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5화 > 2165. 이터널 에덴
"성유진 씨. 잠깐 대화 가능하십니까?"
정장을 빼입은 깔끔한 인상의 남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선한 인상이라 남녀노소 그에게 호감을 느낄 만한 첫인상이다.
나는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최근 유명세를 얻고 있는 남자라 모를 수가 없었다. 그가 유명한 이유는 저 잘생긴 얼굴이 절반 이상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떠오르는 신예 각성자라 그렇다.
“경기도의 불곰 한두호 씨군요.”
“오. 저를 아십니까?"
“뉴스에서 몇 번이나 봤는데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물론 당신의 활약상도 인상 깊었습니다. 거인 변종과 1대1로 싸워 이 기셨더군요."
“거인 변종이라 하기엔 조금 작은 크기였지만... 이기긴 했습니다.”
한두호는 불곰이란 별명답게 불곰으로 변신하는 능력을 가진 각성자다. 내가 볼 땐 불곰도 평범한 불곰은 절대 아니고 신체 능력을 강화된 불곰이 확실했다. 평범한 불곰 따위가 변종을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제게 어떤 볼일이신지?"
가능한 한두호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잘생긴 놈이 내 옆에 있으면 스포트라이트가 빼앗기니까. 못난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은 개소리다. 실제로는 잘생긴 놈이 더 먹고 더 잘친다.
“보기보다 성격이 급하신 듯하군요.”
“곧 버스가 출발합니다. 괴물들을 상대해야 하는 만큼 마음의 준비도 필요합니다. 목숨 걸고 하는 일이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시군요.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저는 각성자들의 권익을 위한 단체인 대한민국 각성자 연맹 을 창설하려 합니다. 성유진 씨. 저와 함께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성유진 씨가 함께 해주신다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각성자 연맹? 그 이름만 들어도 알겠다. 현실의 헌터 협회와 같은 단체를 만드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그게 잘 될까? 가장 큰 문제는 각성자의 수가 적다는 것. 아마 현 대한민국의 각성자는 만 명도 안 될 것이다. 그리고 각성자의 힘이 썩 대단치 않다는 것.
현실에는 자연재해라 불리는 힘을 가진 헌터들이 존재했다. A급 헌터만 되어도 어지간한 대대급 부대보다 더 강했다. 힘이 있기에 대우받을 수 있었다. 이 세계의 각성자는? 당장 나만 해도 C급 헌터에 못 미칠 것이다.
계산 결과. 각성자 연맹은 득보다 실이 크다.
“죄송합니다만, 제겐 책임져야 할 단체가 있습니다.”
“성악초등학교를 버리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당장은 이름만 빌려주셔도 됩니다.”
“죄송합니다. 각성자 연맹은 썩 매력적이지 않군요. 저는 빠지겠습니다.”
“...각성자 연맹은 각성자들을 위한 단체입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언제 각성자를 통제하려 들지 모릅니다. 최악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우린 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하. 한두호 씨는 걱정이 너무 많으시군요. 한국 정부는 각성자들에게 우호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각성자 연맹은 정부를 적대하겠다는 뜻으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현 정부는 각성자들에게 우호적일지 몰라도, 다음 정권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미리 뭉쳐서 대비해야 합니다."
“그건 그때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 같군요.”
내 의지는 확고했다. 결국 한두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포기의 한숨이었다.
"성유진 씨는 같은 각성자를 배려하지 않는군요. 실망했습니다.”
“저도 실망했습니다. 무턱대고 각성자 연맹을 만들 뿐이지 않습니까? 정말 각성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단체가 맞습니까?"
"...음. 저를 신뢰하지 못하시는군요.”
"우린 오늘 처음 만났습니다. 한두호씨는 다짜고짜 각성자 연맹의 창설을 논했지요. 제가 한두호 씨를 어떻게 믿습니 까?"
“...이거 부끄럽네요. 제 실수를 인정하겠습니다. 그래도 각성자 연맹은 반드시 창설할 겁니다. 나중에라도 좋으니 흥미가 있으시다면 연락 주십시오."
한두호는 명함을 남기고 떠났다. 얼굴이 붉은걸 보니 정말로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받은 명함은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나중에라도 각성자 연맹에 들어갈 일은 없을 것이다. 딱 봐도 별 힘도 없을 단체 같으니까.
이윽고 버스는 선월 대형 병원 입구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카메라를 든 기자들과 구경 나온 시민들을 맞이했다.
선월 대형 병원이 도심 근처에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걸 보면 서울보다 지방이 더 나은 것 같네. 저번에 본 부산도 꽤 괜찮은 상태였고.’
서울은 아직 시민들이 자유롭게 움직일 정도의 치안을 확보하지 못했다. 천만 명에 가까운 인구수가 있던 곳이라 서울 곳곳에는 좀비나 변종이 숨어 있었다.
“각성자 여러분! 두렵지 않으십니까?!"
“어떤 마음으로 광주를 지원하시는 겁니까?"
“지켜보고 있는 광주 시민들에게 한마디 해주십시오!”
기자들이 요란법석을 떨었다. 어떤 의미로 대단했다. 저 앞에 있는 대형병원에는 변종과 변이체들이 득실거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변종이 튀어나와 자신들을 공격할 수 있다는 걸 생각 못 하는 건가?'
선월 대형 병원 주변을 둘러싼 군대와 경찰이 자기를 지켜주리라 철석같이 믿는 건가?
어느 쪽이든 멍청해 보였다.
물론 이 생각은 숨긴다. 카메라가 앞에 있으니까. 사람 좋은 미소를 장착하며 성실하게 인터뷰에 응했다.
“저는 광주 시민들을 위해 한걸음에 광주로 달려왔습니다. 변종 따윈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제가 광주 시민들을 지키겠습니다!"
당당하게 외친다. 기자와 시민들은 내게 우레와 같은 갈채를 선사했다.
"성유진! 성유진!"
“서울의 제우스!"
"뇌신 성유진!!”
시민들이 내 이름을 연호한다. 내 눈엔 저들이 표로 보였다. 나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줄 표.
“자, 자, 인터뷰 시간은 여기까지입니다.”
경찰들이 나타나 장소를 정리했다. 그들은 우리를 입구에 설치한 천막으로 데려갔다.
“선월 대형 병원을 점거한 변종입니다.”
경찰 제복을 입은 남자가 TV 화면에 영상을 틀었다. 정찰 드론으로 찍은 영상이었다.
키가 2m에 달하는 긴 머리의 여자가 찍혀 있었다. 등에 유방 4개가 달려 있었고, 손이 성인 남성의 손보다 2~3배 정도 컸다. 외형만 보면 끔찍한 여자 괴물이었다.
“저희는 이 괴물을 캐서린이라 부릅니다.”
괴물의 목에는 명찰이 걸려 있었다. 명찰에 적힌 이름이 캐서린이다. 인간이었을 때는 외국인이었던것 같다.
"캐서린은 기척 없이 은밀하게 행동합니다. 그 점을 주의해 주십시오. 또한 캐서린의 주된 공격 방식은 손으로 붙잡아 으 스러뜨리는 방식입니다. 강철 드론이 저항도 못 하고 으스러졌습니다.”
인간의 몸은 강철보다 나약하다. 캐서린에게 붙잡히는 순간 죽는다고 봐야 했다.
“병원 내에 있는 변이체는 쥐가 변이한 괴물쥐입니다. 50cm 크기에 개보다 비슷한 속도로 돌아다니며 공격성이 높습니다. 타액에 마비 성분이 있으므로 주의하십시오."
경찰의 짧은 브리핑이 끝났다. 각성자들은 전부 같이 움직이기로 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흩어지는게 되려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작전을 시작하기 전, 한두호가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경찰이 눈살을 찌푸리며 한두호에게 다가갔다.
“카메라는 왜 꺼내신 겁니까?"
“인터넷 방송으로 중계를 할 겁니다. 저희의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하신 분들이 많으니까요."
“...카메라는 꺼주시죠. 작전이 유출되는 건 좋지 않습니다.”
“작전 유출? 농담하시는 겁니까? 상대는 변종과 변이체입니다. 설마 변종과 변이체가 방송을 본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시청자들에게 정서적으로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경찰이 한두호의 카메라로 손을 뻗었다.
짝!
한두호는 경찰의 손을 쳐냈다.
분위기가 차가워진다. 한두호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공무를 방해하시는 겁니까?"
“이 카메라는 제겁니다. 당신이 뭔데 강탈하려는 겁니까? 경찰이면 시민의 물건을 강탈해도 됩니까?"
“강탈이 아니라 제가 대신 보관해 드리려는 겁니다.”
“그게 강탈이 아닙니까. 그리고 시민들은 알 권리가 있습니다. 시민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 인터넷에 들어가 보십시오. 좀비와 변종을 상대하는 영상은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아니면 혹시 언론을 통제하려는 겁니까? 끝까지 제 카메라를 가져가시겠다면... 전 여기서 작전을 중지하고 시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릴 것입니다. 대한민국 경찰이 국민이 알 권리를 무시하고 언론을 통제하려 든다고.”
"……."
붉으락푸르락 경찰의 표정이 다채롭게 변한다. 그는 터져 나오는 울화를 간신히 삼키고는 몸을 돌려 천막을 나섰다.
"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경찰이 우리를 통제하려 하다니... 제정신이 아니군요."
한두호의 곁에 있던 자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광주의 경찰 다 저럽니까? 도우러 온 저희를 이렇게나 무시하다뇨.”
“이 일을 공론화시켜 저 경찰을 사회적으로 매장합시다.”
“워워, 여러분 진정하십시오. 너무 흥분하셨습니다. 저도 이 일이 마음에 들지 않긴 합니다만... 해프닝으로 삼고 넘어가 야지요.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지 않습니까."
한두호를 중심으로 각성자들이 모였다. 한두호가 포섭한 각성자들 같았다. 한두호는 진심으로 각성자 연맹을 만들려는 것 같다.
다른 각성자들도 한두호에게 잘했다고 한마디씩 건넸다.
'그나저나 경찰 새끼가 좀 이상하던데.'
다른 건 몰라도 카메라 통제는 좀 선 넘었다. 이곳에 모인 각성자 중에서 순수한 마음으로 돕기 위해 온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1명도 안 될 것이다. 모두 유명세를 타기 위해 이곳에 온 게 확실했다. 근데 카메라를 금지 한다? 일개 경찰 따위가?
'경찰이 쉽게 물러간 걸 보면 카메라를 압수하려던 건 독단이었겠지.'
정부가 명령을 내렸다면 이리 쉽게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을 터.
'뭔가 이상한 느낌이 팍팍 드는데.’
불현듯 선월 대형 병원이 일우 그룹과 관계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설마 대놓고 손을 쓰겠냐마는... 나는 조용히 경계심을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