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6화 > 2186. 다크 문
"도와주십시오!"
한 마음, 한뜻으로 외치는 사람들을 보는 내 눈은 차가웠다.
갑자기 외지인인 내게 도와달라 청한다? 방심을 유도하는 함정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게 아니면 우리를 어딘가로 유인해서 덮친다거나.
‘그냥 죽일까.’
기껏 체인 라이트닝도 장전해 놓았는데 이대로 해제하기는 아쉽지 않나.
“이야기가 통하는군요. 저 사람들을 면밀히 살펴봤습니다. 다소 비위생적이긴 해도 범죄자인 것 같지는 않군요. 대화로 해결할 수 있다면 최선입니다. 또한 그들을 통해 강릉 군도의 정보를 얻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정보.
그래 정보가 필요하다.
강릉 군도는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원작 정보와 달라졌으니까. 이놈을 통해서 현재 강릉 군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필요가 있다.
오른손에 맺혀 있던 체인 라이트닝을 해체한다. 파지직 체인 라이트닝은 허공에 스파크를 튀기며 사라졌다.
“사람들은 저를 홍 가사라고 부릅니다. 편하게 홍 박사라 불러주십시오.”
“호칭 따윈 관심 없다. 용건만 간단히 말했으면 좋겠군.”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집이 있습니다. 간단히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니 커피라도 대접해 드리고 싶습니다.”
“너랑 커피 마시러 여기 온 거 아니다. 용건만 간단히 말해라.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고.”
-그냥 죽여 버리지 그래? 고대 유적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다며? 저 남자가 필요해?
귓가에 인비저블 블레이드의 목소리가 꽂힌다. 마나에 목소리를 실어 보내는… 일종의 전음이다.
인비저블 블레이드의 말에는 동감했다. 하지만 오르시아가 대화를 하기로 했고, 나는 그녀를 존중한다. 오르시아와는 좋은 관계를 쌓고 싶으니까.
“현재 강릉 군도에는 3개의 큰 세력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힘을 합쳐서 살아왔지만… 최근에는 서로 못잡아 먹어 안달입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고 놈들은 저희를 노리고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저를 노리고 있습니다.”
“왜 홍 박사님을 노리는 거죠?”
오르시아가 차분히 물었다.
“그레이트 코리아의 고대 유적. 놈들도 그 소문을 접했기 때문입니다. 고대 유적을 조사했던 저를 붙잡아서 이용하려는 겁니다. 최근 놈들의 무장 수준이 급격히 좋아진 것을 봐선… 조직력을 갖춘 세력 여러 곳이 끼어든 것 같습니다.”
그놈들이 고대 유적을 노린다?
갑자기 경쟁자가 늘어났다. 이 상황은 썩 달갑지 않았다. 그렇다고 놈들이 고대 유적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찾을 수 있었다면 벌써 찾아 겠지.
'고대 유적에 들어가려면 퍼즐을 풀어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지. 놈들이 바위섬에 퍼즐이 있다고 생각이나 할까.’
“그놈들에게 협력하는 조건으로 안전을 보장받으면 되지 않나?”
“그놈들은 해적입니다. 그 이전에 흉악 범죄자입니다. 그놈들이 약속을 지킬 것 같습니까? 장담할 수 있습니다. 놈들은 약속 따윈 무시할 겁니다.”
"부탁이란 건?"
“놈들을 죽이고 탈출할 배를 구해주십시오. 저희는 이곳에서 떠나고 싶습니다.”
“대가는?”
“예?”
“뭘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냐. 일을 맡기려면 당연히 대가도 있어야지. 설마 무급으로 우리를 부려 먹으려고 했었나?"
“그, 그게.”
정말로 공짜로 우리를 부려 먹을 생각이었던 것 같다. 동정심을 자극할 계획이었나? 미친놈이었군.
오르시아도 차가운 눈길로 홍 박사를 노려봤다. 그녀도 마법사였다. 마법사가 누군가에게 공짜로 부려 먹힌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강릉 군도의 저, 정보가 필요하시지 않습니까! 제가 알고 있는 정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정보는 방금 네 입으로 들었다. 별로 중요한 정보도 아니었지."
경쟁자가 있다는 걸 알아낸 게 전부다. 경쟁자가 정확히 누구인지도 알 수 없다. 그 외의 잡다한 정보? 크게 도움이 안 된다.
당황했던 홍 박사는 빠르게 냉정함을 되찾았다.
“놈들이 원하는 그레이트 코리아 고대 유적에 관한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저는 박사 학위를 가진 역사학자입니다. 특히 고대 국가인 그레이트 코리아를 20년 이상 연구했습니다. 그레이트 코리아의 정보는 이상할 정도로 소실된 상태입니다. 이 세상에서 저보다 그레이트 코리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학자는 손에 꼽을 겁니다.”
글쎄. 내가 더 많이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오르시아와 두 눈을 마주했다. 어렸을 때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은 진짜배기 마법사의 두 눈은 홍 박사에게 일말의 흥미도 보이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대가는 아니군. 너희 일은 너희가 알아서 하도록. 경고하건대 우리 일을 방해하지 마라.”
“좀 더 유의미한 정보가 있을 줄 알았습니다만…. 무의미했군요.”
나와 오르시아가 몸을 돌렸다.
“마법사님! 마법사님!!!”
홍 박사가 날 불렀다. 나는 혀를 차며 그를 노려보았다. 흠칫 놀란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진 않았습니다만, 여러모로 수상한 남자였습니다.”
“찝찝하신 모양이군요. 돌아가서 죽일까요?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아뇨, 신경 끄도록하죠. 고작 그런 일에 마나와 정신력을 낭비해선 안 됩니다.”
맞는 말이었다.
나는 앞장서서 바위섬 꼭대기로 올라갔다. 꼭대기의 바닥에는 구멍이 파여있었다. 총 9개의 구멍. 보통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만… 이 자체가 퍼즐이다. 퍼즐의 힌트는 다른 섬의 해변가에 숨겨져 있다. 물론 나는 원작 지식을 통해 답을 알고있다.
[워터]
마법으로 만들어진 물이 바닥에 떨어져 구덩이 일부를 채운다. 딱 세 개. 가장 왼쪽에 있는 첫 번째 구멍에서 세 번째와 일곱 번째 구멍. 3개의 구멍에 가득 채우자, 구멍 속의 물이 은은하게 빛났다.
“이건… 신령술이군요."
고대에 사용했었던 힘 중 하나. 현 시대에선 신령술을 배우는 사람은 없다. 애초에 인간이 익힐 수 있는 힘이 아니라는 게 학계의 정설.
오래된 던전이나, 고대 유적지 등에서 볼 수 있다.
원작 게임에서는 룬 문자와 더불어 퍼즐의 원인이라는 설정이 있다.
“첫 번째 조건은 채워졌군요. 다음 섬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간단한 게 조건이었을 줄이야. 아니지. 알고 있기에 간단한 거겠죠. 당신은 이 비밀을 어떻게 알았죠?”
"책에 다나와 있었습니다."
"……."
의심 가득한 눈으로 날 바라본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나는 이 악물고 모른 척했다.
“그래서 다음 섬이 어딘데?"
인비저블 블레이드가 모습을 드러내며 물었다. 나는 오른편에 있는 섬을 가리켰다. 지금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군도를 돌것이다.
‘이곳에 있는 퍼즐의 개수는 총 42개. 이중의 절반 이상은 고대 유적과 관련 없는 퍼즐이고, 나머지는 퍼즐을 위한 퍼즐이고, 엄청나게 좋은 보물은 없지만 챙길 건 챙겨야지.'
오르시아가 매스 텔레포트를 사용해 다음 섬으로 이동했다. 홍천섬에 비하면 그 절반의 절반도 되지 않는 섬. 150평도 되지 않는 섬이라고 할까. 그곳에는 해적 7명이 도박을 하며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우리가 갑자기 나타나자, 해적들이 당황한다.
‘꼴을 보아하니 홍천섬을 감시하고 있었군.'
[일렉트릭 필드]
내 발치에서 시작된 전류가 바닥을 타고 흐르며 적들을 감전시켰다. 무작정 쓴 광역기는 동료에게도 영향이 가지만…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이 정도에 당할 것 같으면 아예 부르지도 않았다.
감전당한 놈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놈 중 하나가 고개를 슬쩍 들더니 내게 비수를 내던졌다. 내 일렉트릭 필드에 감전당하고서 몸을 움직이는 걸 보니 한가락 하는 놈이다.
인비저블 블레이드가 움직였다. 내게 날아오는 비수를 튕겨내고 놈을 참수한다.
“마무리는 제대로 해야지.”
“놈이 감전되지 않은 건 알고 있었다.”
비수? 피하지 않아도 배리어에 막혀 사라졌을 것이다. 설사 평범한 비수가 아니더라도 공들여 준비한 배리어가 3중첩이다. 당할 리 없다.
“아, 그러세요?”
인비저블 블레이드는 비아냥대며 주위에 널브러진 놈들을 푹푹 찔러대며 확인 사살을 실행했다.
‘좀 건방지군. 오늘 밤에 다시 교육 좀 해줘야겠어.'
저 봐라. 일부러 엉덩이를 흔드는 꼬락서니를 보니 일부러 날 도발하는 게 틀림없었다.
“이 섬에는 어떤 비밀이 있는 거죠?"
“정확히는 섬이 아니라 섬 근처 바닷속에 있습니다.”
“설마 헤엄쳐서 안으로 들어가실 건 아니시죠?"
“설마 그러겠습니까.”
[윈드]
바람으로 우리 셋의 몸을 감싸며 공간을 만든다. 빈틈없이 흐르는 발마이 곧 벽이 되는 것이다. 오르시아에게 배웠던 기초 중의 기초.
내부의 들어있는 공기가 있으니 바닷속에서도 몇 시간은 너끈히 버티겠지.
바닷속으로 들어간다. 바닷물은 원형으로 계속해서 흐르는 바람의 벽을 뚫지 못했다. 간단히 빛을 일으키는 마법까지 사용하니 바다 내부가 훤히 보였다.
“훌륭합니다. 역시 당신의 재능은 진짜군요.”
“간단한 일입니다. 바람 자체는 1급 마법이니까요.”
“응용은 고위 마법사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 공간을 움직이는 건… 중력이군요.”“예. 바람도 중력의 영향을 받으니까요."
“혹시 뻥 뚫려 있는 저기로 가는 거야?"
인비저블 블레이드가 지하로 향하는 어두운 구멍을 가리켰다. 나는 표정을 굳혔다. 원래는 해초와 바위로 숨겨져 있어야했다. 그런데 드러나 있다? 심지어 폭발의 흔적까지 보인다. 퍼즐을 풀지 않고 강제로 열었다는 뜻이다.
‘…게임이 아닌 현실이니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지. 그보다는 대체 누가, 언제 이곳에 온 거지?’
나는 경계하며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는 결계로 인해 공기가 있어야 할 그곳은 바닷물에 잠겨 있었다.
'있어야 할 하얀 미역이 없군.'
희귀한 영약의 재료이자, 비싼 마법 재료로 손꼽히는 하얀 미역. 그게 내부에 가득 차 있어야 했는데, 있는 거라곤 작은 물고기 정도가 전부다.
“벽에 누군가가 새긴 듯한 흔적이 있군요. 트레저 헌터 중 일부는 자기가 탐험한 곳에 흔적을 남긴다고 들었습니다. 아마도 그런 트레저 헌터인 것 같군요.”
네잎 클로버.
네잎 클로버가 행운을 뜻하니까 뒤늦게 찾아온 이에게 행운을 빈다는 뜻인가? 원래 있던 물건들은 전부 가져가 놓고? 이건 놀리는 거였다.
‘네잎 클로버를 마크로 쓰는 트레저 헌터가 누구 있지?'
떠오르는 인물이 없다.
내가 모르는 놈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