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마도사의 상황 -->
"하아.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여전하네요.
그 혼자 한탄하는 버릇."
옆에서 이죽거리는 버르장머리 없는 이 여마족은 옛날 일만 아니었으면 당장 마계로 던져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대수림 종족과 마족들의 전투 향방이 우선이었다.
‘전쟁이 종반을 향해서 가는군.’
동공에서 기어 올라온 지상형 마물이 포위망을 뚫고 돌진하면서 괴멸적인 타격을 받아도 대수림 바깥으로 향한다.
나무 위로 기어 올라오는 마물은 엘프들이 처리하지만, 그 외는 모두 내버려 둔 탓이다.
‘지상은 하이오크와 나가족, 드워프들의 몫이로군.’
방금 짧은 전투로 하이엘프 일족의 피해는 25만에 달했다.
물론 수백만의 하이엘프 군단에서 미미한 피해라고 하지만 그들이 최정예면 상황이 다르다.
‘자신들이 본 피해만큼 오크 일족과 다른 일족이 안 당하면 균형이 무너질 수도 있다.’
과연 숲 외곽에서 오크들의 투기가 섞인 고함과 비명이 울리고 있다.
‘부디 나만 보면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오크 로드 놈들 좀 처리해라.
가끔 여기까지 와서 도발하는 것을 보면 정말 짜증이 난다.’
하이엘프도 날 욕하거나 죽이러 온다면 원수인 오크들을 통과시킨다고 하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물론 그들은 전부 마계로 날려버렸다.
묵묵히 전황을 보고 있는데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린다.
“계약하자.
위대한 흑마도사.”
누구의 목소리인지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데 공간이동으로 눈앞에 나타난 존재는 최상급 마족들과 마왕으로 보이는 마족이었다.
마왕은 다른 마왕에게 상당히 당한 듯 힘을 소모하여 아이의 모습이지만, 하이엘프보다 아름다운 존재였다.
‘마족이든 신족이든 정신체의 등급이 높을수록 아름답다.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더군나 천이 귀한 마족의 특성인지 급소를 가린 갑옷을 제외하고 옷을 입지 않아 상당히 선정적인 모습이 많다.
그러나, 흔들리지는 않는다.
‘최상급 마족의 구분 방법은 3쌍 이상의 날개와 뿔이며 최상급부터 성별은 의미가 없어진다.
완전한 정신 생명체가 되어 그 육체를 자유자재로 변화시킨다.’
물론 상급 이하 시절의 성별을 기억해서 유지하는 경우가 많지만 믿을 것은 못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 모두 여성형이다.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지만, 최상급의 마족은 정말 강력하다.
계약을 부탁할 필요가 없을 텐데?’
인류가 최상급 이상의 마족을 타도하려면 신력을 빌리거나 단독으로는 순간적으로 그들 이상의 마력으로 분쇄하는 7서클 이상의 자기희생주문 외에는 없다.
즉 거의 무적인 존재이고 그들을 막기 위해 신은 용족을 준비한 것이다.
‘물론 여기 대수림은 마력이 꼬인다.
그 때문에 용족들은 모두 숲 바깥에서 이들이 튀어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용족이 좁은 입구를 지킬 수 없게 마법을 쓸 수 없는 대수림은 마계에서 가장 안전한 탈출구이다.
대수림은 그런 그들을 막기 위해 중간계의 가장 강대한 부족이 모인 곳인 지역이었다.
상황을 생각하고 바로 거절한다.
“마족과 계약할 생각은 없다.
가서 싸워라.”
여기서 마왕이나 최상급 마족과 거래라도 했다가는 중간계에서 매장된다.
‘그렇지 않아도 흑마법사의 악명 때문에 카르마가 엄청 깎여서 복구할 생각에 눈앞이 까마득하다.’
카르마가 극악이 되어서 신족들이 날 소멸시키겠다고 떼거리로 몰려오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대는 여성을 좋아하니 우리 모두 여성체가 되어 그대를 주인으로 모시겠다.
대가는 단 하나 다음 마계의 문이 열릴 때까지 보호다.”
“….”
지금 내가 들은 소리가 무슨 소리인가?
‘마계에서 무슨 소문이 났지?
여자를 줄 테니 중간계의 적이 되라는 소리를 마족이 내게 할 수 있는 것인가?’
시선이 자연스레 서큐버스에게 갔다.
황급히 시선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니 모처럼 피가 거꾸로 도는 듯했다.
"서큐버스 퀸 엘레노아를 능가하는 욕망을 가진 그대라면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마왕께서 힘을 회복하여 다시 마계의 왕좌에 도전하기 전까지 우리는 모두 그대를 주인으로 모신다."
저 가증스런 것이 최상급 마족 중에서도 색을 탐하기로 유명한 서큐버스 퀸이란다.
‘날 마계에 색마를 능가하는 대색마로 소문내었구나.
어쩐지 10서클이 되어서 확인한 카르마가 가만히 있어도 미친 듯이 떨어져 있다 했더니 저 여마족 짓이었어.
당장 저것을 마계로 날려버리고 이 황당한 마족들을 소멸시켜야겠다.’
그래도 마왕이라 조금 힘들겠지만, 긍정적인 카르마 상승의 제물로 삼을 생각을 굳힌다.
‘계약 기간 그대의 여자가 된다.
이것은 마왕님까지 계약에 포함되어 동의하신 사항이다.
순간의 치욕을 참고 원한을 갚기 원하는 우리들의 의사는 거짓이 없도다.’
그 말에 상황은 변한다.
‘이런 빌어먹을-!’
마족 주제에 왕을 위한 자기희생이라니 어이없게도 카르마가 그들을 선으로 규정하였다.
‘어머어머한 긍정의 카르마가 이 계약에 부과되었다.’
발생하기 힘든 상황일수록 높은 대가를 지급하는 카르마가 황당한 상승을 대가로 보여주고 있었다.
저 가증스러운 서큐버스퀸과 흑마도사의 악명으로 생긴 부정적인 카르마를 일소하고, 단숨에 다음 서클을 노릴만한 긍정의 카르마가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하지만 이 계약을 승인하면 난 정말로 중간계의 공적이 된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나를 죽이려는 하이엘프들은 둘째 치고 중간계의 수호자인 용족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서 받을 긍정의 카르마는 더 떨어질 분량도 없다.
‘정말 한 짓도 별로 없이 천하에 죽일 놈이 되는 것은 사양이다.
하지만 저 정도 선의 카르마를 모으려면 도대체 얼마의 시간을 투자해야 할까?’
갑자기 어릴 때의 생각이 났다.
5서클이 되서 마도사에 입문하자 스승님께서 내게 물었다.
“흑마도사가 될지 그냥 마도사가 될지 선택하렴.”“차이가 무엇인가요?”
“마도사가 되면 넌 아마도 마도황제가 될 거다.
모두에게 존경받고 사랑받겠지.”
“흑마도사가 되면요?”
“전장에서는 최강이 될 거다.
다만 모두에게 비난받고 두려움의 대상이 되겠지.”
“스승님은 왜 흑마도사가 되셨어요?”
“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단다.
하지만, 너에게는 선택하게 하고 싶다.”
“흑마도사가 되겠어요.
멋지잖아요.
최강이라니.”
스승에 대한 애정과 안타까움, 어린 날의 치기가 뒤섞여 선택한 흑마도사의 길이었다.
‘왜 지금 또 생각이 나는가?
설마 내가 이 마왕과 최상급 마족들을 동정하는 것인가?’
정말 내가 색에 미친 것은 아니냐는 황당한 생각도 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난 항상 이럴 때 모두가 보기에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난 긍정의 카르마를 탐내고 색에 미쳐 중간계를 배신한 흑마도사가 되겠지만, 저들의 불가능한 도전을 보고 싶어졌다.’
겨우 일백 년 만에 저들이 세력을 복구하고 다시 마왕의 자리에 도전하여 승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가장 사악한 마족 주제에 가장 고귀한 자기희생 비슷한 것을 보여준 저들이 어디까지 가는지 보고 싶은 것이다.
“제 17마왕 아몬과 그 휘하 최상급 마족과의 주종계약을 카르마의 이름으로 받아들인다.
대가로 주는 것은 다음 마계의 문이 열릴 때까지의 보호이며 그 순간까지 유효하다.”
‘카르마 계약’은 운명의 계약이라 불린다.
‘주신조차 부정하면, 소멸시키는 절대적인 계약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마왕은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계약에서 발생하는 힘의 파동에 최상급 마족들은 공포에 떨었으며 마족과의 전투를 마무리를 지은 하이엘프들이 황급히 물러서는 것이 보인다.
‘긍정적인 카르마 계약을 수호하기 위해 발생하는 모든 부정은 무시된다.
오직 그것 하나 때문에 난 이 절대의 계약을 선택한다.
이제 내가 흑마법사를 선택한 것과 같이 이제 되돌릴 수 없다.
마왕이 내게 종속되는 계약으로 이제 대수림과 중간계 전체와 전쟁이다.’
물론 진짜로 할 생각은 없다.
‘확장된 마탑을 혼자서 자급자족이 가능한 생존형 마탑으로 개조하고 여기서 산다.
내 마탑의 차원방벽은 주신이상의 신이 아니면 해제할 수 없고 결코 들어올 수 없다.’
더구나 신이나 마신들은 중간계 강림할 때 1할밖에 힘을 발휘할 수 없기에 안전하다.
카르마만 벌어들인 수지맞는 계약이라고 이때는 생각했었다.
세상을 너무 얕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