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8화 > 2198. 다크 문
“30초다! 아직이냐?!"
“조금 더 버텨라. 조정이 필요하다. 내가 봤을 땐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군."
“제기랄. 주변에 번개 원소가 가득해서 숨만 내쉬어도 폐부가 찌릿하군. 넌 사실 7급 마법사인데 힘을 숨기고 있었나?”
흑마법사의 말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미래를 걱정하는 건지 몰라도 노골적인 아부로 들렸다. 그렇다고 살려둘 생각은 없 었다. 내 앞길을 막은 놈이다. 기회가 되면 죽인다.
“10초를 더 버텼다! 아직이냐?!"
지옥의 손길에 어루만져지고 있는 벨리악은 조금씩 저주를 떨쳐내고 있긴 하나 여전히 끙끙거리고 있었다.
“더 버텨라.”
“이젠 무리다! 놈을 더 억압하려면 신체를 더 바쳐야 한다! 나는 이미 왼손을 바쳤다!"
“누가 그딴 마법을 익히라고 협박했나? 다 네 선택에 의한 거다. 그리고 손이야 나중에 의수를 달면 되지. 다른 신체? 죽 는 것보다는 나을 텐데."
“닥치고 지금 공격해라! 놈이 움직이지 못할 때 공격해야 한다.”
“이 정도 힘으로 놈을 죽일 수 있으리란 확신이 안 드는군. 놈을 죽이지 못한다면 네 탓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죽겠지.”
“......지옥이여, 왼발을 바치겠다!”
흑마법사는 이후에 왼쪽 발을 바쳤다. 총 1분 30초를 버틴 것이다.
충분했다.
그리고 나도 한계이기도 했다. 나는 천장의 마법진을 보며 저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뭉쳐서 회전하는 뇌전은 그 자체 만으로 어마어마한 광량을 쏟아내고 있었다. 마나로 눈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시력을 잃었을 것이다.
준비는 끝났다. 한차례 숨을 들이쉬고 영창한다.
"썬더 브레이크.”
마법진의 중심으로 뇌전이 회전하며 모여든 에너지가 지상으로 떨어지며 모든 것을 파괴한다.
거대한 벼락은 벨리악에게 정확히 떨어졌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썬더 브레이크는 세빛둥둥섬의 바닥을 꿰뚫으며 벨 리악과 함께 바다로 떨어졌다.
한순간 바다가 출렁였다. 열량을 감당하지 못하고 대규모의 바닷물이 증발하여 수증기가 피어났으며, 저 아래에는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벼락은 사라지고 크레이터에는 새로운 바닷물이 챙긴다.
"끝난 건가."
흑마법사가 한숨을 내쉬며 바다를 내려다봤다. 그와 달리 나는 딱딱히 굳은 얼굴을 풀지 못했다.
“...큰일 났군. 놈이 버텼다.”
놈이 바닷물에 잠기기 전에 그 모습을 확인했다. 반신이 녹아내리고 순간적으로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왔다.
'분명 홍 박사의 얼굴이었다.'
벨리악이 누구의 몸에 빙의했는지 알았다. 허나 중요한 건 아니었다.
'이 공격으로도 죽이지 못했다. 마나 로드가 불타는 건 둘째 치고... 마나가 없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어.'
마무리를 지을 방법이 없었다.
“괴물 같은 놈.... 그래도 부상을 입었다면 가능성은 있겠군. 내가 말했을 테지. 기업의 병력들이 오고 있다고. 수천의 무 장 병력이다. 결국 놈은 끝장날 거다.”
“...놈이 올 거다. 놈은 세빛둥둥섬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몸이니까. 죽기 싫으면 아까 그 흑마법을 다시 사용해라.”
"지옥 손길은 마구잡이로 쓸 수 있는 마법이 아니다!”
벨리악은 생물을 먹고 강해지고 회복한다. 그리고 흔히들 바다는 생물의 보고라고도 부르지 않던가.
'그래도 앞으로 5분은 처박혀 있겠지. 인비저블 블레이드를 데리고 도망칠까?'
쾅!
바다에서 물보라가 치솟더니 벨리악이 솟구쳐 올라왔다. 벨리악이 아닌 나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흑마법사는 벨리악의 손을 피하지 못했다. 목덜미를 붙잡히더니 그대로 벨리악의 입에 산채로 머리 일부를 먹힌다.
“끄아아아아악!"
벨리악은 다음은 나라는 듯이 날 똑바로 바라보며 흑마법사를 먹었다. 흑마법사를 먹을수록 벼락에 의해 녹아내렸던 놈의 몸이 회복하기 시작했다.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마나를 쥐어 짜낸다 해도 썬더 볼트 하나 날릴 수 없는 상황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인비저블 블레이드를 데리고 도망치는 것.
'No.6 환몽의 앱솔루트 폴리모프 도망에 적합한 생물로 변한 뒤 No.9 월드 도어를 통해 도망치는 게 최선인가.'
월드 도어를 사용하기 위해선 문이 필요했다. 벨리악과 죽음의 술래잡기를 해야 한다.
그때였다.
위에서 늑대를 닮은 존재들이 떨어져 벨리악을 공격했다. 하나, 하나가 강력한 힘을 가진 환수.
내 옆에 공간이 일렁이더니 오르시아가 나타났다. 안경을 이미 벗은 뒤였다. 항상 깔끔함을 유지하던 그녀의 옷에는 붉은 피가 튀어있었다. 그녀의 피는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확실히 정리하느라 좀 늦은 것 같군요.”
“오르시아 씨...!”
“유진 씨의 썬더 브레이크는 떨어진 곳에서도 보았습니다. 그걸 맞고도 멀쩡하다니.... 최소 8급 이상의 악마가 확실하군요. 시간 끌건 없겠지요. 죽이겠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이미 끌렸다. 벨리악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환수를 잡아먹으며 힘을 회복하고 있었다.
“오르시아 씨! 여기서 최선은 도망치는 겁니다! 멀리 도망칠 것도 없습니다! 세빛둥둥섬에서 일정 거리를 벗어나기만 하면 됩니다!"
인공 악마 벨리악은 세빛둥둥섬과 최초의 계약을 맺었기에 벗어나지 못한다. 세빛둥둥섬이 자폭하면 놈도 죽을 수밖에 없다.
“...죄송하지만, 그건 불가능합니다. 저 악마를 중심으로 공간 파장이 뿜어져 나오고 있습니다. 단거리라면 모를까. 섬세한 제어가 필요한 장거리 공간 이동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억지로 사용하려 했다간 도리어 우리의 몸이 비틀리거나, 산산조각 날 가능성이 큽니다.”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근처에 문이 있는 방으로 이동하기만 하면 됩니다!"
“놈은 저희가 도망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는 것 같군요."
촤아아악.
피가 튀었다. 벨리악이 늑대 환수의 시체를 신경질적으로 휘둘러 이쪽에 피를 뿌린 것이다.
5급 이상이 되는 늑대 환수 수십 마리가 1분도 버티지 못하고 도륙당했다.
오르시아는 마안을 차갑게 빛내며 술식을 펼쳤다.
“하이텔 학파의 일부에게만 전승된 비전 마법을 보여드리죠. 무성공축(無聲空蓄).”
소리가 사라지고 세상이 회색빛으로 변했다.
순간적으로 시간이 멈춘 줄 알았다. 허나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다만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내가 작아지는 건가? 아니, 공간이 늘어나고 있다. 작아졌다고 느끼는 건 압도당했기 때문이다.’
공간이 소리 없이 늘어나고 있다. 소리가 없는 이유를 알겠다. 소리가 내 귀에 닿는 것보다 더 빨리 공간이 늘어나고 있으니까.
벨리악은 움직이지 못하고 점차 그 몸이 아래로 무너지려고 한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짓눌리는 듯한 느낌.
'...공간에 짓눌리고 있는 거다.’
솔직히 말해서 늘어난 공간은 어느 정도 거리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만큼 압도적으로 늘어난 공간. 오르시아는 공간 압력을 조절해 벨리악에게 쏟아내고 있었다. 평범한 생물이었다면 벌레처럼 짓눌러 터졌을 것이다.
'악마는 악마라고 해야 하나. 이걸 버티다니.'
하지만 공간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아무리 악마라도 이걸 끝까지 버틸 수 있을까.
"……."
오르시아의 입에서 선혈이 흘러나온다.
"오르시아 씨?!"
“무성공축의…. 아니, 제 한계가 찾아왔군요. 지금의 저로선 여기가 한계입니다. 그러니 마무리 짓도록 하죠. 공폭열멸(空爆裂滅).”
오르시아가 마법에 의해 늘어나던 공간을 강제로 폭발시켰다. 수천 개의 폭탄을 단숨에 폭발시킨 듯한 광경이 펼쳐졌다. 허나 그 여파가 우리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소리 없이 터진 공간의 폭발은 오직 벨리악에게만 향했으니까.
“...하."
오르시아가 질린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한다.
벨리악은 폭발하고 찢겨나가는 공간 속에서도 죽지 않았으니까. 상처를 입었으나, 그뿐이다. 놈이 천천히 다가온다.
"한남! 한남이 될 거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늑대 환수의 시체를 씹어 먹는다. 그럴수록 놈의 몸은 회복되고 있었다.
이 세계의 사람들이 악마나 천사를 왜 그렇게 두려워하는지 직접 경험하니 알겠다. 저런 놈을 상대할 수 있는 건 비슷한 존재들뿐이겠지. 아니면 비슷한 경지에 오른 초인이거나.
“오르시아 씨. 제가 맡겨둔 물건이 있지 않습니까.”
“......이 상황에 쓸만한 물건이 있습니까?"
“딱히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천사의 손. 그걸 주십시오. 잘 된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만... 이대로 놈에게 죽어줄 순 없으니 시도는 해봐야죠.”
오르시아가 아공간을 열어 천사의 손을 꺼내 내게 주었다. 나는 천사의 손을 감싸고 있는 붕대를 풀었다. 하얀색 손이 드러났다.
염력으로 천사의 손을 뭉갰다. 천사의 시체 일부라 그런지 저항성은 없었다. 뭉개진 천사의 손에서 나온 핏물이 내 코트에 떨어진다.
내가 입고 있는 고급스러운 흑청색 케이프 코트는 멀린의 넘버즈인 환몽이다.
앱솔루트 폴리모프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 여기서 대상의 유전 정보가 있다면, 드래곤 같은 존재로도 변할 수 있다. 단순 히 변하기만 하는게 아니라 그 종족의 특성까지 완벽히 재현하면서.
[앱솔루트 폴리모프]
10급 마법이 내 몸을 감싼다.
마법이 요구하는 것은 천사의 이미지였다.
'천사는 유전 정보에 따라 형체가 정해지는 생물이 아닌 건가.'
나는 마법이 요구하는 천사를 이미지한다.
'천사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하면 역시 날개와 헤일로겠지.'
덩치가 커지고 코트의 후드가 얼굴을 가린다. 후드 속의 얼굴은... 사라졌다. 아니, 얼굴만이 아니다. 육체 자체가 사라진다.
'내 이미지를 요구하는 이유를 알겠군. 천사는 처음부터 육체에서 벗어난 생물이다. 정령과 같은 일종의 정신적 존재라 봐도 무방하겠지. 그레이트 코리아는 어떻게 존재하지 않는 천사의 손을 얻은 거지? 천사에게 인위적인 육체를 부여했다?'
하여간 터무니없는 고대 국가다. 그러니 인공 악마를 만드는 데 성공한 거겠지만.
등 뒤로 천사의 본체라 할 수 있는 날개가 뻗어 나온다. 그냥 날개가 아니라 푸른색 빛으로 이루어진 날개. 벼락 줄기를 닮은 듯한 빛의 날개였다.
머리를 가린 후드 위로는 빛이 모여드니 백색의 헤일로가 형성된다. 헤일로는 끊임없이 회전하며 은은한 빛을 흘렸다.
천사가 된 나는 기분이 고양되는 걸 느꼈다.
“나는… 천사 유지니우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