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4화 > 2214. 다크 문
오후가 되자 하나, 둘씩 사냥터에 사람들이 모였다. 엘자 공주와 그를 따르는 귀족과 기업인들. 그리고 초청받은 기자들. 그들을 호위하고 시중드는 메이드와 집사에 고용된 용병들까지 합치면 총 300명이 넘는 대인원이었다.
유리아와 리타는 숲속에서 숨을 죽이며 사냥터를 지켜봤다. 곧 해가 지고 검은 달이 하늘 위로 떠 올랐다. 밤하늘보다 더 어두운 달. 다크 문.
"수상한 이들은 없네. 임무를 수행하자. 내 뒤를 따라와.”
유리아는 조용히 리타를 따라 움직였다.
도착한 곳은 사냥터에서 4km 떨어진 기암절벽이 있는 곳. 그 아래로는 울창한 나무숲이 펼쳐져 있었다.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우렁찬 귀곡성이 그녀들을 반겼다. 리타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안 좋네. 다크 문의 영향을 직빵으로 받았어. 아래 귀신들이 우글거려.”
“다크 문이라 하더라도 이 정도로 자극받습니까?”
“그럴 리가. 이건 누군가가 다크 문의 힘을 교묘하게 이용한 거야. 저 아래에 월석이 있을 거야."
월석. 달에서 떨어진 돌. 다크 문이 뜨는 날이면 이 월석 또한 검게 물들어 주변에 악영향을 끼친다.
당연히 월석은 전 세계적으로 특수 관리 대상이다. 국제법으로도 월석은 회수하고 봉인하도록 명시되어 있다. 월석을 힘으로 파괴하는 건 불가능했다.
“월석은 국가기관이 나서서 회수해야 하지 않습니까?”
“의회는 네오 런던 밖의 일에는 잘 나서지 않아. 근처에 공주 전하가 계시지만... 다크 문이 뜬 상태라 지원이 오지 못해. 공주 전하의 체면이 걸린 일이니 피할 수도 없어. 그렇다고 위험 요소를 내버려 둘 순 없어. 최악의 사태가 일어날 수 있으 니까."
"월석을 찾더라도 봉인할 수는 있나요?"
리타가 주머니에서 작은 끈을 꺼냈다.
“봉인 술식의 마도구야. 이거라면 월석을 봉인할 수 있어. 자, 가자."
리타가 절벽에 로프를 걸고 유리아에게 건넸다. 그녀들은 로프 한 줄에 의지해 뛰듯이 내려갔다.
리타는 망령이 나오는 숲을 거침없이 나아갔다. 망령? 그녀의 소음기 달린 권총이 불을 뿜으면 망령은 그대로 사라졌다.
“바게트들이 성수로 단조하고 기도해서 축복한 성스러운 탄환의 맛이 어떠냐!"
망자를 없애던 리타가 멈칫했다.
갑자기 유리아의 기척이 사라졌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기감을 퍼뜨렸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전조도 없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귀신의 농간인가? 그게 아니면 원흉의 짓? 설마 놈들이 노리는 건 공주 전하가 아니라 유리아 그레이스였나?'
리타의 발이 빨라졌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벌레 소리가 사라졌다.
밤하늘의 구름이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시공에 대한 깨달음을 어느 정도 갖고 있던 유리아는 시간이 멈췄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계의 시간이 멈췄다. 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눈앞에 있어야 할 리타가 없으니까. 그녀는 근처에 있는 나뭇잎을 조심스레 만졌다. 나뭇잎의 감촉이 느껴진다. 힘을 줘서 나뭇잎을 당겨도 떼지지 않는다. 나뭇잎이 구겨지긴 하나 손가락을 떼면 없었던 일인 것처럼 원대래도 돌아온다.
'시간과 시간. 그 틈에 갇힌 것 같네요.'
유리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불길한 검은 달이 그녀를 내려다본다. 기분 탓일까. 이 멈춘 시간 속에서 저 불길한 검은 달만큼은 멈추지 않은 것 같다.
'적이 오려나요?'
자신을 시간과 시간의 틈으로 가둬 놓은 적. 자신을 죽일 목적이었다면 이런 번거로운 일을 했을까? 아마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다.
'제 정신을 무너뜨리는 쪽이 목적인가요?'
숲이 잘 보이는 절벽 위. 그 끝에 집사복을 입은 흑인 남자가 가부좌를 틀며 앉아 있었다. 양손을 모으고 있는 카싱은 정면을 똑바로 쳐다 봤다. 그의 눈에는 숲이 아닌 다른 것이 보였다.
“성공했어?"
카싱의 뒤에서 보라색 짧은 단발머리를 트윈테일로 묶은 여자, 베키가 말했다. 메이드 복을 입은 그녀의 왼팔에는 칼로 그은 듯한 상처들이 있었다.
“성공했다. 시간과 시간의 틈 속에 갇혔다. 망령들이 시간을 끌어준 덕분이지.”
“그럼 뭐, 끝난 거나 다를 바 없네. 시간의 흐름이 달라서 여기의 1초가 그곳은 100만 초라며?”
“그래. 1초가 11일이지. 30초가 지났으니 저 공간에선 벌써 1년이 지났다.”
시간이 멈춰있기에 그 안에서 굶어 죽을 일은 없었다. 자살도 불가능했다. 육체가 변하지 않으니까. 굶어 죽지 않는다. 수 면욕을 비롯한 어떤 육체적인 욕구도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카싱은 7급 이상의 초인이라도 저 공간 안에선 오래 버틸 수 없으리라 장담할 수 있다.
“그 여자는 뭐 하고 있는데? 경호실장이 서쪽으로 갔어. 슬슬 꺼내서 세뇌하자. 정신이 완전히 무너진 건 아니지?"
“단검을 들고 수련을 하고 있군. ...지금은 명상을 하고 있고. 땅을 노려보고 있나?”
"뭐라는 거야."
“시간의 흐름이 압도적으로 달라서 파악하기 힘들다. 정신은 아직까지 안 무너진 것 같군. 좀 더 기다려야겠다.”
베키는 카싱의 머리를 바라봤다. 짧은 검은색 머리카락. 그 사이로 하얀 새치가 듬성듬성 나타나고 있었다.
그와 그녀는 악마 계약자. 계약을 통해 악마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 허나 무작정 사용할 수는 없다. 대가가 필요하다. 카싱의 경우 힘을 쓸수록 급속도로 노화한다.
“너, 괜찮아?"
“문제없다. 오늘은 다크 문이 뜬 날이다. 나와 네 힘이 평소보다 더 강해지지.”
5분이 지났다.
20대의 카싱은 50대로 확 늙어 있었다.
유리아는 멍하니 앉아 있지 않았다. 육체의 시간은 멈췄으나 정신의 시간은 멈추지 않았으니까. 어떻게 보면 수련을 할 수 있는 행운이기도 했다. 마침 단검을 가지고 있지 않나.
단검을 이리저리 휘두른 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예상대로 육체적인 수련은 별 의미 없겠군요. 고작해야 감을 살리는 수준이네요.'
아무리 수련해도 육체는 변하지 않으니까.
유리아는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걸 알았다. 검기를 휘둘러 날릴 수도 있다. 문제는 아무 의미 없다는 거다. 마나를 사용해 검기를 날려도 나뭇잎 하나 벨 수 없다. 시간이 멈췄기에 변화가 없는 것이다. 마나를 소모해도 다음 순간 원래의 양으로 돌아와 있다.
변화는 없다.
이 멈춘 세계는 그저 유리아에게 정신적인 굴복을 강요하고 있다. 적은 자신이 미쳐버리기를 원한다.
허나 유리아는 미치지 않았다. 미칠 수가 없었다. 그의 주인님에게 받은 절대 정신이 그를 허락하지 않았다. 설령 만겁의 시간이 흐르더라도 그녀의 정신은 티끌만큼도 마모되지 않을 것이다.
'벗어날 방법은 있습니다.'
그녀는 브로치를 매만졌다.
유진에게 선물 받은 브로치의 힘인 개념 단절로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 이미 그녀는 시공이란 개념을 인식하고 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 이건 빠르게 강해질 기회였다.
‘저를 제외하고 멈추지 않은 걸 발견했으니까요.'
그녀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그림자.
그림자만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반응하고 있었다.
'검은 달은 멈추지 않았네요. 밤하늘보다 더 시커먼 달인데 빛을 내다니. 검더라도 달은 달이라는 건가요.'
덕분에 수련할 환경이 맞춰졌다.
유리아는 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가 떠올리는 건 영천류의 영천기공(影天氣功).
'영천류의 근간은 태극입니다. 영천류의 뇌광이 양기를 뜻하고, 영천류의 암영이 음기를 뜻하죠.'
유진이 암영을 다루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유진은 극양의 기운을 가졌으니까. 그의 끝 모를 정력도 그 영향을 받을 것이다. 아니, 반대로 정력이 높기에 양기가 어마어마한 것일지도.
'영천류를 창시한 대종사는 태극을 어쩔 수 없이 기용한 것일 테죠. 영천류의 기술을 보면 대부분 암영 쪽과 궁합이 맞으니까요.'
과유불급.
음기가 너무 강하거나, 양기가 너무 강하면 문제가 생긴다. 영천류는 태극으로 밸런스를 잡았다. 거기서 파생한 것이 뇌광. 허나 뇌광은 보너스적인 힘이었다. 영천류의 이름부터가 그림자의 하늘이지 않나.
'주인님은 예외지요. 주인님의 뇌천류는 이젠 영천류라고 할 수 없지요.’
유진의 뇌천류에는 영천류뿐만이 아니라 여러것이 섞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섞일 것이다.
'영천류가 약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천류에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태극이란 가능성이. 대종사는 양기와 음기의 균형을 태극을 묘리를 넣어 암영의 난이도를 확 높여 버렸습니다만, 영천류에 그 이상의 가능성을 부여했지요. 만물의 시작. 즉, 무한의 가능성을.'
파지직.
유리아의 그림자에서 검은 번개가 피어오른다.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검은 번개가 그대로 사라졌다.
유리아가 원하는 건 파괴의 힘을 가진 검은 번개가 아니다. 그림자를 다루는 힘. 제약에 의해 마법을 사용할 수 없으니 영천류를 이용해 그림자 이능을 개화하려고 했다. 허나 생각보다 잘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났다. 유리아는 번버닝 실패했다.
'힘이 모자라는군요. 태극 묘리를 해체해서 한정시켜 봐야겠군요.'
영천류를 난도질해서 개조하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원래라면 미친 짓이다. 몸이 버텨주지 못하니까. 하지만 여긴 멈춘 시간 속 공간.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다. 실험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시간의 틈에 갇힌 지 247일 6시간 11분 50초가 되었을 무렵이었다.
그녀의 브로치에서 의지가 전해졌다.
-못 봐주겠네. 밖으로 나갈 수 있으면서도 왜 나가지 않는 거야?
유리아는 브로치를 바라봤다. 악마의 뿔로 만들었으니 악마의 속삭임일까?
“...묘하게 익숙하군요. 혹시 벚나무입니까?"
-맞아. 네가 날 돌봐줬지. 아주 세심해서 기분 좋았어. 반면에 그 자식은 너무 거칠어. 세심한 배려가 없다니까. 그래도 뭐, 손길이 기분 좋고 질이 좋은 전기를 제공해 주니 봐주는 거야.
“그분은 당신의 주인님입니다. 예의를 갖추세요.”
-어이가 없네. 지금 너 위험한 상태인 건 알아?
“위험한 상태요? 전 멀쩡합니다. 다친 곳도 없습니다. 여기선 다칠 수도 없고요.”
유리아는 유진과 관련된 일이 아니면 무리를 하지 않는다. 자신의 몸은 유진의 것이니까. 몸을 관리하는 일은 그녀의 의무다.
-정신을 말하는 거야. 갇혀 있을 뿐만이 아니라 다크 문의 빛을 계속 맞고 있잖아. 나라고 영향을 받는데 너라고 영향을 받지 않을까.
“...저는 괜찮습니다. 주인님의 은혜로 정신은 보호받고 있으니까요. 당신이 저와 대화할 수 있는 다크 문의 영향이었군요."
-맞아. 원래는 아주 작은 조각의 의식이었다가 다크 문의 영향으로 커졌어. 그리고 이 브로치 안에서 꿈틀거리는 악마의 힘도 내가 막아주고 있지.
"혹시 본체와 이어져 있나요?"
-아니. 이 공간을 나가면 본체와 이어지겠지? 뭐, 난 분신 같은 거라 자아도 소멸하겠지만. 아니지. 돌아간다고 해야 하나? 실망했어?
“안심했습니다. 별일 아닌 일로 주인님께 걱정을 끼치지 않아도 되니까요. 오늘 일은 제가 따로 보고하겠습니다.”
...몇 년이나 여기에 있을 셈이야?
“목표를 완성할 때까지 있고 싶군요. 수백 년을 각오했습니다만, 브로치가 있으니 수십 년이면 되겠습니다. 브로치의 힘이 개념을 단절하는 것이니 개념을 잘게 쪼개서 새로운 개념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무슨 미친 발상을 하는 거야?
“그림자를 다루는 힘. 이능을 한 번 만들어 볼까 합니다.”
-이능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야. 초월적인 존재들도 파악하지 못한... 신의 영역이야.
“압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림자에 한해서라면... 가능할 겁니다. 원래는 안전에 주의하며 천천히 힘을 개화시키려 했지만... 운이 좋게도 환경이 갖춰졌네요.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겠습니다.”
-너. 밖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은 아예 없는 거야? 네 잘난 주인님을 보고 싶지 않아?
“미치도록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버틸 수 있습니다. 뇌내에서 주인님과의 추억을 반복해서 떠올리고 있으니까요. 이게 끝이 아니란 걸 알기에 버틸 수 있습니다.”
-미친년.
"후후."
-갑자기 왜 웃는데?
“방금 저와 주인님이 결혼했습니다.”
-너희 결혼한 적 없잖아. 이젠 추억이 아니라 망상을 하고 있네. 진짜 미쳐버린 건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