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3화 > 2153. 이터널 에덴
“이리나는 기생충이 아니다. 내 이름으로 보장하지. 꼬운 새끼는 기생충이므로 처형한다.”
"……."
사방이 조용해졌다.
주민들은 내 말을 조용히 곱씹었다. 그 의미는 다시금 되새기고는 얼굴을 붉혔다. 두 눈에 힘을 빡 주며 나를 노려본다. 당장에라도 터질 것처럼 분위기가 고조된다.
그동안 많이 참았다. 그리 생각하고 있겠지. 불만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갈치검을 들고 몸을 까딱거리며 근육을 풀었다.
파지직.
전신에서 스파크가 튄다.
샛별 아파트 주민 전원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해도 뚫는 건 가능했다. 저들을 뚫고 아파트로 들어가서 좁은 공간에서 버티면서 싸운다면 주민들을 전부 죽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주민들은 폭발하기 전에 주변을 둘러봤다. 누군가가 먼저 나서기를 원하는 것처럼. 허나 먼저 나서는 일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민들의 분노가 옅어진다.
1분이 지났다.
이미 터질 분위기는 사라졌다.
이예빈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럼 이제 투표는 어떻게 할 거죠? 투표는 기생충을 죽이기 위해 당신이 제안하고 실행했잖아요. 그리고 지금 당신이 투표를 망쳤죠."
“그렇군. 이제부터 투표는 그만둔다. 됐나?”
"…기생충은 기생충은 어떻게 찾아내서 죽이려고요?”
“지켜보다 보면 기생충 같은 놈들이 있지. 아, 이참에 너희끼리 투표를 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군. 동끼리 나눠서 진행하는거 말이야."
이예빈의 시선이 내 뒤쪽으로 향했다. 다음 처형 투표를 기다리던 이들. 투표가 중단되며 살아남게 된 그들은 지금 분노하고 있었다. 자신을 밀고한 아파트 주민에 대한 분노. 이들이 살아서 돌아가면 문제를 일으킬 확률은 90% 이상이다.
그리고 102동은 현재 기생충에 의한 피해가 가장 큰 동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기생충을 찾아내 죽여야 한다. 그게 힘들다면 최소한 기생충의 활동을 억제해야 한다.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 건 최악인 선택이란 거다.
“…저희 102동은 102동끼리 투표를 진행하겠습니다. 기생충을 찾아내 죽여야 해요. 그러니 여러분에게 묻겠어요.”
이예빈은 내게 시선을 떼고 102 주민들에게 말했다.
“기생충 투표에 반대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 자기 의견을 말해주세요. 불이익은 없을 거라 맹세하죠.”
사람들은 눈치를 봤다. 불이익은 없다? 하지만 여기서 반대하면 기생충으로 오해받을 수 있지 않나. 사람들은 침묵을 택했다.
내가 봤을 땐 이것도 이예빈이 계산하고 행동한 결과로 보였다.
용감한 몇몇은 손을 들어 반대 의견을 말했다. 허나 그들은 대세가 아니었다. 투표란 건 원래 소수의 의견을 묵살되는 법.
“여러분. 우리가 행동하지 않으면 기생충은 더 활발하게 우리를 죽일 거예요. 어제는 3명, 오늘은 2명. 내일은 5명이 기생충에게 당할지도 몰라요. 그러니 우리는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기생충을 찾아내 죽여야 해요. 이게 우리 102동의 뜻이죠.”
반대자들은 대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101동과 103동과 무관하게 102동은 102동만의 투표를 시작하겠습니다. 저기에 기생충 의심자들이 있으니 바로 투표를 시작하죠. 성유진 씨. 투표 기계를 빌려줄 수 있으신가요?"
“마음껏 써라.”
투표를 조작하려면 특수한 리모컨이 필요했다. 그 리모컨은 내 주머니 속에 있고, 저들에게 줄 생각은 없었다.
102동 만의 투표가 시작되었다.
5명의 기생충 의심자. 그중 3명이 처형당해 죽었으며, 1명은 기생충이었다.
투표 처형의 효과가 입증된 순간이었다. 이제부터 102동은 기생충을 찾아내기 위해 자율적으로 투표를 진행할 것이다.
101동은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분위기가 완전히 씹창 났다. 자기들의 손으로 동대표를 죽이려고 했다가 실패한 일이다.
분위기가 좋으면 더 이상했다.
103동은 흥미진진한 눈으로 101동과 102동의 일을 방관했다. 허나 103동의 여유도 곧 끝이다.
“오늘부터 정부에서 지원하는 식량이 줄어든다. 자세한 내용은 동대표에게 듣도록. 아, 오는군.”
나는 하늘을 바라봤다. 상자를 든 드론들이 아파트 옥상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 수는 저번에 봤을 때보다 절반 이하였다. 드론들은 식량 상자를 옥상에 아무렇게나 던지고는 바로 떠났다. 무심함이 느껴졌다.
“정부가 지원하는 식량이 준다고요? 그럼 분배는요? 분배는 어떻게 합니까?”
"알아서 분배해라.”
“성악초등학교에서 식량 지원을 받을 순 없는 겁니까?”
“씹새끼야. 우리한테 식량 맡겨났냐?”
개소리한 새끼를 두들겨 팼다.
식량 지원량이 줄어드는 걸 미리 알고 있던 동대표들은 바로 말했다.
“식량은 동별로 삼등분 해서 나누어 관리하기로 했습니다. 최대한 공평하게 나눠드릴 테니 양해바랍니다.”
동대표들이 말했다. 주민들은 당장은 억지로라도 납득했다. 겉으로만 봤을 때는 모두가 배려하며 평화가 이어질 것 같았다.
'여긴 이미 지옥이야.'
투표로 사람을 죽인 순간부터. 아니, 이 좁은 아파트에 기생충과 함께 갇힌 순간부터 지옥은 시작된 것이다.
나는 이리나에게 다가갔다. 이리나는 아직까지 바닥에 앉아 있었다. 오줌을 지려서 쪽팔린 탓에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일어날 수 있겠어? 부축해 줄까?”
“아, 그. 네. 일어날 수 있어요.”
이리나가 일어났다. 그녀가 있던 장소에는 얼룩이 남아 있었다. 이리나는 부끄러운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럴 땐 모르는 척해주는 게 최고다. 애인 사이였다면 놀렸겠지만… 아직 그런 사이가 아니니까.
“데려다줄게. 101동 새끼들이 무슨 짓 할지 모르니까.”
“...네.”
이리나가 거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101동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사라진 듯했다.
이리나와 함께 아파트로 들어가는데, 우태현이 뒤에서 악을 쓰듯 외쳤다.
"이리나 씨! 이리나 씨! 저희는 반대표에 던졌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저는 이리나 씨를 구하려고 했습니다! 102동과 103동에도 머리 숙여 부탁했는데… 그 개자식들이 배신한 겁니다! 이리나 씨! 믿어주세요!"
이리나가 멈칫했다. 그녀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봤다. 이마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우태현은 광인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저를 밀고한 사람 중 한 명이 우태현 씨와 101동 주민 몇몇 분이란 걸 알고 있습니다. 딱히 복수할 마음 같은 건 없습니다. 그저… 여기서 끝내죠.”
이리나가 다시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나는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주고 현관 앞에서 말했다.
“내 생각엔 우태현이 여기서 끝낼 것 같지 않아. 딱 봐도 무슨 짓을 저지를 것 같거든. 그래서 말인데. 당분간 네 집에 있어도 될까? 내가 여기에 있으면 우태현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거야."
"아. 그, 네. 들어오세요."
이리나의 허락이 떨어졌다. 내가 생명의 은인이라 그런지 나에 대한 경계심이 거의 없어져 있었다. 하긴 내가 그녀를 구했을 때 좀 극적이긴 했다. 그녀 한 명을 구하기 위해 투표를 엎었으니까. 아파트 주민들은 폭동을 일으키기 바로 직전까지간 분위기였고.
이리나의 집으로 들어온다. 생활감이 느껴졌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살았을 테니 당연했다.
“저, 샤 샤워 좀 해도 될까요?”
“아. 당연하지. 이 집의 주인은 너잖아. 천천히 해.”
지려버렸으니 여러 가지로 찝찝할 것이다. 나는 집안 곳곳을 둘러봤다. 부엌 한편에 식량 더미를 발견했다. 통조림과 라면으로 이루어진 것들. 대충 일주일 치 정도의 식량이다.
‘동대표였는데 이 정도 식량밖에 없다고? 식량을 더 받을 수 있어서 동대표를 했다며?’
아무래도 이리나는 호구 당한 것 같았다. 나라면 알게 모르게 수탈해서 3달 치 정도는 숨겨뒀을 텐데.
곧 이리나가 나왔다. 바지와 티셔츠를 입은 금발미녀였다. 후드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지 않은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별명이 엘프답게 팔다리가 길었다. 키는 173 정도로 여자치고 장신이었다. 유일하게 엘프답지 않은 건 커다란 가슴이었다.
"이, 이상한가요?”
“아니. 잘 어울려. 역시 집에서는 얼굴이 가리지 않는구나.”
“집에서는 편하게 있는 편이에요. 그런데… 그분은 혼자 계셔도 괜찮을까요?”
“그분? 아, 혜진이? 걘 괜찮아. 어중이떠중이들에게 당할 정도로 약하지 않아."
수십 명 정도는 혼자 싸워도 이길 것이다. 게다가 지금 그녀에겐 폭탄과 호버 보드가 있었다. 여차하면 폭탄 던지고 호버보드를 타고 도망가면 그만이다.
“물이라도 드실래요? 수돗물을 받아 끓여둔 물이 있어요. 수돗물도 깨끗하긴 한데 어쩐지 믿을 수가 없어서….”
“지금 사태에서 작은 것 하나라도 조심해야지. 좋은 습관이야. 한 잔 부탁해.”
그녀가 미지근한 물을 가져왔다. 전기 부족으로 냉장고도 못 쓰니 차가운 물을 원하면 수돗물을 드리킹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리나가 물을 들고 내 옆에 앉았다.
"……."
"……."
우리 사이는 20cm. 어색한 공간에선 물 삼키는 소리만 들렸다.
“저, 유진 님. 성악초등학교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 성악초등학교는 아무나 받지 않아. 나름 깐깐하게 조건을 따지지. 근데 너라면 환영이야."
"정말요?"
“그래. 활로 좀비를 여럿 죽였다며? 직접 네 실력을 눈으로 본 건 아니지만, 넌 괜찮아. 원래 신입은 갖은 고생은 해야 하지만… 네 뒤엔 내가 있어. 성악초등학교에서 편하게 생활할 수 있을 거야. 뭐, 일은 해야겠지만.”
“일이라니…. 동대표 같은 일인가요? 전 관리자 일에는 자신 없어요. 할 줄 아는 건 활 쏘는 것밖에 없어서….”
그녀의 목소리가 기어간다.
양궁 선수들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양궁 훈련을 한다고 했던가?
나는 씩 웃으며 이리나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흠칫 놀라며 안절부절 못한다. 그녀의 말을 떨쳐내기 전에 나는 말을 이어갔다.
“활 쏘는 걸 하면 돼. 관리? 그런 걸 할 필요도 없어.”
이리나에 대한 파악은 이미 끝났다.
“그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유, 유진 님이 시키는 대로만요? 그, 그러다 제가 실수라도 하면….”
"그거야 내 책임이지. 넌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할 뿐이니까."
"...아."
이리나의 눈빛이 몽롱하게 풀린다.
사람 중에는 극도로 수동적인 사람이 있다. 이리나가 그러했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도 싫고, 책임지는 것도 싫고,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도 싫은 사람. 이리나가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