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7화 > 2207. 다크 문
유리아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이던 메이드들이 유리아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텃세도 있었지만 상황이 문제였다. 안 그래도 내일 저녁에 열릴 연회로 인해 바빠 죽겠는데 외부인이 들어와서 주방 한 편을 차지한다? 옆에 린다 관리실장만 없었어도 거 친 말이 나올 수 있었다.
주방장은 린다의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린다 관리실장님. 실습생에게 디저트 하나를 맡긴다고요? 메이드 아카데미의 재학 중이라고 해도 아직 졸업한 것도 아니잖아요. 전문가가 아닌 학생에게 일을 맡길 건가요? 공주 전하의 연회를 망칠 수도 있어요.”
“디저트 하나에요. 그리고 연회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죠. 그 탕후루라는 디저트가 수준 미달이라면 연회에 내보이지 않으면 돼요. 주방장. 협조 부탁드릴게요. 재료도 작은 과일과 설탕, 물엿, 꼬치뿐이니 무리한 부탁은 아니잖아요.”
“......하아. 딱 30분만 허락하겠어요. 린다 실장도 아시다시피 주방장은 제 영역이에요. 아무리 실장이라도 침범할 수 없어요.”
"그럼요. 당연히 알죠. 고마워요."
린다가 환하게 웃었다. 날 선 분위기가 단숨에 풀어진다. 유리아는 그녀가 주방장을 비롯한 메이드로부터 선망을 받는 걸 느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라고 할까. 본인도 그걸 잘 알기에 이용하는 듯한 느낌이다.
“자, 유리아 씨, 재료는 준비됐어요. 어떻게 하면 되나요?"
“별거 없어요. 이곳에 있는 요리사분들이시라면 한 번 보고 따라 하실 수 있을 테죠.”
잘 씻은 작은 방울토마토 하나를 꼬치에 꿰어 준비한다.
냄비에 설탕, 물, 물엿을 넣고 시럽을 만들어 준다. 시럽이 완성되면 꼬치에 꿴 과일을 시럽으로 코팅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코팅을 얇게 하는 편이 중요하다. 코팅막이 두꺼우면 너무 끈적거리고 설탕 맛이 너무 나서 불쾌해질 수 있다. 이후에는 얼음물에 넣어서 코팅을 굳혀주고 빼낸다.
완성된 탕후루는 흠 하나 없이 매끈매끈했다. 광택이 돌아서 보석처럼도 보였다.
“탕후루라.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지만, 간단한 디저트군요.”
“과일과 설탕. 맛은 뻔하게 예상되는데....”
“이렇게 간단한 디저트를 내놓으면 손님들이 실망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외형은 보석 같아서 괜찮네요."
요리사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너무 특별할 것 없으니까.
“일단 시식을 해보죠."
린다는 방울토마토 탕후루를 입에 가져갔다. 별 기대 없이 어그님로 토마토를 씹었다.
와그작!
"......!"
얇은 설탕 코팅이 바삭하게 부서지고 과즙이 펑 하고 터져 나온다. 과즙은 상상 이상으로 달았다. 설탕 코팅이 녹으면서 과즙과 섞이며 단맛을 극대화한 것이다. 재밌는 식감과 입안에 퍼지는 과즙의 달콤함.
“장말 맛있네요. 단맛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워너비 디저트가 되겠어요.”
물론 린다도 단맛을 좋아했다. 그녀는 옆에 있는 딸기 탕후루로 맛봤다. 방울토마토보다 딸기가 더 맛있었다.
린다의 반응에 다른 메이드들도 눈을 빛내며 탕후루를 하나씩 맛봤다.
“달아. 맛있어. 설탕이 이빨에 끈적하게 달라붙을 줄 알았는데... 얇아서 그런지 과즙에 섞이는 느낌이야.”
“뭔가 불량식품을 먹는 느낌인데... 과일마다 맛이 달라서 다 먹고 싶어.”
“아, 아아.... 내가 원하던 간식이 여기 있었네?”
“요리 과정도 간단하고 겉보기에도 예쁘고... 디저트 중의 하나로 연회장에 나가도 괜찮을 것 같은걸?"
"간단해도 네오 런던에서 맛보지 못한 간식이야. 나쁘지 않네. 유리아 씨라고 했나요? 이 요리에 대해 좀 더 알려주실 수 있나요?"
메이드들의 어조가 부드러워졌다. 단맛의 효과였다. 여자 중에서 단맛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백환]에서도 탕후루는 젊은 여성을 중심으로 유행하는 디저트였다.
“탕후루는 고대 국가였던 트루 차이나의 요리입니다. 네오 런던에 알려지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지요.”
주방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트루 차이나? 그레이트 코리아와 언빌리버블 재팬과 함께 언급되는 고대 국가군요. 좋아요. 이번에 LK-99로 런던 시민들의 관심이 고대 국가로 향하고 있죠. 그런 고대 국가의 음식이라면... 손님들이 흥미를 가지겠군요. 연회장에 탕후루를 올리겠습니다. 요리 방식도 간단하니 문제 될 건 없겠네요. 실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같은 의견이에요. 단, 유리아 씨가 허락한다면요.”
“탕후루는 제가 개발한 요리도 아닙니다. 어떻게 써도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제 이름은 밝히지 말아 주세요."
유리아는 고작 탕후루를 알렸다고 명성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건 득이 없는 명성이었다. 애초에 명성 따위에 관심도 없었고.
“알겠어요. 후후. 오늘은 왠지 즐겁네요.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린다와 인사를 끝낸 요리사들은 탕후루를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유리아와 린다는 그 외에도 저택 곳곳을 돌아다녔다.
청소를 맡은 이들부터 시작해서 물류를 창고로 이동하는 사용인들. 대충 합쳐도 100명은 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대부분 이 메이드였다. 집사의 수는 적었다. 당연한 일이긴 하다. 이 저택의 주인은 공주 전하니까. 남자가 함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녀들은 사무실로 들어갔다. 린다는 책상 한편에 정리되어 있는 서류를 건넸다.
“아카데미에서 나왔으니 당연히 서류를 볼 줄 아시겠죠? 이건 예산과 지출 내역이에요. 이상한 점이 없는지 살펴보세요.”
"……혹시 이것도 시험인가요?"
"후후. 어떨까요?”
유리아는 서류를 슥 훑었다. 서류 한 장을 보는 데 1초도 걸리지 않는다. 대충 보는 것 같아도 서류에 적힌 모든 내용이 머 릿속에 들어왔다.
“여기, 여기, 여기. 지출에 문제가 있군요. 비리로 예상됩니다.”
“...설마 3분도 안 돼서 전부 파악할 줄이야. 대단하시네요. 시세를 정확히 알아야만 할 텐데.... 혹시 식재료와 가구의 시세도 파악하고 계신 건가요?"
“아카데미의 평가 중에는 시장 파악도 있습니다.”
“저도 그건 알아요. 아카데미 출신이니까요. 하지만 모든 시장을 파악하는 평가는 아닌 걸로 기억하는데....”
“우연히 제가 파악하던 시장과 맞아떨어졌네요."
"우연이라.”
린다는 쓴웃음을 지었다. 전혀 우연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음은 이 서류를 봐주세요.”
“...이번 연회에 오시는 손님들 명단이군요."
“네. 당연한 말이지만 어디 가서 발설해선 안 돼요. 이번 연회는 비공개로 기자들의 출입도 통제니까요.”
“아직 묻지 못했습니다만, 이번 연회는 어떤 명목으로 열리는 건가요? 공주 전하의 생신일은 내년에 있을 텐데요."
“네오 런던의 발전을 축하한다는 명목이에요. 초전도체가 상용화된 건 아시죠? 초전도체가 네오 런던에서 시작되니, 네오 런던의 가치가 더 올라갔죠. 공주 전하께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을 정도로요.”
“......LK사의 회장님도 오시는 건가요?"
“유진 마이어 준남작 말이죠? 네. 초전도체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당연히 와야죠. 이미 승낙은 받았답니다. 공주 전하께서 직접 그의 공적을 치하할 거예요. 아쉽게도 이번 연회의 주인공은 공주 전하가 아닌 그가 되겠죠.”
“그렇군요.”
"응? 방금 웃으셨나요?"
“안 웃었습니다.”
“에이. 웃은 것 같은데.... 이해해요. 연회장에서 후원인을 만나게 될 테니 기분 좋으신 거겠죠."
“...역시 알고 계셨군요."
“불쾌해하지 말아요. 확실한 정보 없이 외부인을 저택에 불러들일 수는 없으니까요.”
“당연한 일이니 불쾌하지 않습니다.”
두근두근.
무덤덤하게 말하는 것과 달리 유리아의 심장은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오랜만에 주인님과 만난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몸에 활력이 생겼다.
“명단에는 외국계 기업이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군요.”
“초전도체는 우선 국내에 공급될 거니까요."
“제가 봤을 때 명단에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렇죠. 다음은 이 서류예요. 인사와 관련된 서류죠.”
이번에도 상당히 민감한 서류다. 그런 만큼 한번 거치고 들어온 서류일 것이다. 유리아는 업무를 빙자한 시험을 묵묵히 받았다.
“아그네스. 그녀는 어때? 왕실이 직접 나서서 포섭해야 할 정도로 가치가 있을까?"
엘자는 발코니에서 티타임을 즐기며 메이드장인 아그네스에게 물었다.
“전하. 마리아 힐턴은 저와 같은 로열급 메이드입니다. 그녀는 거짓을 입에 담지 않습니다. 그녀의 안목이 정확한 건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녀의 충성심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과장될 수도 있잖아. 역대에도 몇 없는 프라임급을 노리는 인재라니. 영 믿기 힘든걸.”
“그녀의 잠재력이 진짜라면... 곧 두각을 드러낼 것입니다. 어쩌면 이미 두각을 드러낼지도 모르겠군요.”
“아그네스가 보기에 첫인상은 어땠어?"
“완벽했습니다.”
뜻밖의 말에 올라가던 찻잔이 받침대에 딸칵 떨어졌다.
“완벽? 아그네스가 그런 말을 하는 건 처음이네.”
아그네스는 10년 넘게 엘자를 모신 메이드다. 아그네스가 엘자를 잘 알 듯, 엘자 또한 아그네스를 잘 알았다. 칭찬에 박한 냉혹한 메이드장. 아그네스는 인상 그대로의 인물이었다.
“제 착각일지도 모릅니다만....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은 왕실 집사장을 마주하는 느낌 이상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외모는 정갈했고 작은 손짓 하나에도 기품이 서려 있었습니다. 그만한 재능을 가졌음에도 오만함을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첫인상만으로 판단했을 때, 유리아 그레이스는 완벽한 메이드였습니다.”
“아그네스가 그렇게 극찬하니 반드시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걸. 물론 조금 더 알아보긴 해야겠지만. 일단 한 번 만나볼까. 아, 멧커프가의 여식은 어땠어?"
“유리아 그레이스에게 가려져서 그렇지, 리디아 멧커프 또한 뛰어난 인재입니다. 아마 미래에는 슈페리어급에는 오를 것 같습니다."
“슈페리어급? 인재네. 내가 안아야겠어.”
“리디아 멧커프는 전하의 시녀. 즉, 비서가 되길 원하고 있습니다. 정당한 대우를 해준다면 전하의 품에 안길 것입니다. 다만, 철저한 조사가 필요합니다.”
“좋네. 유리아는?”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보고를 듣기에는 리디 멧커프와 달리 상당히 수동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수동적이라....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걸까? 응. 궁금하네. 저택의 주인으로서 두 사람을 한 번 만나봐야겠어. 지금 당장 부를 수 있지."
“전하의 뜻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