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0화 > 2180. 다크 문
오르시아는 괴로운 듯 몸을 떨다가 차가운 눈빛을 내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한 손으로 금속테 안경을 벗었다. 오르시아의 푸른 눈동자가 은회색으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마안魔眼)이다.
직후, 하늘에 10개가 넘는 공간이 열린다. 공간 내부에는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가 있었다. 나는 그게 환수들임을 깨닫고는 양손을 번쩍 들었다. 그녀는 깔끔한 인상과 다르게 아주 흉악한 것들을 아공간에 키우고 있었다.
“제가 졌습니다. 여기까지 하죠.”
"…지금까지의 기세는 어디로 가셨습니까?”
“마나 로드가 과열되었습니다. 지금 상태에서 마법 한 번이라도 사용하면 마나 로드가 손상될 겁니다. 전 여기서 그런 손해를 보고 싶지 않습니다. 제 실력과 재능은 이미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하아.”
오르시아는 한숨을 내쉬며 안경을 다시 썼다. 은회색 눈동자가 벽안으로 돌아왔다. 하늘에 나타났던 아공간들도 사라졌다.
'시력이 나빠서 안경을 쓴 게 아니라, 마안을 억제하기 위해 안경을 쓴 건가.’
7급 마법사가 자신의 마안을 완벽히 컨트롤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대체 얼마나 강력한 마안인가.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으나, 애써 참았다. 질문을 하기에는 상대방의 기분이 별로인 것 같으니까.
오르시아는 살짝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습관적으로 정리하고는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아까 보였던 분노의 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오르시아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당신은 모든 속성에 재능이 있는 듯하군요. 개인적인 견해로 봤을 때 아마 공간 마법에도 재능이 있을 겁니다. 하이텔 학파에 들어오시지 않겠습니까?”
“제 주력은 전격계 마법입니다만."
“레이썬 학파와 하이텔 학파. 두 학파 동시에 적을 올리는 방법도 있습니다. 대신, 학파 내의 중요 직위에는 오를 수 없고 비전 마법을 익히는데 제한이 있겠지만요."
무의식적으로 YES를 외칠 뻔할 정도로 좋은 제안이었다. 나는 레이썬 학파에 큰 미련이 있는 게 아니니까. 전격계 비전마법을 익히지 못한다? 학파 내의 높은 직위에도 오를 수 없다? 상관없었다.
원작 게임 지식이 있는 내겐 비전 마법을 얻을 방법이 차고 넘친다. 학파 내의 높은 직위 없는 게 더 편하다. 귀찮은 의무가 줄어든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솔깃한 제안입니다만, 레이썬 학파가 허락하겠습니까?”
“다른 사람을 몰라도 암브락 레이썬은 허락할 것입니다. 당신의 등장으로 불안함을 느끼고 있을 테니까요.”
내 등장으로 레이썬 학파의 후계자 자리가 흔들릴 수 있을 테니까. 그녀의 말대로 암브락은 허락할 것이다. 오히려 내가 제안을 받아들이기를 적극적으로 원하겠지.
“하이텔 학파가 저를 원하는 건 제 마나 친화력 때문입니까?”
“네.”
"……."
“고민되시는 모양이군요.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제가 당신을 3번 도와드리겠습니다. 물론 비전 마법을 알려달라는 등의 무리한 부탁은 안 됩니다만, 기본적인 공간 마법 학개론 정도는 가르쳐 드릴 수 있습니다.”
놀라운 보상이었다.
‘나를 생각보다 더 높이 평가하고 있군. 하긴 마법 폭격을 연속으로 63번이나 당했으니.'
거기에 16 다중 영창.
나라도 나 같은 마법사 인재가 있으면 어떻게든 끌어들이려 할 것이다.
“…너무 좋은 조건이라 거절하면 병신이 되는 제안이군요.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당분간 비밀로 해주십시오. 암브락 레이썬과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이건 잘 이용하면 암브락 레이썬에게서도 뭔가를 뜯어낼 수 있을 테니까. 시도는 해봐야지.
“과연. 암브락 레이썬은 조금만 흔들어도 될 겁니다. 그는 성정이 급한 편이니까요.”
오르시아는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는 반응이다. 원래 마법사는 작은 이득도 놓치지 않는 족속들이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응?’
방금 오르시아의 콧구멍이 벌렁거린 것 같았다. 다시 본 그녀의 안경 너머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여기서 콧구멍을 벌렁거렸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내가 잘못 봤나.'
“마도 협회의 일원이 된 걸 환영하네.”
부협회장 앤싱과 악수를 했다. 그들은 나를 인정한 것이다. 다른 학파에서 온 마법사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저마다 은근한 눈길로 자기 학파로 오라고 유혹한다. 나는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확답을 피했다.
앤싱을 비롯한 마도 협회 마법사들은 뭐가 그리 바쁜지 인사를 끝마치고 바로 떠났다. 내 손에는 마도 협회원을 뜻하는 팔망성이 새겨진 카드가 쥐어졌다. 또 하나의 신분증이라 보면 된다.
나는 이후, 암브락 레이썬을 만났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나를 보는 두 눈에는 경계심이 어렸다.
"오르이사 하이텔 님의 권유를 받았습니다. 제게 하이텔 학파에도 속할 의향이 없는지 묻더군요.”
암브락의 얼굴이 밝아졌다. 날 향한 경계심도 줄어든다.
“하이텔 학파은 네오 런던에서 제일가는 학파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전통성은 물론이고 공간 마법에서도 최선두를 달리고 있지요. 물론 레이썬 학파도 그에 뒤처지지 않는 학파입니다.”
하이텔 학파를 올려 치며 칭찬한다.
“허나 저는 전격 마법사입니다. 레이썬 학파의 비전 마법에도 관심 있습니다.”
“그 뜻은 레이썬 학파를…?”
“암브락 씨가 무엇을 우려하는지 압니다. 저로 인해 후계자 자리가 흔들리지 않을까 걱정하시는 걸 테죠. 암브락 씨. 제게 따로 전격계 비전 마법을 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그 대가로 저는 레이썬 학파의 후계자 자리를 절대로 탐내지 않겠습니다. 증거로 하이텔 학파와 레이썬 학파. 두 학파에 속하도록 하겠습니다.”
"……."
암브락은 침묵하며 고민했다.
나라는 인재를 마냥 내치는 건 힘들다. 이미 다른 마법사들이 내 재능을 확인했으니까. 특히 나는 전격계 마법사가 아닌가. 암브락의 사정이 아닌 레이썬 학파의 입장에선 놓쳐선 안 될 인재다.
하지만 나를 받아들이면 자기 위치가 위태로워진다.
나는 고민하는 그에게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모든 비전 마법을 알려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알아도 상관없는 비전 마법을 알려주십시오."
“……레이썬 학파의 후계자 자리를 탐내지 않겠다고 마나를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까?”
줘도 안 가진다.
진심을 삼키며 마나를 담아 대답했다.
“맹세하겠습니다. 따로 마법 계약서를 작성해도 상관없습니다."
암브락의 표정이 풀어졌다.
“마법 계약서는 됐습니다. 유진 씨 정도 되는 마법사가 한 입으로 두말할 리 없지요. 저는 유진 씨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습니다. 괜찮은 비전 마법도 알려드리겠습니다.”
“아, 레이선 발전소도 둘러보고 싶습니다. 전격 마법사로서 너무 궁금하군요.”
“하하. 지금 바로 둘러보러 움직이죠. 제가 직접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오 런던 최고의. 아니, 이 세계 최고의 발전소이니 보시면 놀라실 겁니다.”
그의 호언장담대로 발전소를 둘러본 나는 상당히 놀랐다. 레이썬 발전소는 돈을 쏟아붓는다고 해도 따라 할 수 있는 발전소가 아니라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날 오후, 나는 레이썬 학파와 하이텔 학파 가입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계급은 일반 학파원. 달마다 수학비를 내야 하지만, 학파의 보호와 학파 내의 일반 등급 연구 자료 등을 살펴볼 수 있었다. 당연히 전격계 마법도 배울 수 있다.
수학비는 제법 비싸긴 해도 마법사에게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마법사는 고급 인력인지라 돈을 잘 버니까. 수학비를 낼 수 없으면 학파 내에서 일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하이텔 학파에 계약서를 보낸 것을 본 암브락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레이썬 학파의 일원이 된 걸 환영합니다! 유진 씨, 당신은 전격 마법사로서 역사에 한 획을 그을 것입니다! 당신의 재능과 실력은 나, 암브락 레이썬이 보증하겠습니다!”
“에, 뭐. 감사합니다.”
나에 대한 경계심이 사라지니 텐션이 확 높아졌다.
“유진 씨는 비전 마법에 관심이 많으신 듯한데, 어떤 종류의 비전 마법을 원하십니까?”
“제가 용병으로도 활동하고 있는지라 전투에 도움이 되는 마법이면 좋겠군요.”
산업용 비전 마법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건 비전 마법 중에서도 중요도가 높으니까. 함부로 사용했다가 기업이랑 맞짱 뜨게 될 수도 있었다.
“공격용 마법이라. 아, 이게 좋겠군요. 플라즈마 배터리라는 비전 마법입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쇠구슬 같은 걸 꺼냈다.
“이 쇠구슬 자체는 평범한 쇳덩이입니다만, 마법의 발동하면 이렇게….”
쇠구슬을 손바닥에 올리자 빛을 내며 그 크기를 키워갔다. 나중에는 수박만 한 크기가 되어 푸른 빛을 내며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정확히는 공격 마법이 아니군요.”
“네. 하지만 전격 마법사에게 가장 필요한 전기를 이 배터리에 보존해 둘 수 있지요. 그리고 공격용으로도 사용 가능합니다. 상대방에게 던져 방전시키는 겁니다. 보존할 수 있는 전기는 마법사의 역량에 달렸습니다만, 유진 씨라면 상당량의 전기를 보존할 수 있을 겁니다.”
“사용하기 나름인 마법이군요. 봉인 술식을 이용한 비전 마법입니까?”
“그렇습니다. 레이썬 학파가 한창 배터리 연구에 몰두하던 시기에 발생한 부산물입니다. 새로운 배터리는… 실패했지만요. 이건 사용자와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면 굉장히 불안정해집니다.”
“사용자와 가까우면?”
“절대적으로 안전합니다. 사용자의 의지 없이 터질 일은 결코 없습니다.”
"배우겠습니다.”
[플라즈마 배터리]는 5급 마법이었다. 그는 내게 술식을 가르쳐주며 마법을 사용할 때의 이미지와 주의점 등을 알려줬다.
“다른 비전 마법은 다음에 알려드리지요. 지금은 플라즈마 배터리를 익히는 것만으로도 힘드실 겁니다. 저도 마법이 성공할 때까지 한 달은 걸렸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집으로 돌아간 나는 [플라즈마 배터리]를 완벽히 사용했다.
딱 9시간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