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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지가 먹을 건가 보지. (4/100)


04. 지가 먹을 건가 보지.
2022.08.13.


해장국으로 속을 풀고 왔는데도 머리는 여전히 지끈거렸다. 태조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스케줄을 확인했다.

전날 접대를 예상해 오전 일정을 비워둔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덕분에 3시에 있는 외부 미팅을 제외하면 당장 처리할 큰일은 없었다.


“지 감독은요? 오늘내일 중으로 한국에 들어온다고 했던 거 같은데.”

“아침에 연락해 봤는데, 스케줄이 유동적이라고 합니다. 감독님이 일주일 더 프랑스에 체류하실 예정이라고. 한국에 들어오는 대로, 바로 미팅 잡을 수 있게 준비하겠습니다.”

그러라 말한 태조가 나가보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보고를 마친 김 비서는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서 있었다.

태블릿을 든 태조가 더 할 말이 있냐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요, 더 보고할 거라도?”

“두통이 심하시면 약이라도 가져다드릴까요?”

“두통약이 숙취에도 도움이 되려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태조가 고개를 갸웃댔다. 김 비서는 어제의 스케줄을 상기하곤 나직하게 탄식했다.


“아, 그럼 숙취 해소제라도 사 오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그건 이미 받아서.”

태조가 책상 위에 둔 헛개차 음료를 흔들었다.


“조금 있으면 나아질 겁니다. 신경 쓰지 말고 일 보세요.”

“네. 그럼 다른 게 필요하시면 부르십시오.”

고개를 숙인 김 비서가 사무실을 나가자, 태조는 태블릿에서 다운받은 파일을 열어 서류를 훑어보았다.

올해부터 내후년까지 라인업으로 올라온 작품 목록이었다.

편성을 마치고, 이미 제작에 들어간 작품도 있지만, 그중 몇 개는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 각본 작업만 마치고 촬영에 들어가지 못한 것도 있었다.

태조는 미팅 때 제안할 작품을 몇 개 골라놓고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우현에게 전화를 걸어 해당 작품의 기획안과 시나리오를 챙겨오라 했다.


- 준비해서 30분 내로 올라갈게.

“그래.”

수화기를 내려놓은 태조가 책상에 올려 둔 음료수를 집어 들었다. 과음의 후폭풍인지 입안이 자꾸 마르는 느낌이었다.

그는 갈증이 나는 목을 축이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뻐근한 눈두덩을 문지른 그가 잠을 청했다.

우현이 올라오기 전까지, 잠시나마 피곤한 눈을 붙일 생각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깜깜했던 어둠 속에 마치 정지된 영상처럼 어떤 장면이 퍼뜩 떠올랐다 사라졌다.


“……!”

눈을 번쩍 뜬 태조가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내린 그는 손으로 제 목 아래를 더듬거렸다.

물에 젖은 셔츠를 누군가 벗겨주는 것 같았는데…….

손바닥에 닿은 옷은 젖기는커녕 바짝 말라 있었다.

뭐야? 꿈인가?

인상을 쓴 태조는 책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3분의 1 정도를 비운 음료수병과 태블릿 등을 차례로 훑은 그가 핸드폰을 들었다.

그는 잠금을 풀고 통화목록부터 뒤져보았다.

혹시라도 잠결에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거나 전화를 받은 건 아닌가 싶었는데, 문석주에게 문자가 온 걸 제외하면 따로 연락이 온 것도 없었다.


“귀신한테 홀린 것도 아니고.”

그게 아니면, 문석주가 제 셔츠를 벗긴 거라고?


“……소름 돋게.”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떤 태조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뭉툭한 무언가가 손끝에 걸렸다. 안에 있는 것을 꺼내자 호텔 침대에서 찾아낸 귀걸이 한쪽이 보였다.

태조는 범죄 현장에서 찾아낸 증거물처럼 귀걸이를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익숙한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고.

혹시 몰라 가져오긴 했지만, 기성품이라면 귀걸이의 주인을 찾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태조는 책상 위에 있는 금색 트레이에 귀걸이를 던져 놓았다. 곧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우현이 들어왔다.


“슬슬 내려가자.”

우현이 손에 든 봉투를 흔들며 어서 나오라 손짓했다.

재킷을 걸친 태조가 핸드폰을 손에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그러다 탕비실에서 음료를 채워 넣는 직원을 발견하고 걸음을 틀었다.


“우리 거기에 뭐 넣고 있어요?”

갑작스러운 대표의 등장에 물건을 정리하던 직원이 허둥거리며 대답했다.


“오렌지 주스랑 콜라, 사이다 같은 탄산음료 위주로 넣어두고 있습니다.”

“주스랑 탄산이라고.”

태조가 매끈한 턱을 매만졌다. 뒤따라온 우현이 갑자기 웬 참견인가 싶어 그를 힐끗거렸다.


“그러면 거기에 헛개차도 몇 개 사서 넣어둡시다.”

“예? 헛개차요?”

고개를 끄덕인 태조가 자리를 뜨자, 총무팀 직원이 의아한 눈으로 우현을 쳐다보았다.

옥수수수염차도 보리차도 아닌 헛개차라니. 대체 그걸 누가 먹느냐는 눈빛이었다.


“…….”

졸지에 시선을 받은 우혁이 눈을 굴렸다. 그러다 아침에 태조가 들고 있던 헛개수 음료를 떠올리곤 중얼거렸다.


“……지가 먹을 건가 보지.”

 

 

***

숍에서 메이크업을 마친 세경이 방송국 복도를 거닐었다. 오늘은 개봉을 앞둔 영화 홍보 차,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할 예정이었다.


“오늘 은교 씨가 못 나온다고 했지? 혹시 바뀐 게스트가 누군지 들었어?”

“글쎄요. 저도 작가님한테 연락을 못 받아서. 근데 주제가 ‘프렌즈’라는 말은 들었던 거 같아요.”

“프렌즈?”

세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오늘 예능 프로그램엔 세경과 같이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가 함께 나오려고 했었다.

하지만 촬영 중 다친 은교가 입원을 하는 바람에 출연이 취소되었고, 다른 사람을 대타로 내보내려 했지만, 촬영 날이 촉박해 다들 스케줄을 조정하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은교가 낫길 기다리자니, 예능 방송일이 영화 개봉일을 훌쩍 넘겨 홍보 효과가 반감될 것 같았다.

하여 논의 끝에 세경의 출연은 유지하되 다른 게스트 한 명을 예능 프로그램 팀에서 섭외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오늘 주제가 프렌즈라니. 고정 게스트의 친구를 부르려는 걸까? 아니면 제 친구를 부르는 걸까.


“이왕이면 내가 잘 아는 사람이면 좋겠는데.”

연락을 하고 지내는 사람 중에 오늘 자신과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다고 알려온 사람은 없었다.

영화 홍보팀에서도 누가 나온다 콕 집어 주지 않았고.

대기실로 향한 세경은 오늘 저와 같이 출연하는 게스트가 누군지 확인하려 했다.

그때였다. 세경의 대기실 옆쪽 문이 열리며 누군가 나온 것은.


“…….”

“…….”

마주한 두 사람의 시선이 불편하게 엉키었다. 어색한 대치 상황이 이어지던 중, 침묵하고 있던 세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안녕.”

짧고도 무덤덤한 인사였다.

새로운 게스트는 세경이 잘 아는 사람이었다.

친구라면 친구였지만, 베스트보다는 워스트 쪽에 가까운.

그녀는 지난 7년간 함께 활동했던 걸 그룹 멤버, 임주희였다.

***



“저기 좀 봐.”

촬영 중 잠시 쉬는 시간. 예능 ‘즐거운 토요일’의 고정 출연자인 기정이 세경의 곁으로 다가왔다.

기정은 턱 끝으로 반대쪽에 있는 주희를 가리켰다. 주희는 다른 출연자들 사이에 끼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말만 들었지. 눈앞에서 저러는 걸 보니까 소름이 끼친다, 야.”

기정은 조금 전 촬영을 떠올리곤 진저리를 쳤다.

카메라가 돌 때는 세경의 손까지 잡으며 세상 친한 척을 하더니, 카메라가 꺼지니까 안면몰수하는 게 아주 수준급이었다.

주희는 세경과 마주 보던 얼굴을 휙 돌리는 것도 모자라 입에 걸던 미소도 싹 거둬들였다.

그리고 잠시 쉬고 들어가겠다는 피디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저와 친분이 있는 출연자의 팔짱을 끼고 세경과 멀찍이 떨어졌다.

대놓고 세경과 같이 있긴 싫단 티를 팍팍 내고 있으니, 보고 있는 사람이 다 민망할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은교 대신 주희를 섭외한 작가는 세경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요즘 배우를 하겠다고 연기를 배운단 말은 들었는데. 아주 조만간 할리우드도 진출하겠어.”

“배우한대? 그건 또 몰랐네.”

비꼬는 기정의 말에도 세경은 심드렁했다.

얘는 기사도 안 보는 건가? 기정은 황당한 얼굴로 세경을 훑어보았다.


“너, 어디 다른 행성에 사세요? 야, 아무리 뒤끝이 별로였다 해도 그렇지. 그래도 한때 같은 그룹 멤버였는데, 이렇게 무심할 수가 있냐.”

“연락도 안 하고 지내는걸. 나도 정신이 없었고.”

“그래, 너 정신없이 바쁜 건 인정. 그런데 너넨 해체하고 서로 연락도 안 해?”

“유나하고는 하고 있어. 오늘도 만나기로 했고.”

“둘만? 주희는?”

“글쎄. 따로 연락했는지는 잘 모르겠네.”

생수병을 딴 세경이 목을 축였다. 그때 카메라 뒤쪽에서 회의를 하고 있던 작가 한 명이 잔뜩 주눅이 든 채로 다가왔다.


“저기, 세경 씨.”

“네?”

세경이 돌아보자, 주희 쪽을 힐끗거린 작가가 목소리를 낮췄다.


“미안해요. 미리 말해줬어야 했는데. 우린 당연히 두 사람이 사이가 좋을 줄 알고…….”

“아아.”

세경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부분의 아이돌 그룹이 그렇듯, 세경과 주희가 속했던 걸 그룹도 7년을 넘기지 못했다.

물론 최근엔 소속사가 바뀌어도 기정처럼 기존 멤버들이 함께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잘나가고 팬덤이 큰 그룹에 한정되는 일이었다.

드라마에 출연하며 세경이 인지도를 넓혀갔지만 유명해지는 건 배우인 윤세경 한정이었지, 그것이 그룹 활동 전반으론 미치진 못했다.

그러다 보니 멤버들 사이에 트러블이 생기는 일도 종종 발생했다. 그중 가장 불만이 많았던 건, 그룹 내 리더이면서 데뷔할 때 가장 먼저 주목을 받았던 임주희였다.

하지만 이것도 다 내부적인 사정일 뿐, 대외적인 사유는 계약 만료로 인한 해체였다.

멤버 간에 트러블이나 불화가 있었다는 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아주 잠깐, 임주희가 개인 SNS에 불만을 쏟아내긴 했지만, 주목을 받기 전에 지워버려 기사화되진 못했다.


“전 괜찮아요. 근데, 저쪽은 몰랐나요? 제가 나오는걸?”

“아니. 다 알고 있었어요. 처음부터 윤세경 씨가 게스트로 나오는데 주희 씨도 출연할 수 있냐 물었는걸. 저쪽도 괜찮다고 하기에 우린 당연히 사이가 좋은 줄 알았지.”

안 그랬으면 우리가 프렌즈라는 주제를 붙였겠냐고, 작가도 퍽 억울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래도 카메라 돌 땐 알아서 잘 맞춰주고 있으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마세요. 생각보다 녹화도 잘 된 거 같고. 대신 저희 영화 홍보 잘 되게 편집에 좀 신경 써 주시구요.”

“그건 걱정 마요. 세경 씨가 후반부에 춤 한번 춰주면 조회 수도 폭발할 거니까.”

은근슬쩍 부담을 준 작가가 세트 뒤쪽으로 사라졌다. 기정은 쿡쿡 웃으며 세경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 오랜만에 춤 좀 춰야겠다.”

“아, 맨정신에 흑역사를 박제하고 싶진 않은데.”

난감해하는 세경의 뒤로, 촬영을 다시 시작한다는 피디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


 
약 네 시간 정도의 후반부 촬영이 끝나고, 진이 빠진 세경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와, 역시 아이돌 출신이라 다르네.”

마무리 인사를 하는 와중, 다른 게스트가 세경을 칭찬하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작가들도 썸네일 하나 죽이는 걸로 건졌다고 좋아했지만, 세경은 딱 네 시간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기정의 손에 끌려 앞으로 나가 몇 번 몸을 흔들어 대긴 했는데…….

다시 자리로 돌아와 생각해 보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나중에 우리 소속사 사람들이며, 영화 관계자들도 모니터할 텐데.


“지금 당장 피디님한테 편집해 달라고 할까?”

“안 해줄걸. 너 춤춘 게 제일 압권이었어.”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건넨 기정이 축 처진 세경의 어깨를 두드렸다. 착잡한 한숨을 쉰 세경은 다가오는 스태프에게 마이크를 풀어 건넸다.


“뭐, 그래, 나 하나 망가지고 방송만 잘 터지면 좋지.”

될 대로 되라는 듯. 자포자기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세경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이쪽을 보고 있는 주희와 눈이 딱, 마주쳤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세경을 노려보는 주희의 눈에 불만이 가득했다.


“쟤는 또 왜 저래?”

세경의 어깨 위로 고개를 뺀 기정이 입을 샐쭉하게 내밀었다.

이유가 궁금한 건 세경도 마찬가지였다. 녹화 중에 제가 말실수라도 한 게 있었나?

곰곰이 떠올려봤지만 생각나는 건 없었다. 사실 춤추는 데 정신이 팔려 말을 걸 겨를이 없기도 했고.

그렇다고 인사를 안 하고 갈 수도 없어 세경은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수고했어.”

인사를 했지만, 대기실 앞에서 마주쳤을 때와 반응은 똑같았다.


“…….”

완벽한 무시였다. 세경이 막, 손을 거두려는 찰나, 주희가 한쪽 입술을 비틀었다.


“너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이건 또 무슨 소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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