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2화 > 2212. 다크 문
실신한 유리아는 황홀함 속에서 꿈을 꿨다. 오래된 꿈이었다.
미숙하던 시절.
주인님과 만나고 얼마 안 되었을 시절.
자신이 주인님보다 키가 컸던 시절이었다.
그날은 유독 일이 풀리지 않던 날이었다. 생리 때문에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일까. 평소에는 없던 실수를 연달아 저질렀다. 별거 아닌 실수였다. 요리 중에 주인님의 접시를 깨뜨리고, 수련 중에 손이 베였다. 어쩐지 집중이 되지 않는 날. 하지만 결국 지나가는 날.
그날 밤에도 유리아는 주인님의 앞에서 옷을 벗었다. 자신의 성장을 주인님에게 확인시켜주었다.
당시의 유진도 지금과 같았다. 관대하면서도 악랄했다. 자신의 사람이나 미녀의 실수는 관대하게 넘어갔다. 반대로 아무 것도 아닌 타인에겐 무심했고, 적은 잔혹하게 짓밟았다.
다행히 유리아는 유진의 관대함을 받았다. 실수를 해도 어지간한 일은 전부 용서받았다. 실수로 고문 상대를 죽이는 것도 포함해서다. 물론 벌은 받았다. 그 벌이란 게 엉덩이를 찰싹찰싹 맞는게 전부다. 심지어 소리만 요란할 뿐 딱히 아프지 않았다.
그날 밤도 벌을 받았다. 접시를 깨뜨린 벌로 엉덩이 2대. 손을 다친 일로 엉덩이 8대.\
알몸으로 주인님의 무릎 위에 엎드려 엉덩이를 올리고 손바닥을 맞았다. 처음 손바닥 2대는 벌이 아니라 상이라 해도 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주인님이 보지를 쓰다듬어 줄 때처럼 아랫배가 뜨거워져서 당혹스러웠었다.
그러나 다음 8대는 아팠다. 엉덩이가 얼얼해질 정도로. 그보다 더 놀라게 한 것은 유진의 표정이었다. 유진이 화난 표정은 그날 처음으로 봤다.
유리아는 두려움을 느꼈다. 엉덩이를 통해 느껴지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버림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자신은 그의 소유물. 계약을 하긴 했으나, 그의 입장에선 얼마든지 파기할 수 있는 일방적인 계약이다. 막말로 유진이 질렸다 는 이유로 자신을 처분해도 어찌할 수 없었다.
“네 몸은 내 거다. 그렇지?”
“...네. 제 몸은 주인님의 것입니다.”
“함부로 다치면 안 되지. 수련하다가 다친 건 알아. 그래도 이렇게 대충 응급처치를 해선 안 됐어."
유진이 붕대를 풀고 상처 부위에 최고급 포션을 들이부었다. 최고급 포션의 효과는 뛰어났다. 상처는 흉터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상처에서 일어나던 통증도 사라졌다.
“...죄송합니다. 이 몸이 주인님의 것이란 걸 잠시 망각했습니다.”
“그래. 작은 흉터 하나, 굳은살 하나 용납할 수 없어.”
"...수련을 하다 보면 굳은살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니 조심히 수련해야지. 포션을 줄 테니까 관리해. 어지간한 상처는 다 나을 거야. 강해지는 것에 너무 조바심을 느끼지마. 널 위해 준비된 기연이 있으니까.”
“네.”
유리아는 당장 버림받지 않은 것에 안심했다. 유진은 유리아의 빨갛게 부어오른 엉덩이에도 포션을 발라주며 물었다.
“넌 포커페이스가 완벽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이 전혀 안 되더라."
“감정 표현에는 서툴러서... 연기 교육도 받고 있으니 감정 표현도 연습해 보겠습니다.”
“아니, 내 앞에서 연기하지 마.”
“네.”
“아무튼, 네가 날 죽이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역지사지라고 하잖아. 내가 네 입장이면 날 죽이고 싶어 했을걸.”
역지사지. 유리아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설령 알더라도 유진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유리아는 유진과의 거래에 만족하고 있었다. 일정이 조금 고되긴 해도 어머니와 살 때 보다 편했다. 적어도 뜬금없이 야반도주를 해야할 상황은 오지 않으니까. 게다가 힘을 받고 있지 않나.
유진에게 희롱당하는 생활? 자신의 몸은 그의 것이다. 자신을 죽이는 것도 아닌데 이 몸을 어떻게 쓰든 상관없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몸을 만지면 기분이 좋아졌다.
"죽어 줄게."
“네?”
유진이 자신의 몸을 세우고 끌어안았다. 유리아는 저항 없이 그의 품에 안겼다.
타인에게 안기는 것. 어머니를 제외하고 처음이었다. 그 어머니도 어렸을 적에야 자주 안아줬을 뿐이다. 그의 품에 안겨 체온을 느끼는 건 꽤 기분 좋았다. 그의 부드러운 피부도 기분 좋았고.
“나중에 말이야. 네가 날 죽이고 싶어지면 말해. 몇 번 정도는 그냥 죽어줄게.”
"……주인님을 죽이고 자유의 몸이 되는 건가요?"
“아니. 내가 죽더라도 넌 내 거야.”
“그렇군요."
유진이 자신을 쓰다듬는다. 뒷머리와 등허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집중했다. 유진은 가끔 실없는 말을 하기에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다.
“이번엔 엉덩이를 세게 때린 건 좀 미안하긴 했어. 내 것이 상처 입으니 열받더라고. 미안하니 부탁 하나 들어줄게. 뭐 갖고 싶은 거라도 있어?"
물질적으로는 딱히 없었다. 힘을 원하긴 했으나, 그건 한순간에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쓰다듬어 주세요."
“보지를?”
“아뇨. 머리를요.”
“둘 다 쓰다듬어 줄게."
"……."
"아, 잠깐. 보지털 많이 자랐네. 가슴도 어제보다 0.03cm 정도 커진 것 같고."
“...주인님은 그대로이신 것 같네요.”
“어쩔 수 없어. 이 시기에는 여자가 더 성장이 빠르니까. 그리고 이 세계에선 네가 나보다 더 연상이야. 아, 겨드랑이털은 자라는 대로 잘라. 그건 보기 싫더라.”
"주인님. 갈 것 같아요."
“왜?”
“주인님의 손이 클리토리스를 비벼서... 하응, 갈 것 같아요."
“그래? 당분간은 갈 때마다 키스하자. 목표는 키스만으로 갈 수 있을 때까지?"
그날부터 유리아는 거의 매일 보지와 머리가 쓰다듬어졌다. 특히 밤에 그의 품에 안겨 잠들기 전에 쓰다듬어질 때가 유리아가 가장 좋아하고 기다리던 시간이었다.
'주인님을 사랑하게 된 게 언제부터였을까요?'
어렸을 적을 완벽히 기억하는 유리아도 그 계기를 모른다.
어느 순간, 자신이 주인님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그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유리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자신은 그의 품에 안겨 쓰다듬어지고 있었다.
“깼어?"
“...주인님. 제가 얼마나 잠들었나요?”
“얼마 안 잠들었어. 10분?”
“주인님의 메이드로서 부끄러운 꼴을....”
말을 잇던 유리아가 멈칫했다. 자신의 몸이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목 아래에 못 보던 브로치가 걸려 있었다. 검은색 금속에 분홍색 보석이 벚꽃 가지 형태로 정밀히 세공된 물건이었다.
"선물이야. 작품명은 악마의 벚꽃. 고위 악마의 뿔을 재료와 환수계 벚나무로 만들었지. 악마의 뿔이라 꺼림직하긴 해도... 널 해치진 않을 거야. 하이텔 학파의 도움을 받아서 만든 만큼 안정성은 확실해. 그래도 싫다면 어쩔 수 없고."
“주인님이 주신 선물인데 싫을 리가요. 제 보물이 하나 더 늘었네요.”
“다행이네. 개념 단절의 효과가 있어. 개념 자체를 일시적으로 단절하는 능력. 악마의 뿔을 재료로 사용했더니 악마의 능력 일부가 그 브로치에 담긴 거야. 환수계 벚나무는 혹시 모를 안전장치로 사용했어. 환수계 생물은 천사나 악마 같은 초월 적인 존재에게 어느 정도 내성이 있으니까.”
“제가 아니라 주인님께 필요한 물건인 것 같군요."
“난 못써."
유진이 손을 들었다.
그의 손 주위로 황금빛 마나가 넘실거린다.
“그건... 신성 마나군요. 종교에 귀의하셨나요?”
“최근에 여러 가지 일이 있었거든. 그중에 신성 마나를 연구하다가 이렇게 됐어.”
천사로 변신했던 유진은 인간인 상태에서도 신성 마나를 감각을 떠올리며 신성 마법을 연구하다가... 신성 마나를 깨우쳤다. 본래는 있을 수 없는 일이 그의 말도 안 되는 마법적 재능이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다만, 그 반발로 흑마나와 마력은 연구하기 어려워졌다.
“뭐, 신성 마나가 아니어도 그건 널 주려고 했어. 얼마 전에 메이드 아카데미 내에서 습격받았잖아? 그 일이 계속 걸리더 라고. 습격이 한 번이 아닐지도 모르니까.”
유진은 개인적으로 습격의 배후를 조사해 봤다. 허나 성과는 없었다. 전문가에게 의뢰했어도 마찬가지. 경험적으로 이럴 때는 두 가지 경우다. 하나는 습격의 배후가 아주 철두철미한 놈. 하나는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진 놈.
“조사를 포기한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꼬리가 전혀 안 잡히고 있어. 보통 놈이 아니야. 조심해.”
“네, 주인님. 제가 당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여차할 땐... 주인님이 도와주실 테니까요.”
유진과 유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젠 정말로 헤어질 시간이었다. 그들은 키스로 작별 인사를 대신했다.
연회는 새벽까지 이어지다가 끝났다.
다음 날 아침. 숙소를 나온 유리아는 메이드들이 시끌벅적 떠드는 걸 발견했다. 그녀들은 어디 한 곳을 쳐다보며 말을 쏟 아내고 있었다.
“엇, 실습생이잖아. 마침 잘 왔어.”
“무슨 일이 있나요?"
“직접 저기를 봐. 꽤 재밌는 광경이야.”
선임 메이드가 히죽 웃으며 한곳을 가리켰다. 어젯밤 유리아와 유진이 거사를 치렀던 곳이었다. 그곳의 바닥에 거사의 흔 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무언가에 눌린 듯한 풀잎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무 표면에 손바닥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유리아는 황급히 손을 감추었다. 어제 나무를 짚고 엎드릴 때 손에 너무 힘을 준 것 같았다. 섹스에 정신이 팔려서 그때 당시는 몰랐다.
'...제가 이런 실수를.'
유진이 뒤처리를 했다고 해서 믿었는데... 아주 엉성하게 뒤처리를 했다. 이 세계의 유진은 꼼꼼한 편이지만... 여자에 정신이 팔리는 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인 모양이다.
“저 손바닥 모양. 네 손이랑 똑같은데?”
“무슨 소리야? 내 손이 더 굵... 씨발.”
“와. 손도장이 이렇게 예쁠 줄이야. 대체 어떤 여자야?”
“너희들. 나무에만 집중하지 말고 아래를 봐. 아직 하얀 액체 같은 게 있어. 저거 정액이야. 정액, 정액 모르는 촌년 없지?"
“음. 조금 지린내가 나는 것 같지 않아?"
“와. 정액도 싸고 오줌도 싸는 놈이야? 변태 새끼네, 이거."
“하고 난 뒤에 마려워서 싼 걸 수도 있지. 어디 범인 찾기 들어가?"
“아서라. 어제 연회장에 온 손님의 유전 정보라도 나오면? 일이 커졌다가 네 목만 잘려. 연회에서 불타는 남녀가 나오는 게 드문 일도 아니잖아. 그냥 묻어. 나가서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누가 양동이에 물 좀 받아와. 내가 확 뿌려버릴 테니까.”
유리아는 표정 관리 능력이 있음에 감사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 범인으로 의심받았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