이잖습니까.”

“저희가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103동이 무시하지 않는다니까요?”

“성유진이 전문가? 그건 그냥 미친놈입니다."

“차라리. 차라리 아파트를 떠나는 방법은 어떻습니까? 성악초등학교에는 기생충도 없고 사람도 많아서 살기 좋다던데….”

사람들이 다시 흥분하기 전에 우태현이 나섰다.

“자, 자, 진정하시고. 이리나의 말대로 기다려 보죠. 다음 식량이 올 때까지는 버틸 수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대화로 해결하는 편이 맞습니다. 기생충은 지금으로서 조심할 수밖에 없죠.”

101동의 회의는 일단락되었다. 사람들이 흩어진다. 몇몇 남자들은 이리나를 힐끗거렸다. 후드를 쓰고 마스크를 써도 드러난 눈매만으로 미녀란 걸 수 있으니까. 특히 그녀의 다이너마이트 몸매는 펑퍼짐한 점퍼로도 쉽게 가려지지 않는다.

“이리나 씨. 피곤하시죠? 들어가서 쉬세요. 제가 사람들을 잘 다독여 볼게요.”

“…태현 씨에게만 일을 맡기는 것 같으니 미안하네요.”

“괜찮아요. 제가 좋아서 이리나 씨를 돕는 거니까요. 아, 저녁에 같이 식사하시지 않을래요? 숨겨둔 라면이 있거든요.”

“……죄송해요. 그건 좀 힘들 것 같아요.”

우태현이 자신에게 호의를 품고 있다는 건 예전부터 알았다. 허나 이리나는 우태현에게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아니, 타인에 대한 관심 자체가 별로 없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뿐이었다.

“오늘도 방에 들어가서 그놈을 감시할 건가요?”

“네. 혹시 모르니까요.”

이리나는 우태현과 헤어지고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 자물쇠만 4개였다. 어쩔 수 없었다. 타고난 미모 탓에 원하지 않는 사건 사고에 휘말리니까. 지금까지 그녀의 집에 침입하려고 한 남자만 해도 7명이 넘었다.

이리나는 베란다 창문 쪽으로 가서 활을 들고 앉았다. 저 아래로 괴물 고양이가 햇볕을 쬐며 그루밍 중이었다. 샛별 아파트 외곽을 돌고 있는 변종 중 하나였다. 이름은 나비. 아파트 주민이었던 캣맘이 길거리에서 기르던 고양이었다. 캣맘은 고양이에게 잡아 먹혔다.

따분하고 귀찮은 일이라도 감시를 계속했다. 저 고양이가 아파트에 들어오는 순간 대참사가 벌어질 테니까.

‘지금 아파트가 난리긴 해도 곧 정리될 거야.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지금 서로 싸울 때가 아니란 걸 알 테니까. 일이 심해지면 예빈 언니가 중재하겠지. 지금까지 그래왔던 대로.'

성유진은… 모르겠다. 자신에게 호의를 보내는 사람인데 아마 외모 때문일 것이다. 그 정도 힘을 가진 사람인데 자신에게 어떤 강요도 하지 않는 점에서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좋은 사람은… 아니지. 그 사람이 오고 나서 죽은 사람이 몇 명이야.'

원망하는 건 아니었다. 애석하게도 타인의 죽음을 원망하는 성경이 아니었으니까. 그저 조용히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게 2시간 뒤, 이리나는 성유진에게 호출당했다. 아파트 내에서 성유진이 가진 위상을 생각하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성유진과 최혜진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갈비찜.

통조림 음식이나 라면 따위랑은 비교도 안 되는 고급 음식. 냄새만으로 군침이 절로 나오는 음식이었다.

“최혜진. 고기만 먹지 마라.”

“오케이. 오케이."

"고기만 먹지 말라고."

“…감자도 먹고 있잖아.”

성유진은 고개를 젓고는 이리나에게 권유했다.

“같이 안 먹을래? 양은 충분해."

“…아뇨. 괜찮아요. 그보다 저를 부르신 이유는….”

“동대표에게만 알릴 소식이 있거든. 모레 식량 지원이 오는 거 알지? 방금 정부에서 연락이 왔는데 지원되는 식량의 양이 3분의 1로 줄었어."

“…네?”

“뉴스를 보면 알겠지만, 목포에 있던 변종을 잡고 복구했다더라. 거기에 지원품이 최우선으로 들어가서 당분간 식량 지원을 줄인대. 전 국민이 힘을 합쳐서 어쩌고저쩌고…. 이건 내가 아니라 정부가 내린 결정이야. 어쩔 수 없어."

“그럼 식량 분배는….”

“최대한 공평하게 나눠야지. 아, 지금 내가 먹고 있는 건 성악초등학교에서 가져온 거야."

성악초등학교에서 지원해 줄 수 없나. 라는 질문은 할 수 없었다. 돌아올 대답은 뻔하니까.

“갈비찜 먹을래?”

“…아니요.”

“식량이 오는 모레부터 투표를 시작할 거야. 기생충으로 의심되는 자는 있어?"

"없어요."

“정말로?”

“네.”

“101동 사람들은 널 의심하던데.”

“네?”

“항상 방에 틀어박혀 있다며? 기생충이라 그렇다더라. 오늘 나랑 면담한 101동 사람들이 죄다 널 지목했어. 이렇게 되면 널 처형대에 올릴 수밖에 없어.”

"……."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기 때문이다. 푸른색 눈동자는 사정없이 흔들렸고, 심장은 미친듯이 뛰었다.

"저, 전 기생충이 아니에요."

억울해서 목소리까지 떨렸다.

“나야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지. 근데 101동 사람들은 아닌 모양이던데?”

“누가. 누가 절 밀고한 거죠?”

101동 사람 전원. 성유진이 아까 그렇게 말했음에도 이리나는 정신이 없어 되물었다. 돌아가서 오늘 면담한 주민을 알아내면 되는 일이다. 허나 성유진은 친절하게도 그녀에게 명단을 보여줬다.

101동의 면담자는 11명. 그중에 우태현이 있었다.

“우태현이란 남자 알아? 네가 기생충이라고 확신하더라.”

이리나는 어질어질했다. 우태현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 왜? 동대표 자리가 탐났나? 그럼 달라고 하면 되지. 이딴 부담스러운 자리에는 별 관심 없었다.

“내 생각엔 우태현이랑 이놈들에게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아. 대표가 우태현인 것 같고…. 동대표 자리를 탐내거나… 너를 겁주려는 거겠지."

“……저를 겁줘서 뭐 하게요?"

“글쎄. 가스라이팅?"

"……."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해야 하죠? 101동 사람들은 저보다 우태현을 잘 따라요. 제가 뭔가를 주장해도 우태현이 반대하면 안 들을 거예요. 어떻게… 어떻게 해야….”

이리나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런 정치적인 문제는 영 아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도망이었다. 근데 어디로 도망가야 하지? 패닉에 빠지는 그녀의 어깨를 성유진이 부드럽게 만졌다.

“진정해. 난 네 편이야. 내가 도와줄게. 투표의 관리자는 나야. 처형을 하는 건 결국 내 마음이지. 내가 거부하면 뭣도 없어. 넌 처형당하지 않을 거야."

다른 아파트 사람이 들었으면 경악할 만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리나는 그의 말에 안심되는 걸 느꼈다.

"...유진 님."

최고 권력자가 자신의 편이라고? 나는 아무것도 안 해도 알아서 해준다고? 이리나는 순간적으로 성유진이 아주 멋져 보였다. 왜 능력 있는 남자가 최고라고 말하는지 알 것 같다고 할까.

"유진 님이 뭐야.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그냥 유진이라고 불러.”

“아, 아뇨. 전 이게 편해서요."

“편하다면야 뭐. 우리 친해진 것 같은데 음료수나 마실래? TV도 좀 보고 말이야.”

이리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성유진이 자신에게 수작 거는 남자처럼 느껴졌다. 일종의 플러팅이 아닌가.

아까처럼 딱 잘라 거절하기 힘들었다. 성유진이 자신을 도와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가 가리키는 거실에는 TV와 콜라 등 최근에는 볼 수 없었던 일상이 있었다. 또 이곳엔 최혜진이라는 여자도 있었다.

"조, 조금만….”

이리나가 소파에 앉았다. 거의 3개월 만에 마시는 차가운 콜라는 눈물 나게 짜릿했다. 디저트라며 권해준 아이스크림도 입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TV에선 뉴스가 대부분이었다. 내용도 목포와 관련된 것들이다. 성유진의 말은 사실이었다.

중단했던 투표를 다시 시작했다.

아파트 분위기는 씹창이다. 내가 오고 나서 100명에 가까운 주민들이 죽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오늘은 10명을 투표한다. 첫 번째 대상자는… 이리나.”

군중 속에 있던 이리나가 흠칫 놀랐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봤다.

우태현이 경악한 표정으로 분노를 토했다.

“어떤 새끼들이 감히 이리나 씨를…!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리나 씨! 제가 이리나 씨를 위해서 반대표를 모으겠습니다!”

"……."

이리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어제도 면담을 이유로 만났다. 101동 뿐만이 아니라 102동, 103동 일부 사람이 이리나를 밀고했다는 걸 이리나에게 알려줬다.

그리고 우태현이 다른 동 사람들과 만나는 것까지 알려줬다. 이리나의 투표에서 반대표를 얻어내기 위해 거래를 한 것이다. 웃기게도 이예빈과 김상기는 그 거래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이리나가 아니라 우태현을 동대표로 보고 있었다.

'우태현, 이 새끼. 이리나를 가지려고 머리 좀 썼네.’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준 은인. 성공했을 때는 신뢰 이상의 감정을 품을 수밖에 없다.

‘근데 안 되지. 이리나는 내 거다.'

우태현을 어떻게 죽일지 고민하고 있을 때, 우태현은 열정적으로 사람들에게 이리나의 무고를 어필 중이었다.

“이리나 씨는 절대 기생충이 아닙니다! 저는 제 목숨을 걸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저와 이리나 씨를 한 번 믿어주십시오!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이리나 씨가 지금까지 저희를 위해 일해준 걸 잊지 마십시오!”

나는 우태현에게 작은 돌멩이를 던졌다. 그의 이마에서 피가 튀었다.

“닥쳐, 새끼야. 아까부터 존나 시끄럽네. 질질 끌 필요 없이 투표를 시작한다. 이리나부터. 이리나. 자기 변론 시간 1분이다.”

이리나와 두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동대표로서 사람들의 신뢰를 받지 못했습니다. 제겐 자격이 없는 거겠죠. 동대표를 그만두겠습니다. 그리고 전… 기생충이 아닙니다.”

할 말이 끝났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살려달라고 빌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지도 않았다. 그 당당하다 못해 담담한 태도에 우태현이 되레 당황했다.

"이리나 씨는 기생충이 아닙니다! 제 일므을 걸고! 제 목숨을 걸고 보장하겠습니다!”

우태현이 소리친다. 나는 우태현에게 달려가 죽빵을 날렸다. 놈의 앞니 2개가 박살 났다.

“씹새끼야. 왜 나대고 지랄이야. 너한테 발언을 허락한 적 없다.”

"으, 으으… 이리나 씨는 기생충이 아닙니다….”

“아주 눈물겹군. 투표나 시작해.”

찬성 342, 반대 308, 기권 245.

조작의 결과였다. 원래는 반대표가 417표다.

이리나가 저도 모르게 주저앉았다. 그녀의 벽안이 수축과 팽창을 반복했다. 나는 충격 받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펑퍼짐한 재킷 때문에 가려져 있지만… 지린내가 나는 걸 보아 살짝 지린 것 같았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처형을 선고받은 놈 중에서 지리는 놈들은 꽤 있었으니까.

날 100% 신뢰하지 않고 있는 것같다. 뭐, 그만큼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으니.

"무슨?!"

우태현이 경악한다. 그는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고 102동과 103동을 죽일 듯이 노려본다.

나는 사람들에게 선언했다.

“이리나는 기생충이 아니다. 내 이름으로 보장하지. 꼬운 새끼는 기생충이므로 처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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