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신과의 협상 -->
마지막으로 필사적으로 집어넣은 흑마법사들의 악행이 나 흑마도사에게 부과되는 것을 배제한다는 항목도 주신의 태평한 어조 속에서 물 흐르듯 흘러갔다.
"이미 흑마법사와 자네와는 별개의 존재로 인식되어 졌네.
흑마법사가 무슨 짓을 해도 자네와는 아무 관련이 없지."
허탈해하는 나의 눈앞에서 '카르마의 계약서'가 깜박이며 흔들리기 시작한다.
최초 예정된 목적을 충족하는 모든 내용이 들어갔다는 징조다.
나를 편법적으로 속인 대가를 모두 지불하고 그 이상의 안전을 보장했다는 뜻이다.
"이 모든 것은 주신과 신계가 보증하며 그랑조아가 소멸할 때까지 유효하다."
'마음대로 끝내지 말란 말이다-!'
내 속의 비명과는 달리 카르마의 계약서가 반자동으로 부족한 내용을 메꾸고 사라 질려 하고 있다.
정말 창조신의 얼굴 좀 보고 싶을 정도로 인정사정없는 조치다.
주신은 신계와 자신을 계약의 조건으로 걸었기에 만약 내가 저 계약을 어기려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나에게 부여 될 것이다.
나는 개인이기에 '안티 카르마'는 우스울 정도로 조치가 취해질 것이므로 이제 포기해야 한다.
아니 아직 패가 남았다.
자기 앞에 마왕의 목들을 뚫어놓은 주신살의 창을 보고 머리장식에 박힌 얼굴을 보자 기사회생의 수가 생각났다.
'저 기생오라비 전쟁신이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못났어도 주신의 아들에 전쟁신, 최상급 신인데 이걸 빌미로 과다한 요구를 하면 분명 계약이 파기 될 것이다.'
회심의 미소와 더불어 창을 집는 순간 주신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축하하네.
엘프와 전쟁의 신인 고귀하고 위대한 흑마도사여."
"컥-!"
방금 들은 소리에 서클이 터져나가는 줄 알았다.
방금 저 주신이 지금 나에게 뭐라고 하는 거냐?
'엘프의 신?
그랑조아 대신 엘프를 담당하라고?
나만 보면 죽이려는 저 독한 것들을?
그리고 뭐 전쟁의 신?'
하이엘프퀸들의 정령검에 몸이 산산조각 난 것이 한 달 조금 전이다.
아직도 그때 생각하면 온몸이 시려올 것 같고 심장 주변의 상처가 욱신거리는데 엘프의 신을 담당하라고 하는 거냐?
"신계 역사상 최상급 종족과 개념인 전쟁의 신을 동시에 맡은 적이 없지만 공석이 둘이니 어쩔 수 없지.
그리고 못난 아들은 잘 부탁하네."
점입가경으로 돌아가는 사태에 정신이 멍해진다.
자신의 아들인데 공석이라고 그 자리를 아들을 죽인 나를 주고 그 아들은 창에 봉인된 상태로 내버려 둔다는 소리이다.
'정말 말 된다.
이놈들 정말 곱게 미쳤다.
협상만 잘하면 돌려받을 수 있는데 이 꼴로 내버려 둔다고?'
무엇인가 이상하다고 따지고 싶지만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것들 정말 어딘가 단단히 꼬여있거나 미쳐있는데 꼭 집어낼 수 없어 결국 이렇게 끌려 다니고 있다.
"하지만 자네라면 가능할 것일세.
출근은 인수인계 기간을 잡고 일주일 후로 하지.
중간계 정리는 잘하고 출근준비 하게나.
앞으로 잘해보세.
자네라면 노력만 조금하면 주신도 금방일 게야."
'카르마의 계약서'가 빛을 발하면서 완전 사라지고 상황종료를 알렸다.
떨어지는 별을 멈추어 놓은 상태에서 다시 원래 공간으로 날려 보내고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았다.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바빌로니아의 탑은 무너지지 않고 하늘에 있도다.'가 해제가 되었고 주신살의 창의 결계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갑자기 눈물이 울컥 솟아올랐다.
70년간 준비한 모든 패를 다 보여주고 얻은 것이 결국 실속 없는 최상급의 신 지위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엘프와 전쟁의 신인 고귀하고 위대한 흑마도사라고? 허헛-!"
백년간 수없이 싸운 원수였던 하이엘프의 신도 10억과 수많은 엘프를 돌보아야 하고, 전임 전쟁의 신을 죽였는데 전쟁의 신의 임무를 이어받아야 한다.
덤으로 고귀하고 위대한 흑마도사라는 웃기지도 않은 칭호까지 얻었다.
마신이 보면 한참을 비웃을 것이다.
카르마의 지속적인 하락이 사라지고 '극선'에 이른 카르마를 얻어 앞으로 인생이 잘 풀린다지만 그랑조아도 '극선'인 최상급신인데 단 한 번의 실수에 적에게 인질로 넘겨졌다.
그런 이해 못할 신계에 최상위 직위로 일주일 후에 출근하란다.
중간계 정리 잘 하라 말하고 열심히 하면 주신이 될 거라고 격려까지 받았다.
돌이킬 수도 없는 게 이미 카르마의 계약서가 창조신에게 있고 인질인 그랑조아를 내가 소멸시키면 끔찍한 결과가 나를 덮칠 거다.
마신이 주신에 대해 말할 때 잘 들을 것을 그랬다.
'만약 그 놈하고 싸울 것이면 절대 말을 시키면 안 돼.
어떻게든 빨리 끝장을 내!
그 놈은 잔머리와 주둥이로 주신자리를 하는 놈이라고-!'
원한에 찬 모함이라 생각했는데 그 평가가 약과였다.
주신은 생각할 시간도 주면 안 되는 최고의 사기꾼이었다.
"설마 주신이 그럴 리가 했는데, 으득-! "
지금 내가 무슨 짓을 당해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안갈 정도이니 억울하고 분한 것이다.
"두고 보자-!
내가 당하기만 할 줄 아느냐?
다음에는 내가 이긴다."
정말 슬프게도 어딘가의 3류 악당이 된 기분이다.
========== 작품 후기 ==========
주신과의 카르마의 계약 결과
1. 그랑조아를 인질로 넘길 것
- 거의 만장일치로 가결되며 그랑조아는 신계를 위해 희생했고 나는 악당이 됨
2. 그랑조아에게 태어난 아기가 주신이 되기를 원할 경우 양도할 것.
- 주신은 신위전을 통해 가장 인기 있는 자가 선출되므로 양위대상이 아니라 무효
3. 나를 최상급신으로 올리고 중간계에 대한 신의 행사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할 것
- 원수인 엘프의 신이 되고 전쟁신의 역할까지 떠맡게 됨. 중간계 관리는 덤
4. 흑마법사들의 악행이 흑마도사에게 부과되는 것을 배제한다.
- 내가 마왕과 흑마법사들을 거의 척살하여 이미 별개로 부과 중이므로 무효.
결과 : 신계는 못 없애고 최상급 신의 역할을 맡기로 계약함.
원수 같은 여신을 하나 얻었지만 계약의 증거로 소멸도 못 시킴.
카르마는 '극선'이나 최고위신의 카르마는 단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을 잃기에 최선을 다해야 함.
결론 : 노예계약서에 서명한 것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