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 그를 잡아먹고 도망친 앙큼한 고양이. (1/100)


01. 그를 잡아먹고 도망친 앙큼한 고양이.
2022.08.03.


나른한 볕이 쏟아지는 오후.

잠에 취해 꾸벅거리던 세경은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세경 씨, 대표님이 부르셔.”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자, 문틈 사이에 몸을 반쯤 걸친 송 실장이 보였다.


“대표님이 저를요?”

세경은 졸음이 가시지 않은 눈을 비비며 그녀에게 물었다.


“응.”

“무슨 일로요?”

“글쎄. 그것까지는 잘…….”

말끝을 우물거린 송 실장이 세경의 시선을 피했다.

어딘지 모르게 난감해하는 눈치였다.

잠깐 졸고 있는 사이,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터진 걸까?

세경이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저 모르는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요?”

“으음, 아냐. 그런 건.”

송 실장이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하지만 말과 표정이 따로 놀아 딱히 신뢰는 가지 않았다.

그때 복도 반대편에서 송 실장을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금방 가겠다며 손을 흔들어 보인 그녀는 세경에게 얼른 대표실로 가보라 재촉한 뒤 자리를 떴다.


‘뭐지?’

세경은 멀어지는 송 실장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어쩐지 감이 좋지 않았다.

오늘 아침 알게 된 사실 때문일까. 지금 대표실을 가면 뭔가 큰일이 생길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일단 오늘은 자리를 피하고…….”

세경은 보고 있던 시나리오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막 회의실을 나가려던 찰나였다.

또롱!

맑은 소리를 내며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린 것은.


[사무실로 와. 물어볼 게 있어.]

진태조 대표의 메시지였다. 눈을 동그랗게 뜬 세경은 경계하는 미어캣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혹 가까운 곳에서 그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다행스럽게도 태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물어볼 거라니…….”

대체 뭘? 어떤 걸 물어보려는 거지?

세경이 불안한 듯 눈을 굴렸다. 의심 가는 일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건 이미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설마, 그 일로…….”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으나, 그녀는 이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일로 태조를 협박한 것도, 책임을 지라 난리를 피운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는 그날 일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있지 않나.

물론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는 듯, 저를 떠본 적은 있었지만……. 어쨌거나 그것도 무사히 넘어간 터였다.

그 후, 그 일에 대해 언급한 적도 없는데. 이제 와 진 대표가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내려고.


“일 때문이겠지. 그래, 일 때문일 거야.”

별일 아니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킨 세경이 진 대표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녀가 올 거란 말을 미리 들었는지, 김 비서가 어서 들어가라며 집무실 쪽을 손짓하고 있었다.


“후우.”

문 앞에 선 세경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똑똑, 문을 두드렸다.


“윤세경입니다.”

“들어와.”

문을 열자, 창가에 서 있는 태조가 뒤를 돌아보았다.

189㎝의 큰 키, 넓은 어깨와 탄탄한 몸에 밀착된 진회색 슈트 베스트.

매니지먼트와 콘텐츠 제작사의 대표를 맡고 있는 그는, 배우라 해도 될 만큼 매끈한 피부와 선명한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었다.

저 외모에 반해 고백을 한 여배우가 수두룩하다고 했던가.

물론 다 단칼에 차이긴 했지만.


“물어볼 게 있으시다고요.”

등 뒤로 문을 닫은 세경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 필터가 그의 입에 걸려 있었다.

태조는 멀찍이 서 있는 세경을 보다 물고 있던 담배를 빼 반으로 뚝 분질렀다.

그리고 두 동강 난 담배 필터를 쓰레기통에 던지고 책상 앞으로 걸어왔다.


“이거.”

“……?”

책상에 걸터앉은 태조가 세경 쪽으로 무언가를 쓱 밀어냈다.


“뭔지 알아?”

저게 뭔데.

세경이 인상을 썼다. 뭐가 보여야 안다 모른다 답이라도 하지.

태조가 말한 물건은 책상 위에 놓여 있어 세경이 서 있는 곳에선 잘 보이지 않았다.


“잘 안 보이는데…….”

세경의 말에 태조가 고개를 까닥거렸다. 이리 가까이 와서 보라는 듯이.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태조와 가까워질수록 그의 손가락 아래 눌린 긴 막대가 보였다.


“……!”

하마터면 제 가방을 뒤져볼 뻔했다.

저게 왜…… 저기에 있는 거지?

그 자리에 멈춰선 세경은 당혹한 표정을 감추고 태조를 올려다보았다.


“글쎄요. 저는 잘…….”

“임신테스트기라던데. 두 줄이면 임신이라고.”

무심히 대답한 태조가 임신테스트기를 들어 보였다. 막대기 중간엔 두 줄이 선명하게 그어져 있었다.


“그런가요? 저는 사용해 본 적이 없어서.”

“…….”

“근데 그걸 왜 저한테 보여주시는지…….”

일단 시치미부터 뗐다. 태조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세경이 재밌다는 듯 피식 웃었다.


“왜겠어. 이게 세경 씨 가방에서 나온 물건이니까 그렇지.”

“그건 제 물건이 아니에요. 거기에 제 이름이 쓰여 있는 것도 아니고. 왜 대표님이 그걸 제 거라 확신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오늘 오전 11시 38분, 엘리베이터 앞에서 송 실장하고 부딪쳤었지? 그때 가방을 떨어트리면서 안에 있던 물건들이 쏟아졌었고.”

발뺌하던 세경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아까 급하게 달려오던 송 실장과 부딪히며 가방을 떨어트리긴 했었다.

떨어진 물건을 다급히 주워 담긴 했는데……. 하필 저걸 놓쳐버렸던가.


“송 실장은 이게 세경 씨 가방에서 나온 거라고 했거든.”

“……”

“근데 본인 가방에서 나온 게 본인 게 아니라고 하면. 이건 대체 누구 걸까?”

묻고는 있지만, 태조는 이미 저 물건의 주인이 세경이라 확신하는 거 같았다.

그녀는 난감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무어라 변명은 해야겠는데, 하얗게 변한 머릿속은 그럴싸한 핑곗거리 하나 떠올리지 못했다.


“아니면 병원에서 확인부터 해야 하나? 세경 씨가 임신한 건지 아닌지.”

“아니요!”

병원이란 말에 질겁한 세경이 소리부터 질렀다. 쿵쿵 뛰는 심장에 더해, 등 뒤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쩌지…….

세경은 초조한 눈으로 태조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몇 달이 지나면 임신 사실은 숨길 수도 없을 거였다.

그렇다면 지금 임신 사실을 밝히고 아이 아버지의 존재를 숨기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저 임신테스트기가 아이 아버지의 정체를 알려주진 않을 테니.


“제거 맞아요. 그거.”

“상대는? 신 매니저는 세경 씨가 만나는 사람이 없다고 하던데. 몰래 연애라도 하고 있었나?”

“아니요.”

“그럼, 아이 아버지는 누군데?”

세경은 애꿎은 입술만 잘근거렸다.

차마 그 아이의 아버지가 눈앞에 있는 당신이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날은 세경에겐 충동적인 밤이었고, 태조에겐 기억에도 없는 밤이었다.

가뜩이나 자기 회사 소속 여배우와는 사적인 관계로 엮이는 걸 싫어하는 사람인데. 그날 일을 말했다간, 저를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고개를 숙인 세경의 입에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태조는 임신테스트기를 내려놓고 비스듬히 기댄 몸을 일으켰다.

그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세경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대, 대표님?”

탁. 소파에 막힌 몸이 갈 곳을 잃고 그대로 멈추었다.

태조가 쓱, 몸을 기울이자 세경의 얼굴 위로 짙은 그늘이 졌다.

마치 제게 드리워질 암울한 미래처럼.


“세경 씨, 내가 몇 주 전부터 찾고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

“이게 꿈인지, 실제인지 살짝 헷갈렸거든. 내가 그날 술을 많이 마신 데다 필름도 중간에 끊겨 버려서.”

아, 안 돼…….

태조의 말이 이어질수록 세경의 낯빛은 창백해졌다.

딱 집어 말하진 않았으나 그는 그날 일을 언급하고 있었다.

세경에겐 충동적이었고, 태조에겐 기억에 없는…….

아니, 기억하지 못해야 할 그 밤을.


“꿈이라고 생각해서 계속 무시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부터 조금씩 단편적인 장면들이 떠오르더라고. 그래서 그 조각들을 이어붙이니까, 하나의 그림이 그려지지 뭐야.”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바닥이 푹 꺼지는 느낌에 세경이 휘청거리자, 태조가 그녀의 허리를 받쳐 안았다.



“그날, 날 잡아먹고 도망친 앙큼한 고양이가 어디 있나 싶었는데.”

허리를 감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세경의 다리 사이로 그의 다리가 파고들어 온 순간.


“여기 있었네.”

세경의 귓가에 입술을 붙인 그가 뜨겁게 속삭였다.

***

한 달 전, S 호텔.

자정을 한참 넘긴 시각이었다.

출출함에 잠시 편의점이라도 갔다 올 겸, 밖으로 나온 세경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사람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세경아.”

“선배님…….”

말꼬리를 흐린 세경이 석주의 옆을 힐끗거렸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그의 옆에 함께 있었다.

술에 떡이 된 채로 늘어져 석주의 부축을 받고 있는 건, 그녀의 소속사 대표인 진태조였다.


“너 왜 여기……. 으, 아니 그전에 나 좀 도와줘라. 이 녀석 좀 먼저 눕혀야 할 거 같아. 거기 17층 좀 눌러줘.”

석주는 내리려던 세경을 도로 안으로 밀어 넣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얼결에 17층 버튼을 누른 세경은 석주의 반대편에 서서 태조를 부축했다.


“대표님은 왜 이렇게 취하셨어요?”

“아, 오늘 미국에서 OTT 플랫폼 대표가 찾아왔거든. 한국 지사장과 같이 식사하고 이야기하면서 술도 좀 마셨는데……. 우와, 거기도 주량이 장난 아니더라고. 양주를 몇 병이나 깐 건지. 내가 이 녀석이랑 알고 지낸 지도 꽤 됐지만 이렇게까지 취한 건 처음 본다니까.”

그 장난 아닌 술자리에 동석했는지, 석주가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땡, 어느새 17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맑은소리를 토해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석주는 태조를 들쳐 메고 예약한 방을 찾았다.

카드키를 꺼내려 손을 움직이자 어깨에 매달린 태조가 스르륵 미끄러졌다.

으악, 짧게 비명을 내지른 석주가 태조의 몸을 잡곤 세경에게 말했다.


“세경아, 여기 주머니에 카드키 좀.”

세경은 석주의 주머니에서 카드키를 꺼내 문을 열었다.

슬롯에 키를 꽂는 사이, 석주는 태조를 질질 끌고 가 침대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후아, 죽겠다.”

한여름도 아닌데 땀이 줄줄 흘렀다.

석주가 손부채질로 열을 식히자, 세경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땡큐. 아, 근데 넌 왜 여기에 있어?”

“저 지금 호텔에 머물고 있거든요.”

“호텔에? 집은 어쩌고?”

“전셋집 만기 되고, 새로 구매한 집은 지금 리모델링 중이라. 한 달이 붕 떠버렸어요.”

“아, 그럼 한 달 동안 호텔 생활하는 거야?”

“네. 어쩌다 보니.”

“불편하지 않아? 부모님 집이나 친구 집으로 가지.”

“어머니는 제주도에 있고, 친구 집에서 신세를 지기에는 제 생활이 불규칙하잖아요. 괜히 피해 주고 싶진 않았어요.”

“그래도 호텔보단 집이 낫지 않나? 식사나 옷은 어떻게 하고 있어?”

“식사는 대부분 바깥에서 먹고 들어오고, 옷은 세탁 서비스도 있으니까요. 필요한 물품들은 그때그때 사서 보충하고 있어요.”

“뭐, 그렇다면야.”

석주가 물을 마시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보다 늦은 시간에 미안하다. 어디 가려고 했던 거 같은데 내가 붙잡았네. 들어가 봐. 여긴 나한테 맡기고.”

“대표님은 괜찮으신 거예요? 숙취 해소 음료라도 사와야 할 것 같은데.”

“사 오면 뭐 해. 저 꼴이라 지금 먹지도 못하는데.”

여긴 신경 쓰지 말라며, 석주가 어서 가라 손을 내저었다.

세경은 침대에 쓰러진 태조를 바라보다 마지못해 몸을 돌렸다.


“그럼 전 가볼게요.”

“그래. 가 봐.”

허리에 손을 올린 석주가, 이제 어떻게 요놈을 처리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요란하게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에, 그가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어, 여보세요? 응. 나 조금 전 술자리가 끝나서……. 어? 진짜? 아, 조금만 기다려. 내가 바로 갈게.”

다급하게 전화를 끊은 석주가 고개를 돌렸다.


“……?”

그러다 딱, 나가려던 세경과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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