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8화 > 2158. 이터널 에덴
의외로 날이 갈수록 처형되는 사람의 수는 줄어들었다.
사람들이 알아서 조심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동대표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썼다. 기생충이라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단독행동은 최대한 자제했다. 식량이 부족해 굶주렸어도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처형되는 수가 적어지고 동대표의 권력이 더 강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기생충까지 활동을 자제했다. 함부로 활동했다가 작은 의심이라도 받으면 처형당하니까.
동대표의 권력이 지나칠 정도로 강해지고 있었다.
기생충이 활동을 안 하니 투표도 열리지 않았다. 샛별 아파트에 평화가 찾아온 것 같았다. 3일도 아닌 이틀짜리 평화였다.
탕탕탕!
아파트 내부에서 총성이 울렸다.
침대 위에서 최혜진과 이리나와 함께 3p를 즐기고 있던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총성이 터진 건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최악은 아파트 바깥 변종들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온 경우. 차악은 아파트 주민끼리 총을 겨누고 전쟁을 시작한 경우. 어느 쪽이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챙겨야 할 게 있는 이상. 계속 침대에서 놀고 있을 순 없어.'
옥상에 있는 자들을 지켜야 했다.
나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는 그녀들을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탕탕탕탕탕탕탕!
총성은 더 커져갔다. 여기저기서 총성이 울린다. 무장을 끝내고 밖으로 나온 나는 아파트 주민들끼리 총을 쏘며 싸우는 걸 볼 수 있었다.
101동과 103동. 복도 난간을 엄폐해서 서로에게 총을 쏘고 있다. 아파트 중앙, 광장에는 죽은 시체들이 즐비해 있다. 꼴을 보아하니 아파트 광장에서 주먹질을 해대며 싸운 것 같았다.그러다 방망이 같은 연장을 들었고 총싸움을 벌이는 꼴이되었다.
'올 것이 온 느낌이군.'
동 간의 갈등과 동대표의 압제, 식량 부족, 처형에 대한 공포. 온갖 불만과 스트레스가 한계치에 다다르며 폭발한 것이다.
저기 소총을 든 우태현이 보인다. 우태현은 복도 기둥 뒤에 숨어 쩌렁쩌렁 외쳤다.
“101동 주민 여러분! 이 간악한 103동이 저희에게 총을 쐈습니다! 103동이 사악한 본성을 드러낸 것입니다! 103동을 죽입시다! 103동을 죽이고 식량을 공평하게 배분하여 평화로운 샛별 아파트로 돌아가는 겁니다! 이 개새끼들이 대가를 치르게 해줍시다!!"
탕탕탕탕탕!
강상기가 우태현이 있는 곳을 향해 총알을 갈겼다. 안타깝게도 우태현에게 명중한 총알은 없었다.
“우태현! 선동질은 작작 해라! 먼저 총을 쏜 건 너희 101동의 위선자들이다! 오늘! 101동은 그간의 업보를 청산하게 될것이다! 101동을 죽여라! 저 새끼들의 절반은 기생충이 확실하다!"
탕탕탕탕탕.
총성이 끊임없이 오 간다.
콰아앙!
폭탄까지 터졌다. 폭발력은 별 대단하지 않았지만, 폭탄을 가졌다는 것에 놀랐다.
'사제 폭탄인가?'
전투는 10분 정도 이어지다가 소강상태에 빠졌다.
'총알이 다 떨어진 모양이네.'
샛별 아파트의 주민은 민간인이었다. 총알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소강상태가 됐다고 전투가 끝나냐? 아니었다. 권총을 쥔 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101동과 102동은 각각 마주 보고 서있는데 102동을 통해 이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파트 뒷문을 통해 침투하는 것도 가능했다.
‘강상기. 저 새끼는 아예 현관문을 방패처럼 앞세우고 대놓고 정면으로 가네. 옆에는 무방비할 텐데… 깡은 좋네.’
어쨌든 전투는 근접전 양상으로 이어졌다. 질은 103동이 뛰어났고, 양은 101동이 많았다. 이 전투가 어떻게 될까?
‘뻔하지. 102동 이예빈이 가만히 있겠어? 일단 샛별 아파트 전력이 약해지는 건 막으려 들 테니까. …그런데 이년은 어디간거야?'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할 이예빈이 안 보인다.
'죽었나? 기생충에게 당했거나 먼저 뒈졌거나. 암살당했을 수도 있겠네.'
이예빈은 샛별 아파트의 다른 여자들에게 적대 받고 있었다. 누군가의 남편과 명품을 빼앗으며 살고 있으니 당연했다. 암살 시도가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피해요!”
내 옆에 있던 이리나가 돌연 나를 밀친다. 직후, 총성이 울리며 내 옆으로 총알이 날아와 벽에 박혔다.
날아온 쪽은 101동 옥상. 바로 고개를 올리니 저격총을 든 남자가 보였다. 훈련받은 저격수는 아닌 듯 당황하며 총구를 다시 내게 겨눈다.
‘저격총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시발. 방심했네. 아래쪽에 정신이 너무 팔렸었어.'
등에 메고 있던 배낭에서 호버 보드를 꺼내려 할 때였다. 이리나가 시위에 화살을 메고 당기더니 그대로 쏘았다.
두 눈이 의심스러운 광경이 나타났다. 이리나가 가볍게 쏜 화살은 총알 수준의 속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즉, 화살이 날아가는 게 아예 안 보였다.
'능력자인 건 알고 있었는데… 이런 능력이었나?'
이리나가 비틀거린다. 체력을 많이 소모하나? 아니, 그게 아니다. 충격받은 표정을 보니 살인을 저지르는 게 이번이 처음
인 듯했다.
이미 좀비를 죽였으니 사람을 죽여본 게 아닌가 싶지만… 일반인들은 좀비를 살아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심장이 뛰어도 뇌사 상태이니 어떻게 보면 시체나 다를 바 없긴 하다.
“잘했어.”
나는 이리나의 어깨를 잡고 칭찬했다.
"자, 잘했나요?"
“날 죽이려고 한 놈이잖아. 잘 죽였어. 설마 죄책감을 느끼는 거야?"
“…사람이잖아요. 화가 나서 죽이긴 했는데… 머리가 아니라 어깨나 팔을 맞출 수 있었어요."
“이리나. 넌 내 인형이야. 인형이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 네가 누구라고?”
“유, 유진 님의 인형이요."
“그래. 그러니 앞으로도 날 위해 살면 돼. 인형답게. 죄책감 갖지 말고. 내가 하는 말만 듣고. 그럼 내가 기분 좋게 해줄게. 먹을 것도 주고, 섹스도 해주고. 섹스는 기분 좋았지?"
“…네에. 기분 좋았어요.”
이리나가 자기도 모르게 아랫배를 만졌다. 방금까지 섹스를 했다. 그녀의 보지 안에는 내 정액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이리나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내 말대로만 하면 돼. 그러니 내가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하면 죽여. 죽일 수 있지?"
그녀의 몸을 끌어안으며 물었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 이리나는 마구잡이로 흔들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 죽일 수 있어요. 전 유진 님의 인형이니까요."
“그래. 난 네가 아주 마음에 들어.”
이리나와 입을 맞췄다. 이리나는 이젠 무의식적으로 입을 벌리고 혀를 받아들인다. 흡족했다. 자고로 키스란 혀를 섞는 것이니까.
"우와….”
옆에서 최혜진이 날 쓰레기 보듯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리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키스를 즐긴다.
‘이리나는 원딜이고 최혜진은 근딜. 후방 지원인 나채영까지. 최소한의 정예 인원은 모였다 봐야겠지.'
나채영을 생각하니 나채영을 보고 싶었다. 최근 나채영의 보지 맛을 보지 못했다. 거의 매일 섹스하다가 한동안 못했으니 잔뜩 발정 나 있겠지? 자지를 박는 순간 바로 가 버릴 나채영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상상됐다.
또각또각.
누군가 걸어왔다. 이리나에게서 입을 떼고 복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예빈이었다. 남자들을 끌고 내게 다가온다. 나는 칼을 뽑아 들고 그녀의 앞에 섰다. 이예빈이 약간의 거리를 두고 멈췄다. 남자들의 손에 들린 건 권총, 식칼, 장도리 등등 무기들이다.
“이예빈. 분위기 있는데? 날 죽이려고? 그딴 새끼들로? 갑자기 정신이 확 돌아버린 거냐? 저런 놈들 수십 명이 모여와도 날 못 죽여."
“이들이 평범한 사람들로 보이나요?”
이예빈이 당당하게 나왔다. 그 당당한 태도에 그녀 주위의 남자들을 더 자세히 살펴봤다. 이상한 점은 없었다.
“아, 하긴. 본다고 해도 잘 모르시겠네요. 보고 알아챌 수 있으면, 샛별 아파트는 이미 평화로웠을 테니까요.”
남자들의 귀와 눈, 코와 입에서 촉수가 툭 튀어나온다. 기생충이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성유진. 넌 우리를 죽이려고 샛별 아파트로 찾아왔지.”
“우리의 위험성을 알고 있다는 거다. 아마 넌 플레이어거나, 플레이어의 동료겠지.”
“옥상에 데려갈 사람들을 모아뒀다. 조만간 우리를 구분할 방법이 생긴다는 뜻.”
“떠나기 전에 우리를 전부 죽일 계획이란 걸 우리가 모르리라 생각했나?”
“더는 네게 시간을 주지 않겠다. 너의 뇌를 파먹고 기생하여 정보를 캐내겠다.”
“우리가 한국을. 미래에는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인간의 시대는 끝났다.”
기생충들이 떠들어댔다. 말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걸 보니 미리 말을 맞춘 것 같았다.
나는 이예빈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기생충 새끼들이랑 손을 잡았지?"
“오늘 아침부터요. 제게 접촉하더니 동맹을 제안했죠. 같이 세계를 정복하자는 제안. 나쁘지 않았어요. 제 능력. 그리고 기생충들의 능력을 합치면 충분히 실현 가능하니까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기생충이 진심으로 너와 손잡을까? 필요 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릴 거다.”
기생충은 사람의 기억과 지식을 흡수한다. 기생충이 늘어나고 진화하면 이예빈이 필요 없어지는 순간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죠. 능력은 쓰면 쓸수록 강해진다면서요? 그럼 제 능력도 강해지겠죠. 어쩌면 기생충을 조종할 수 있게 될 정도로."
"진취적인 여성이라 그런지 꿈도 야무지시군."
“비꼬지 마세요. 당신이 제 입장이었어도 그 외의 선택지는 없었을 테니까요.”
그럴 것 같긴 하다. 기생충은 이예빈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죽였을 테니까. 달리 보면 기생충에게 협박당한 것이다.
“이예빈. 넌 특별히 그냥 죽여주마.”
날 습격하러 오긴 했으나, 이 정도야 귀여운 수준이다. 우태현처럼 내 여자를 건들지도 않았고.
“글쎄요. 아무리 당신이라도 쉽지 않을걸요.”
기생충들이 달려든다.
두 놈은 좁은 복도를 꽉 채우고, 한 놈은 난간 위를 달렸다. 그 속도가 만만치 않다. 인간의 육체에 기생충이 차지하면서, 인간의 육체가 변이를 일으킨 것이다. 평범한 인간의 힘과 속도를 생각하면 절대 안 된다.
최혜진과 이리나의 앞으로 나서며 검을 휘두른다. 최혜진이 내 뒤에서 방망이를 꽉 쥐고, 이리나가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이 날아가 달려오는 기생충 한 마리의 머리에 박혔다. 기생충은 멈추지 않는다.
“이 새끼들은 목을 베거나 머리를 반으로 갈라야 해. 화살로는 힘들 테니 관절을 노려.”
"네!"
“최혜진! 넌 함부로 날뛰지 말고 원딜 지켜라.”
“원딜? 아, 오케이."
최혜진이 고개를 끄덕인다. 게임식으로 말하니까 토달지 않고 잘 듣는다.
나는 기생충들을 향해 달려갔다. 지금부터 출 칼춤은 대단히 위험해서 주변에 아군이 없는 편이 더 나았다.
파지직.
새하얀 갈치검이 은빛으로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