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핥아먹고 싶게 달콤해서
(9/100)
09. 핥아먹고 싶게 달콤해서
(9/100)
09. 핥아먹고 싶게 달콤해서
2022.08.31.
“향수요? 네, 뿌리긴 했는데…….”
손목에 코를 댄 세경이 냄새를 맡았다. 독한 걸 싫어해 많이 뿌리지도 않았는데, 향이 별론가 싶었다.
“독한가요?”
“아니, 그건 아니고.”
독하긴커녕 옅게 풍겨오는 향기가 핥아먹고 싶게 달콤했다. 여자 향수 중에 이런 게 있었나? 뭐 사봤어야 알지.
“향이 좋아서. 어디 브랜드야?”
“브랜드 향수는 아니고요. 제가 향을 배합해 만든 거예요.”
“네가 직접?”
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난번 휴식차 남해에 내려갔을 때, 향수 공방에 들렀거든요.”
“공방에서 직접 만든 향수라고…….”
공방에서 직접 만들었다면, 하나밖에 없는 향수가 아닌가?
시간이 지나 긴가민가 싶었지만, 그때 호텔에서 맡았던 향기가 이것과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혹시 지금 갖고 있어?”
“향수요? 아뇨, 따로 가지고 오진 않았는데…….”
“…….”
“왜요? 마음에 드세요?”
“응. 좋은데.”
세경이 맞붙은 입술에 힘을 주었다.
향이 좋다는 말이겠지. 주어를 빼먹는 바람에 염치없는 심장이 두근거릴 뻔했다.
“대표님이 직접 쓰실 건 아닐 테고. 혹시 향이 마음에 드시면 디퓨저로 만들어 드릴까요?”
“똑같이 만들 수 있어?”
“네. 처음 만들 때 배합표를 작성해 뒀거든요. 공방에 전화하면 그쪽에서 만들어서 택배로 보내준다고 했어요.”
“주문하면, 지금 세경 씨가 뿌린 향수랑 똑같은 향이 나오나?”
“사람이 하는 거니까, 약간의 오차는 있을 수도 있겠죠? 그래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제가 배합표를 엉망으로 작성한 게 아니라면.”
“시중에 비슷한 향수는 없어?”
“비슷한 향수라…….”
태조가 눈을 가늘인 채 세경을 내려다보았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겠죠. 저는 잘 모르겠지만. 아주 독특한 향도 아니잖아요.”
“독특한 게 아냐?”
“네. 배합한 오일 중엔 베르가못이나 시트러스 같은 것도 있었는걸요.”
시트지인지 시트러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게 그렇게 흔해 빠진 거였나? 자신은 그때 처음 맡아 본 것 같은데.
“대표님 것도 주문해 드릴까요?”
“일부러 그럴 필요는 없고.”
“일부러는 아니에요. 저도 때마침 향수가 다 떨어졌거든요. 대표님이 원하시면 디퓨저로 하나 더 주문하고요.”
디퓨저라…….
태조가 잠시 뜸을 들였다.
흔해 빠진 향이라는데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있나? 내일 당장 백화점 향수 코너에 가서 비슷한 향이 있는지 찾아봐도 될 일인데.
“해줘. 이왕이면 향수도 같이.”
하지만 입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과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향수도요?”
세경이 확인차 묻자 태조가 고개를 한번 주억거렸다.
“여자분께 선물이라도 하시려고요?”
“아, 남이 쓰는 건 싫은가? 흔하다곤 해도 본인이 만든 하나뿐인 거니.”
“그건 아니에요. 그냥…… 받으시는 분도 좋아하실까 싶어서요.”
누굴 주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저 디퓨저에서 풍기는 향과 세경이 가진 향수의 향이 다를까 하는 우려에서였다.
태조는 어딘지 모르게 시무룩해 보이는 세경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냥 싫으면 싫다고 하지. 저런 얼굴을 하고 핑계를 대긴.
“농담이야. 줄 사람이 어딨어. 내가 가지고 있을 거야. 뭐, 좀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확인이요?”
제 향수로 뭘 확인한다는 거지?
갑자기 저런 말을 하는 건, 그 전에 어디선가 맡아 본 적이 있다는 뜻일 텐데.
“…….”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싸악, 훑고 지나갔다. 세경은 설마 싶은 마음에 태조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주문하면 언제쯤 도착하는데?”
“오늘 중에 연락하면 2-3일 정도 걸리지 않을까 싶어요.”
“예상보단 빠르네. 아, 잠깐…….”
태조가 손을 뻗자 세경이 몸을 움찔거렸다.
뭔가 싶어 고개를 내리자 목덜미를 스친 손이 하얀 깃털 같은 것을 떼어내고 있었다.
“어디서 붙어왔나 봐.”
태조가 손에 든 깃털을 빙글 돌렸다. 그때 사무실에서 다이어리를 챙겨 나온 제훈이 탕비실 문을 열었다.
“누나, 뭐 드시고 계셨어요?”
태조에게 꾸벅 인사를 한 제훈이 세경을 불렀다.
“어. 다이어리는 다 챙겼어?”
“네. 얼른 가요. 촬영 늦겠어요.”
“그래.”
인사를 할 겸 태조를 보자, 그가 같이 나가자는 듯 턱을 까닥댔다.
승강기 앞에 선 태조가 하강 버튼을 눌렸다. 때마침 올라오던 엘리베이터가 맑은 소리를 내며 입을 쩍 벌렸다.
“가 봐.”
세경이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태조가 손을 흔들었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보이는 말간 눈동자에 그의 시선이 박혔다.
“…….”
태조는 하강하는 엘리베이터를 일별하고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냈다.
움켜쥔 주먹을 펴자 조금 전 세경의 코트에서 떼어낸 깃털이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이상하네, 이거.”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그가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세경의 목에 제 손이 닿는 순간, 꿈속의 장면이 겹치는 듯 보였는데.
“이젠 눈 뜨고도 꿈을 꾸나.”
미간을 구긴 태조가 텅 빈 손을 쥐었다 폈다.
이 정도면 병이지. 비스듬히 입술을 끌어올린 그가 옥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
새벽부터 시작된 촬영으로 스튜디오 안이 북적거렸다. 세경은 어딘지 모르게 어수선해 보이는 분장실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사무실을 나오면서, 세경은 지난번 남해에서 찾아간 공방 연락처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공방의 주인은 세경이 왔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소만 알려주면 오늘 내로 향수와 디퓨저를 만들어 보내주겠다고 하였다.
“호텔 주소를 보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세경은 인터넷으로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을 검색했다. 메모지에 주소를 옮겨 적고 있자, 메이크업을 담당하는 채 실장이 들어왔다.
“뭐 해, 세경 씨?”
“주소 좀 적고 있어요.”
“주소?”
채 실장이 세경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핸드폰과 메모지를 번갈아 본 그녀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갑자기 웬 호텔 주소?”
“물건을 받을 게 있는데, 제가 지금 호텔에 묵고 있어서요.”
“아, 집 리모델링한다고 했지? 뭘 배달시키려고?”
“향수랑 디퓨저요. 예전에 공방에서 만들었거든요. 전에 만든 건 다 써서, 다시 주문하려고요.”
“그 향이 꽤 마음에 들었나 봐?”
“저한테는 잘 맞더라고요. 오늘 뿌리고 왔는데 한번 맡아 보실래요?”
세경이 손목을 내밀자 채 실장이 코를 킁킁거렸다.
“어때요?”
“달짝지근하네. 확 깨물어주고 싶게.”
“향은 좋아요?”
“응. 좋아. 내 취향은 아니지만.”
코끝을 찡긋거린 채 실장이 화장품을 정리했다. 세경이 주소를 찍어 보내자, 채 실장은 토너를 흠뻑 묻힌 솜으로 세경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채 실장님, 혹시 이거랑 비슷한 향을 가진 향수 알고 계세요?”
“글쎄. 나는 그런 달콤한 향하곤 안 어울려서.”
채 실장이 파운데이션을 쭉, 짜며 대답했다.
“그건 왜 물어?”
“아니. 향이 좋다고 해서……. 주문한 거 다 쓰면 앞으론 비슷한 거라도 사서 쓸까 하고요.”
“향이 좋대? 으음, 누가 좋다고 그랬을까아?”
히죽 웃는 채 실장의 얼굴에 장난기가 어렸다.
“남자야? 자기 애인 생겼어?”
“애인은 무슨. 그런 거 없어요.”
“세경 씨 눈이 높나? 왜 연애를 안 하지? 주변에서 대시도 꽤 받았을 거 같은데.”
물론 여러 번 받긴 했었다. 주변에서 세경을 만나고 싶다며, 소개팅을 권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고.
소속사에서도 연애를 딱히 금지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그런 부분에서 별로 터치하는 것은 없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만 그 장벽이 높다는 거였다.
“이래저래 일이 바빠서요.”
“그래서 연애는 아예 안 할 생각이야?”
“아예 안 하는 건 아니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하지 않을까요?”
“세경 씨 어떤 스타일 좋아하는데? 우리 숍에 오는 사람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내가 다리 좀 놔 줄까?”
바쁘게 손을 놀리면서도 채 실장은 제 숍에 오는 남자 연예인의 이름을 줄줄 읊었다.
아이돌 가수와 요즘 한창 뜨는 남자 배우, 그리고 운동선수까지.
다들 내로라할 만큼 인기 있는 사람이었지만, 세경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와, 눈 하나 까딱 안 하는 거 봐. 세경 씨 눈 높네.”
톡톡, 분을 바른 채 실장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양손 가득 짐을 든 잡지사 직원이 분장실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채 실장님. 세경 씨 메이크업 다 끝났나요?”
“네.”
“그럼 옷은 이걸로. 구두랑 액세서리는 여기에 둘 테니 갈아입고 나오세요.”
직원이 옷을 두고 나가자, 세경이 탈의실로 들어갔다. 행거에 걸려 있을 땐 몰랐는데 옷은 위쪽이 깊게 파여 쇄골을 드러내고 있었다.
의상을 다 갈아입은 세경이 다시 의자에 앉자, 그녀를 내려다보는 채 실장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왜 그러세요?”
문 쪽을 힐끗거린 그녀가 세경의 어깨 위로 몸을 낮췄다.
“세경 씨, 애인 없는 거 맞지?”
아, 목에 있는 흔적 때문에 이러나.
“이거 때문에 그러시는 거예요?”
세경이 목에 희미하게 남은 자국을 매만졌다. 자는 중에 좀 긁은 모양이라고, 어설픈 변명을 대자 채 실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거 때문이 아니라.”
화장대 위를 살피던 그녀가 커다란 거울 하나를 들었다.
그걸로 등을 비추자, 앞에 있는 거울을 통해 목보다 더 선명한 자국들이 울긋불긋 나 있는 게 보였다.
“이건 긁은 걸로 난 상처가 아닌데.”
“…….”
“그 호텔에 큰 벌레라도 있는 거야?”
하얗게 질린 세경의 얼굴이 이내 곧 빨갛게 달아올랐다.
벌레니 뭐니, 엉뚱한 말은 하고 있지만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실장은 이미 그게 뭔지 눈치를 깐 상태였다.
“그거…….”
곧 촬영이 시작될 텐데.
세경은 거울 너머로 저를 보는 채 실장과 눈을 맞췄다. 그리고 간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떻게 숨길 수 없을까요?”
***
화보 촬영과 인터뷰를 마치자, 날은 금세 어두워졌다.
차에 오른 세경은 지친 얼굴을 두 손에 파묻었다. 채 실장의 도움으로 촬영은 무사히 마쳤지만,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진짜…….”
눈이 뒤에 달린 것도 아니니 보질 못했지.
목만 깨문 줄 알았더니, 태조는 제 흔적을 그녀의 몸 곳곳에 남겨 놓은 모양이었다.
“…….”
세경은 조용히 그날 일을 더듬어갔다.
고통과 열락이 혼재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밤.
술에 취하진 않아도, 분위기에 취해, 그에게 안겨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건 세경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미처 등의 상태까지 헤아리진 못했다. 등 뒤가 따끔거리긴 했어도, 아픈 곳이 어디 거기 하나뿐이었던가.
탁.
문이 열리는 소리에 세경이 고개를 들었다. 스튜디오에서 짐을 챙겨 온 제훈이 운전석에 오르고 있었다.
“오늘 수고하셨어요, 누나.”
“너도. 고생했어.”
“저녁 드시고 가실래요? 아까 제가 사 온 수프 한 컵 마시고 아무것도 안 드셨죠?”
지금 먹는 게 문젠가. 배고픔은 오늘 겪은 수치심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다.
“넌 뭐 먹었어? 안에 케이터링 음식도 있었는데.”
“빵 몇 조각 집어 먹었어요. 호텔로 바로 들어가실 거면 뭐 좀 먹고 들어가실래요? 저녁 먹기 애매하잖아요. 요 근처에 칼국수 집 맛있는 데가 있대요. 생각 없으시면, 이거라도 가져가시고요.”
제훈이 커피 전문점 로고가 박힌 종이 백을 내밀었다. 아까 수프와 함께 사 왔던 크루아상 샌드위치였다.
“칼국숫집 가자. 어차피 너도 집에 들어가면 차려 먹기 귀찮잖아.”
“그럼 전 좋죠. 법카로 한 끼 더 때우니까.”
신이 난 제훈이 차 시동을 걸었다. 세경은 매니저가 준 종이 백을 들고 시트에 몸을 기댔다.
차가 골목을 빠져나가자 세경은 멀뚱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보다 아까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던 거 같은데…….
기억을 더듬어가던 세경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건전하게 오늘 한 대화를 떠올리려는데.
머릿속은 자꾸 몸으로 한 대화를 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