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5화 > 2195. 다크 문
나는 전생의 기억 대부분이 원작 게임 '다크 문'에 치중되어 있다. 최근에는 그 외의 기억들도 가끔씩 떠오르지만… 자잘한 것뿐이다.
'제사라. 너무 오랜만인데. 어떻게 하더라?'
원작 게임 속에서도 제사 이벤트가 있었다. 허나 간추려진 상태로 진행된다. 버튼 하나만 딸칵 누르면 알아서 제사가 진행되고 끝난다. 심지어 스킵도 가능했다. 진행되는 제사도 최대한 간추린 내용이었다.
'게임 속의 제사를 미쳤다고 30초 이상 공들여서 하나? 그럼 게임 망하지.'
다크 문의 게임 제작사는 그런 쪽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도 대충 간추려서 하기로 했다.
술잔에 청주를 따른 뒤, 청주를 사이버 홀로그램 향로 위에 3바퀴 돌리고 제사상에 올렸다.
사이버 고대 조상 신장구가 흡족한 얼굴로 고대를 끄덕인다.
'맞나? 맞나보군.'
다음으로 절을 올린다.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이다 못해 무릅까지 꿇는 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행위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얻을 물건이 있기에 참아야 했다.
“음. 절을 잘하는 구나. 역시 한국인의 피는 못 속이는구나.”
잘하는 건가? 그냥 내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그런데 왜 뒤에 있는 처자들은 절하지 않는가? 혹시 기독교인가? 설마 우리 한국의 풍습을 미개하다고 여기는 건 아니겠지?"
신장구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차가워진다. 여기까지 와서 신장구와 적대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 건 좋지 않았다.
“외국인이라 아직 한국인의 제사에 대해 잘 모릅니다.”
태블릿에서 스캔의 빛이 나와 오르시아와 인비저블 블레이드를 훑었다. 사이버 조상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군. 일녀와 영녀인가. 제사를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지. 제사야 앞으로 차차 알아가면 될 일이 아닌가. 처자들과는 무슨 관계인가?”
아무 관계 아니다. 라고 말하는 건 누가 봐도 오답이었다. 그녀들이 쫓겨나거나 적대 받을 수 있다. 그레이트 코리아는 외부인을 썩 환영하지 않으니까.
“결혼을 약속한 여자들입니다. 예비 아내들이라 할 수 있겠군요.”
그러니 예비 가족이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
다행히 그녀들은 내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예쁜 처자들을 용케 아내로 삼았군. 과연 한남이다. 나 때만 해도 국제결혼이 유행이었지. 한녀들은 출산을 안 하려고 해서…."
말을 이어가려던 신장구는 분위기가 싸해지는 걸 알아차렸는지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달리 말했다.
“어찌 됐든 미래에 아내가 될 처자들이 아닌가. 어디 한번 절해 보거라.”
"흐음. 도게자 하라고?"
“도게자가 아니라 절이다!”
“뭐, 어려운 일은 아니네.”
인비저블 블레이드가 절을 올렸다. 한국식 절은 아니라 정석에 가까운 도게자였다. 닌자답게 도게자에도 절도가 있다고 해야 하나.
‘가슴이 너무 흔들려서 시선이 그쪽으로 가버리는군.’
신장구. 이 늙은이의 시선도 가슴 쪽으로 향한다.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상을 엎어버릴까 고민했다.
“…이게 의식의 절차라면 어쩔 수 없죠.”
눈치가 있는 오르시아도 협조해 줬다. 인비저블 블레이드를 따라 도게자한 것이다.
“도게자 말고 절을 하라니까!”
신장구가 역정을 냈으나, 그뿐. 이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에잉. 외국인이니 그냥 넘어가 주마. 다음부터는 제대로 절 하도록. 아, 후손이여. 여자들은 잘 골랐구나. 방금 살펴본 결과 일녀는 현모양처의 가능성이 확인됐고, 영녀는 신비를 계승했다는 걸 확인했노라. 한국은 언제나 인재를 환영한다.”
“마음에 드셨다면 다행입니다.”
“그래. 이제 말해 보거라. 세빛둥둥섬까지 찾아온 이유는 무엇이냐?”
“그레이트 코리아의 근원이자, 그 찬란한 역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LK-99의 권리를 양도받고 싶습니다.”
“LK-99…. 이 세빛둥둥섬의 모든 것이지. 그것은 전쟁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알고 있느냐? 우리는 LK-99가 개발되고도 몇십 년을 숨겼다. 허나 영월난 비밀은 없다고…. 중국과 일본이 알게 되었고 LK-99를 탐내면서 전쟁이 시작되었지."
“전쟁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미래인이 네가 모른다면… 나도 모른다. 세빛둥둥섬은 가장 먼저 공격받은 곳이니. 나는 기꺼이 한국을 위해 이 세빛둥둥섬을 봉인했다. 내 정신을 복제한 이 인공지능과 함께 말이다. LK-99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
당연히 나 혼자서는 못한다. 허나 바도 협회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또한 지금 시대는 그 옛날과 다르다. 마도 공학이 보편적인 이 세계에서 LK-99의 가치는 퇴색할 수밖에 없다. 초전도체? 마법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면 만들 수는 있다. 다만 LK-99의 가성비를 따라 올 수 없을 뿐이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좋다. 한국의 기술은 한국인의 손에 들어가야 마땅한 법. 네게 LK-99의 권리를 양도하겠다.”
제사상 홀로그램이 꺼지듯 사라진다. 이어 제사상이 갈라지더니 하나의 기계가 위로 올라온다. 익숙한 모양새였다.
"…정수기?"
"어허. 정수기라니. 우리 한국의 위대한 물건, LK-디스펜서다.”
"그건 또 뭡니까?”
당황해서 물어봤다. 원작에서는 초전도체의 권리를 준다면서 초전도체의 정수라는 특수 재료만 넘겨주고 끝이었다. 나는 이걸 받아 따로 연구할 생각이었다. 연금술에는 나름 자신이 있으니까.
“LK-99는 구리와 납, 그리고 LK라는 특수 물질로 만들어진다. 사실 LK 특수 물질이 진짜라고 할 수 있지. 이 LK-디스펜서는 24시간마다 5L의 LK 특수 물질을 만들 수 있다.”
“……LK는 무슨 줄임말입니까?"
“레전드 코리아의 줄임말이다.”
"……."
장난치는 건 아닌 것 같다. 나는 정수기를 잡았다. 정수기에서 소리가 들린다.
“삐빅. 한남 유진. LK-99의 관리자로 인증되었습니다.”
“이 특수 물질로 어느 정도의 초전도체를 만들 수 있습니까?”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냐에 따라 다르겠다. 단순히 초전도체를 양산할 목적이고, 양산의 설비가 최적화되어 있다면 1리터에 10톤 이상의 초전도체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LK 특수 물질에 또 다른 활용처가 있습니까?”
“그건…. 모르겠구나. 이상하게 그 정보만 지워져 있구나. LK 특수 물질의 다른 활용처는 직접 찾아보거라.”
나라고 해서 원작 게임의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다. 게임의 세계관도 방대했지만, 내 기억상으로 끝이 나지 않았다. 패치와 업데이트가 계속 진행되는 오픈 월드형 게임이었다. 내가 모르는 설정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일단 챙길 건 챙겼다. 오르시아에게 부탁해 LK-디스펜서를 아공간에 부탁한다. 그 후 신장구에게 LK-99의 레시피를 자세히 물어봤다. LK-99의 레시피는 생각 이상으로 간단했다. 납과 구리, LK 특수 물질을 넣고 적당히 구워내면 짜잔하고 상온상압초전도체가 완성된다.
‘이것으로 목적했던 LK-99는 얻었군. 어떻게 양산하고 유통할지는 네오 런던으로 돌아가서 고민해 봐야겠어.'
콰아앙!
얻을 거 얻고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있으니, 돌연 땅이 흔들렸다.
“이런 썩을. 침입자들이 너무 거칠구나. 아무래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다. 마음 같아선 이 세빛둥둥섬의 관리자 권한도 네게 주고 싶으나… 불가능할 것 같구나. 세빛둥둥섬의 권한 대부분이 사라져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다고 남에게 넘겨줄수도 없으니….”
“자폭합니까?”
“잘 아는구나. 1시간 뒤에 세빛둥둥섬은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그 전에 벗어나거라. 나는… 이제 사라질 시간이군. 만나서 반가웠다."
펑.
태블릿이 터졌다.
휴식을 취하고 있던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세빛둥둥섬의 자폭은 정해져 있는 수순이었지만… 벌써 자폭한다고? 이거 생각보다 상황이 더 안 좋군. 기업들의 역량이 내 생각보다 더 커.'
나는 오르시아를 바라봤다.
“오르시아 씨. 매스 텔레포트로 빠져나갈 수 있겠습니까?”
“…장거리 공간 이동은 불가능합니다. 유적의 힘이 방해하는군요. 적어도 바깥쪽으로 나가야 합니다.”
“역시 그렇습니까. 이곳에 계속 있는 건 도움이 안 될 테니, 밖으로 나가도록 하죠.”
콰아아아앙!
천장에서 충격파가 터졌다. 군인으로서의 경험이 말하고 있다. 벙커 버스터 종류의 미사일이 천장에 내려꽂혔다고.
그래도 천장은 버텼다. 세빛둥둥섬은 그레이트 코리아의 고대 유적이다. 벙커 버스터 한 발에 무너질 리가 없다. 하지만 한 방이 아니라면?
콰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앙!
연달아 충격파가 터진다.
‘…벙커 버스터를 연달아 사용한다? …기업만이 아니라 국가가 개입했을 가능성도 있겠군.’
그것보다 이리 급하게 나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우리가 초전도체를 손에 넣은 걸 알고 있다는 듯이. 뭔가 알아차렸나?”
콰아아아아아아앙!
천장이 무너지고 태양 빛이 내부를 비추었다. 우리는 전투에 대비해 몸을 긴장시켰다. 천장에서 무장한 자들이 천천히 내려온다.
“마법사 발견. 생포를 최우선으로, 교전에 돌아온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아만과 홍배적 박사는 함정에 걸려 일행과 떨어졌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지하 깊숙한 곳으로 떨어졌다는 사실은 썩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지금 기업끼리 서로 쏴죽이고 있는데 도망치기는커녕 짐 덩이를 챙겨야 하는 처지라니….”
아만은 상황이 몹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홍 박사를 버리고 도망치고 싶은데, 그랬다간 기업과 완전히 척질 수 있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홍 박사가 아예 쓸모없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저 표지를 보십시오! 초능생물연구소가 있습니다! 초능생물이라니! 이능을 가진 몬스터를 연구하는 곳이 확실합니다! 가서 확인해 볼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 연구 자료를 챙기면 한몫 단단히 잡을 수 있겠지? 나쁘지 않군."
아만은 연구 자료를 기업에 넘기고 간부직을 다는 자신을 생각했다. 평생 해적질만 하고 살고 싶지 않았다. 위기와 기회를 함께 온다고 했던가. 팔자를 고칠 기회가 이렇게 선뜻 다가올 줄이야.
“홍 박사, 그 연구실인가 어딘가로 안내해.”
"이쪽입니다!"
홍 박사가 흥분하며 달려갔다. 그레이트 코리아의 고대 유적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