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그를 덮치는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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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를 덮치는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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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를 덮치는 향
2022.09.03.
청담동의 고급 한식당 안.
태조는 싱싱한 붉은 빛을 띠는 육회를 한 점 집어 입에 넣었다. 천천히 씹자 부드러운 육질과 함께 고소한 참기름이 혀끝에 맴돌았다.
“이거 진짜 제작 들어가는 거야?”
지 감독이 반신반의한 얼굴로 물었다. 식탁에 차려놓은 맛깔스러운 음식은 다 뒷전이었다.
프랑스에서 돌아오자마자 짐도 풀지 않고 잡은 미팅이었다.
좋은 소식이 있다기에 열 일 제쳐두고 달려왔더니, 태조가 해준 이야기는 그가 예상했던 것을 뛰어넘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OTT 플랫폼에 그의 작품을 독점적으로 유통시키겠단다. 투자까지 빵빵하게 받아서.
“네. 물론 조건은 있지만.”
태조는 냅킨으로 입가를 누르곤 고개를 끄덕였다. 지 감독은 비장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무슨 조건?”
“감독님이 제게 주신 시나리오는 영화용이잖아요. 그쪽에선 10부작 드라마로 만들었으면 한답니다.”
“10부작 드라마…….”
지 감독이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러닝타임을 맞추려 각본 수정을 한 게 수백 번이었다.
삭제한 이야기를 모아 풀면 다음 시리즈를 제작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시간이 늘어나 내용을 더 풍부하게 담을 수 있다면 오히려 그에겐 더 환영할 일이었다.
질릴 만큼 본 각본을 또 수정하는 게 고역이긴 하겠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늘어나는 분량만큼 더 들어가는 게 있었으니…….
“그래서 제작비는?”
만족스러운 퀄리티를 위해 투자자를 찾아 나섰지만, 그쪽의 이익과 지 감독의 욕심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번번이 실패를 한 터였다.
시나리오를 들고 투자사를 돌았을 때, 그는 영화판에서도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시나리오만 보고 선뜻 투자를 하겠다 나서는 이도 없었다.
자신이 유명해지면 언젠가 기회가 오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이 시나리오를 묵혀둔 게 무려 7년이었다.
“그쪽에서 230억, 저희가 100억. 편당 33억 잡고 있습니다.”
“편당 33억?”
지 감독의 눈이 크게 뜨였다. 예상보다 큰 액수였다. 국내 드라마 제작 상황을 고려했을 때 많아야 편당 7~8억 정도를 생각했는데.
“농담이지?”
“저 비싼 술 먹고 농담 안 합니다.”
“비싼 술?”
우리 지금 밥 먹고 있지 않나?
지 감독이 테이블을 힐끔거리자, 태조의 옆에서 바쁘게 음식을 욱여넣던 우현이 말했다.
“진 대표가 그 플랫폼 대표랑 만났을 때, 아주 술이 떡이 되도록 마셨거든요. 그래서 필름이 뚝 끊겼답니다.”
우현이 가위질하듯 손가락 두 개를 벌렸다 붙이길 반복했다.
저번에 보니 술도 꽤 센 거 같던데. 지 감독이 의외라는 듯 태조를 쳐다보았다.
“그랬어?”
“예. 기억이 좀 날아갔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찾는 중이고요.”
“날아간 기억을 뭘 어떻게 찾아.”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선지, 요즘 진 대표가 멍하게 있을 때가 많아요.”
우현이 얄밉게 덧붙이자, 태조가 쓸데없는 소릴 한다는 듯 그를 째려보았다.
“그럼 이건 언제 촬영 들어가?”
“그건 감독님한테 달렸죠. 다시 각색하는 데 시간 좀 걸릴 것 아닙니까. 그사이 캐스팅하고 예산 짜고 세트 세우고. 그리고 촬영 시작하시면 되죠.”
“혹시 예산 부족하면 더 늘릴 수도 있나?”
“뭐, 어디 섬 하나 장기 대여하고 찍으시게요?”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각색하다 보면 또 다른 스토리가 생각날 수도 있잖아.”
지 감독이 민망한 웃음을 흘리자, 태조가 피식 웃었다.
“그럼 제가 또 양주 한번 까보죠. 하긴 외국 작품들은 편당 제작비가 100억 넘는 것도 있던데.”
“그거참, 말만으로도 든든하네.”
“빈말 아닌데. 그만큼 제가 지 감독님 작품에 기대가 큽니다. 그보다 음식 식습니다. 어서 밥부터 드세요.”
식사부터 하라는 태조의 말에 지 감독이 수저를 들었다. 그는 보여주는 족족 퇴짜를 맞았던 제 시나리오를 좋게 봐준 태조가 고마웠다.
“아, 근데 감독님 그 작품 출연할 배우는 좀 생각해 두셨어요?”
우현의 물음에 갈비탕을 퍼먹던 지 감독이 눈을 굴렸다.
“몇몇은 염두에 둔 사람이 있지. 아, 그러고 보니 윤세경 씨가 진 대표네 회사 소속 배우지?”
“네. 윤세경 씨도 있습니까? 감독님 캐스팅 순위에?”
“어어. 무슨 작품이었더라? 내가 세경 씨 나온 영화를 보고, 딱 그 이미지가 떠올랐거든.”
태조는 지 감독이 쓴 사냥(hunting)의 시나리오와 세경의 얼굴을 떠올렸다.
가제이긴 하나, 사냥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분위기처럼 그 작품은 피와 살점이 튀는 잔인한 장면들이 더러 있었다.
감독이 보는 시선은 뭔가 다른가?
벌레 한 마리 못 죽일 듯 순한 양의 얼굴을 한 윤세경과 피 튀기는 살벌한 분위기라니.
윤세경과 피라고 하면, 추운 날 달달 떨며 코피를 쏟는 것밖엔 상상이 안 가는데.
“그럼 감독님 그 작품에 윤세경 씨 쓰려고요?”
100억 투자하는 거 괜찮은 건가?
태조는 심각한데, 제 돈 나가는 게 아니라 그런지 우현은 옆에서 신나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1순위는 그런데. 세경 씨가 하겠다고 해야지.”
“도대체 어떤 걸 보신 겁니까? 저는 이미지가 안 그려지는데.”
“정확히 기억이 안 나서. 나중에 생각나면 알려줄게.”
혼자 신난 지 감독이 열심히 수저를 놀렸다.
“여기 음식 맛있네.”
“그쵸? 여기 육회 비빔밥도 맛있다던데. 추가로 더 시킬까요?”
뒤늦게 입맛이 돌았는지, 지 감독의 사족에 우현이 맞장구를 치며 추가로 음식을 주문했다.
그렇게 푸짐한 식사를 마친 뒤, 지 감독을 배웅한 태조는 우현이 모는 차를 타고 회사로 돌아왔다.
“오셨습니까.”
사무실에 도착하자 인사를 한 김 비서가 태조에게 작은 쇼핑백 하나를 내밀었다.
“뭡니까, 이건?”
“아까 윤세경 씨가 오셔서 두고 가신 겁니다. 대표님께 드리는 거라고 전해 달라 하셨고요.”
“나한테요?”
태조가 쇼핑백을 벌려 그 안에 있는 물건을 확인했다. 세경에게 부탁했던 향수와 디퓨저였다.
“아아, 이거. 고마워요.”
그가 쇼핑백을 든 손을 흔들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재킷을 벗은 태조가 상자 안에서 디퓨저를 꺼내 향을 맡았다.
“비슷한가?”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기억에 의존하다 보니 확실한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저 당시 맡았던 향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어림짐작할 뿐.
태조는 작은 상자에 담긴 향수도 꺼내 들었다. 칙칙, 허공에 뿌리자 달콤한 향이 코끝에 스며들었다.
“흠. 조금 다른 거 같은데…….”
의자에 몸을 기댄 그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비슷한 듯 다르게 느껴지는 건, 배합이 달라 그런 걸까. 아님 세경의 체향이 섞여 있는 거라 그런 걸까.
“…….”
공기 중에 부유하는 향이 옅어지자 그가 칙, 다시 향수를 뿌렸다.
저를 덮치는 향에 태조가 눈을 감았다.
예민한 후각이 달큼한 향에 젖어 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하나만은 확실히 알겠다.
이렇게 달큼한 향기를 풍기는 건.
제 주변에 윤세경 하나뿐이라는 것을.
***
방송국 대기실 안.
화장대 앞에 앉은 세경은 미리 받은 인터뷰 질문지를 만지작거렸다.
답변은 어제부터 숙지해 두었지만,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다시 한번 살펴보고 있던 차였다.
하지만 세경의 집중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잠시 망각하고 있던 기억 하나가 스멀스멀 올라온 탓이었다.
“대체 그 향수로 뭘 한다는 걸까?”
오늘 아침, 호텔 직원이 그녀 앞으로 도착한 택배를 가져다주었다. 지난번 공방에 주문한 향수와 디퓨저였다.
진 대표에게 줄 것을 따로 챙기면서, 세경은 그와 했던 대화를 다시금 되새겨 보았다.
그가 쓸 일도 없을 향수를 주문하기에 여자에게 선물할 거냐 물었더니, 남이 쓰는 건 싫은 거냐고 되물었었지.
물론 곧장 농담이라고 덧붙이긴 했지만.
그러면서 향수는 태조가 가지고 있을 거라 했다. 확인할 게 있다면서.
하지만 제 향수로 확인할 만한 게 뭐가 있지?
“설마…….”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와 함께했던 밤을 떠올렸지만. 세경은 이내 그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게 언제 적 일인데. 같이 잔 걸 기억도 못 하는 사람이 제 향수 냄새를 기억이나 할까 싶었다.
“어쩌면 누군가에 정말 선물하려는 걸지도 모르지.”
자신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태조는 그 향이 좋다고 했다.
그렇다면, 혹시 자기 애인에게 그 향수를 권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아니면 그와 비슷한 향수를 사서 줄 수도 있는 거고.
그래서 비교차 제게 향수를 같이 주문해 달라 그런 건지도 모른다. 뒤늦게 농담이라고 한 건, 자신이 싫어할까 둘러댄 말이었을 테고.
사실 누군가에게 선물을 하고 싶어 여자 향수를 주문했다는 게, 가장 납득할 만한 이유이기도 했다.
“직접 줬으면 모른 척 다시 물어보기라도 했을 텐데.”
조금은 궁금했다. 진 대표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여자일지.
분명 예쁘기만 한 사람은 아닐 거였다. 그 사람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여배우들이 고백해도 거절한 사람이니까.
“석주 선배는 알고 계시겠지.”
문석주는 진 엔터 소속의 첫 번째 배우로 창립 멤버라고 불릴 만큼 진 대표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러니 그에게 여자가 생기면 석주가 모르지는 않을 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직접 물을 수는 없지.”
진 대표와 강 이사에게 곰이라고 놀림을 받아도, 저렇게 대놓고 물으면 둔한 곰도 그녀의 마음을 눈치챌 거였다.
똑똑.
“네.”
노크 소리에 세경이 뒤를 돌아보았다. 문을 연 제훈이 안으로 들어오자, 그 뒤로 유나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세경아!”
유나가 손을 흔들며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신혼여행지에서 사 온 선물을 주고 싶다기에 오라고 했더니, 양손에 짐이 한가득이었다.
“뭘 이렇게 많이 갖고 왔어? 신혼여행은 잘 갔다 왔고?”
“그럼. 아주 좋았지.”
두 손으로 뺨을 감싼 유나가 몸을 배배 꼬았다.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으나, 옆에 있는 숫총각을 배려해서인지 그녀는 제훈을 힐끗거리곤 말을 아꼈다.
“아, 이건 선물. 일단 유명하다고 하는 건 다 사 왔어. 얘는 마카다미아 초콜릿, 이건 코나커피. 요건 레후아 꿀. 이것도 꿀인데, 얘는 병이 귀여워서 샀어.”
유나가 곰돌이 모양의 꿀 병을 흔들었다. 그리고 매니저님 거라며 제훈에게도 초콜릿 상자를 하나 건네주었다.
“어? 저도 주시는 거예요?”
“그럼요. 연예인이 혼자 다니나? 옆에 있는 사람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어련히 잘해 주시겠지만, 그래도 우리 세경이 잘 부탁드려요.”
“제가 뭘……. 아무튼 잘 먹겠습니다. 누님은 걱정 마십시오. 제가 뼈를 갈아가며 모실 겁니다.”
제훈의 너스레에 유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대기실을 찾아온 스태프가 곧 촬영이 시작될 거라고 알려왔다.
“어쩌지? 시간이 얼마 없어서. 유나 넌 어떻게 할래? 여기서 잠깐 기다릴래?”
“아니야. 나 너한테 선물만 주고 금방 가려고 했어. 또 만날 사람도 있거든.”
저는 신경쓰지 말라며 유나가 손을 내저었다. 세경은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해주겠다며 같이 대기실을 나섰다.
그렇게 두 사람이 복도를 걷고 있을 때였다.
“어머, 세경 씨.”
반대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세경이 고개를 들었다.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가 고개를 꾸벅거렸다.
“안녕하세요, 임 피디님.”
“응. 오랜만이야. 요즘 세경 씨 나오는 거 잘 보고 있어. 어, 유나 씨도 오랜만에 보네?”
임 피디가 유나를 향해 아는 척을 했다. 그녀는 두 사람이 가수 활동을 하던 시절, 음악 방송을 담당하던 피디였다.
“네. 그간 잘 지내셨어요?”
“나야 뭐. 별다를 건 없지.”
“지금도 음악프로그램 맡고 계세요?”
“아니. 지금은 다른 거 하고 있어. 근데, 유나 씨는 진짜 오랜만에 보는 거 같다. 3년? 4년 됐나? 요즘 통 안 보이는 거 같던데. 다시 활동 시작하는 거야?”
“아니요. 오늘은 세경이 만나러 왔어요. 저 결혼했거든요. 하와이 신혼여행 갔다가 선물을 사 와서, 그거 주려고요. 아, 피디님도 이거 드릴게요. 마카다미아 초콜릿.”
“아, 고마워. 근데 유나 씨 결혼했구나. 으음.”
임 피디가 초콜릿 상자로 제 어깨를 툭툭 두드리더니 생각에 잠겼다.
“유나 씨, 요즘 뭐 하고 지내?”
“저요? 저 요가 강사로 활동하면서 가끔 너튜브 영상도 올리고 있어요.”
“그래? 방송 활동은 다시 할 생각 없어?”
“네? 방송이요?”
그건 왜 물으시지?
유나가 커다란 눈을 껌뻑거리다 세경을 쳐다보았다. 세경은 솔직히 말하라는 듯 고개를 까닥거렸다.
“없는 건 아니지만…….”
불러주는 데가 없기도 하고…….
유나가 말끝을 흐리자, 세경이 뒤늦게 기억났는지 짧은 탄성을 터트렸다.
“아, 임 피디님 지금 부부 동반 출연하는 예능 하시죠?”
“응. 그래서 말인데.”
고개를 끄덕인 임 피디가 유나를 쳐다보았다.
“유나 씨, 혹시 관심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