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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혹시 여자 있어요?
2022.09.07.



 
높은 담장 옆에 차를 세운 태조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철옹성 같은 저택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지나가는 차도 얼마 되지 않아 거리는 고요하게 잠들어 있었다.

삐이.

초인종을 누르자, 방문객을 확인한 안쪽에서 문을 열어주었다. 태조는 돌계단을 올라 2층 같은 1층에 들어섰다.

징검다리처럼 박힌 현무암 판석을 밟고 정원을 가로지르자, 그와 비슷한 얼굴을 한 남자가 태조를 맞이했다.


“왔어?”

“어. 일찍 왔네.”

“본가 오는 거니까. 아버지랑 같이 퇴근했어.”

태조를 마중 나온 건, 그와 두 살 터울의 형 윤조였다.

현재 태조가 맡고 있는 진 엔터테인먼트의 초기 대표이기도 했던 그는, 6년 전 회사를 태조에게 넘기고 아버지가 대표로 있는 JK 그룹으로 들어갔다.

JK는 식품과 유통, 미디어 사업을 중점적으로 펼치고 있었다.

윤조가 진 엔터를 설립한 것도 미디어 사업에 관심이 있어서였다.

재능 있는 배우를 발굴해 해외에 먹힐만한 K-콘텐츠를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궁극적인 목표였지만…….

지금은 그 목표를 접고, 푸드 쪽 사업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형수님은? 같이 왔어?”

“어. 지금 다 너 오는 것만 기다리고 있다.”

윤조가 어서 가자는 듯, 태조의 등을 두드렸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맛있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형을 따라 다이닝 룸으로 간 태조는 가족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저 왔어요. 아버지.”

“일찍 좀 오지. 왜 매번 너만 이렇게 늦어?”

“쟤도 사업하는 앤데. 어떻게 시간을 매번 맞춰요. 앉으렴. 딱 좋을 때 왔다. 이제 막 식사하려고 했어.”

태조 대신 대답한 마혜영 여사가 어서 앉으라 손짓했다. 그는 모친의 옆자리로 다가가 건너편에 있는 예령에게 고개를 꾸벅거렸다.


“오랜만이에요, 형수님. 그간 잘 지내셨죠?”

“그럼요. 도련님도 별일 없으시죠?”

방긋 웃은 예령이 예의상 되물었다. 바로 별일 없단 소리를 들을 줄 알았는데, 태조는 의외로 뜸을 들였다.


“음, 별일…….”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없었던 거 같기도 하고.

태조가 수저를 들곤 고개를 갸웃거리자, 마 여사가 눈을 찌푸렸다.


“대답을 왜 하다 말아?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니?”

“아, 그건 아니고요. 좋은 일은 하나 있네요.”

“좋은 일? 뭔데?”

두툼한 생선살을 발라 입에 넣은 윤조가 태조에게 물었다.


“미국 OTT 플랫폼사 알지? M으로 시작하는. 거기서 우리가 만드는 드라마에 투자를 하기로 했어.”

“진짜? 잘됐네. 투자는 얼마나 받아?”

“230억 정도. 아, 형도 봤지? 지 감독님 시나리오. 그거 제작하기로 했어.”

“오, 그거 드디어 하는구나.”

윤조가 탄성을 흘리자 예령이 그게 뭐냐고 옆에서 캐물었다.

아들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진 회장이 태조에게 말했다.


“그래서, 태조 넌 언제까지 거기 있을 거냐? 너도 형처럼 회사로 들어와야지.”

“형 들어갔으면 됐지, 왜 저까지 불러들이려고 하세요?”

“그 능력 우리 회사에다 써먹으면 좀 좋아? 윤조가 푸드 쪽 맡았으니, 네가 미디어 쪽 맡으면 딱이겠구만.”

“전 아직 이쪽이 좋습니다. 제가 원하는 시나리오 받아서 제작에 참여하는 게 더 보람도 있고요.”

“JK 미디어에서도 드라마 제작은 하고 있지 않으냐.”

“제가 거기 들어가면, 제작에 참여합니까? 그보다 윗자리에 앉아 결재나 하고 있을 텐데.”

그렇지 않으냐는 듯 태조가 형을 쳐다보았다. 아버지의 눈치에 윤조가 그렇다 말은 못 하고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뭐, 그럼 회사는 나중에 들어온다 치고. 너 결혼은?”

아, 왜 또 질문이 이쪽으로 튀시나.


“저 밥 먹다 체하겠습니다, 아버지.”

불편한 질문이라는 듯 헛기침을 한 태조가 답을 피했다. 마 여사가 그만하라며 남편에게 눈치를 줬다.


“이이도 참. 그건 나중에 얘기해요. 안 그래도 예령이랑 내가 태조한테 어울릴만한 아가씨를 물색 중이니까.”

아니, 왜 제 취향은 묻지도 않고 찾고 계십니까?

눈가를 찌푸린 태조가 예령을 쳐다보았다.

진짜냐 묻는 눈빛에 그녀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

얹힐 것 같은 식사를 마치고, 2층으로 올라온 태조는 테라스에서 잠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결혼 이야기하시기 전에 도망가야지.”

후, 뱉어낸 숨에 하얀 연기가 흩어졌다. 태조는 마지막으로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곤 재떨이에 비벼껐다.

옷에 밴 냄새를 빼고 들어가려는데,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윤조의 옆에 매미처럼 찰싹 달라붙어 들어오는 예령이 보였다.


“배신자.”

“어머, 그거 나한테 하는 말?”

남편의 팔에 매달린 예령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태조가 그쪽 아니면 누구냐는 표정을 짓자, 예령이 꺄르르 웃었다.


“형수, 진짜 내 맞선 상대 찾아요?”

“며느리가 시어머니 말을 어길 수가 있어야지.”

어깨를 들썩거린 예령이 의자에 앉았다. 태조는 혹여 담배 냄새가 그녀에게 갈까 봐 난간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어기진 못해도 말릴 수는 있지 않나?”

“토끼가 어디 호랑이한테 쨉(jab)을 날려? 난 말리다 미움받기 싫은걸.”

예령이 한쪽 뺨을 감싸 쥐고 가녀린 척 입을 열었다.

태조는 기가 막혔다, 예령과 알고 지낸 지가 20년이었다.

법조계 집안의 막내딸인 그녀는 불의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할 정도로 정의감이 넘쳐흘렀다.

고등학교 땐 따돌림을 당하는 친구와 같이 놀다, 자신까지 괴롭힘을 당하자 학교를 한바탕 뒤집어 놓기도 했다.

선생님이 학생들이 따돌림당하는 걸 알고도 방관한다며 경찰을 부르고, 교육청에 전화를 한 뒤, 부모님에게 알려 자신을 괴롭힌 이들은 정학을 받게 만들었다.

아무튼, 그 후로 학교에서 반예령만큼은 건들지 말라는 말이 돌았다는 걸, 제가 다 알고 있는데. 지금 뭐? 토끼?


“그 토끼, 쨉이 꽤 강할 것 같은데요?”

“남들한텐 그렇지만, 어머님 앞에선 나도 그냥 순한 동물이지. 우리 어머님을 누가 이겨. 아버님도 꼼짝 못 하시는걸. 그쵸, 자기?”

예령이 동의를 구하듯 묻자, 윤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건강상의 이유로 JK 푸드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 있지만, 혜영의 카리스마는 사내에서도 꽤 유명했다.

시원시원한 의사 결정과 불도저 같은 추진력. 회사의 이미지에 해가 된다면 손해를 감수하는 대범함까지.

특히 혜영이 호피 무늬 패션 아이템을 즐겨하는 터라, 직원들 사이에선 ‘범 대표님’이라는 별칭이 붙었을 정도였다.


“근데 말이죠, 도련님.”

예령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채 태조를 불렀다. 그는 무섭게 왜 이러냐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혹시 여자 있어요?”

“뭐?”

질문을 받은 건 태조인데 놀란 사람은 옆에 있던 윤조였다.


“너 만나는 사람 있어?”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두 사람을 번갈아 본 태조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건 무슨 뜬금없는 소리예요?”

“아니. 아까 식사할 때부터 느꼈는데, 오늘 도련님 몸에서 여자 향수 냄새가 진동을 하더라고.”

“…….”

“실수로 쏟아부은 게 아닌 이상. 그렇게 몸에 밸 정도면 하루 종일 같이 있었던 거 아니에요?”

태조가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윤조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동생을 올려다보았다.


“뭐야, 너 정말 만나는 사람 있어?”

“아니야. 그런 거.”

예령이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짐작은 갔다.

한두 번 뿌려본다는 게, 조각난 기억을 찾는답시고 세경이 준 향수를 몇 번 더 뿌려 댔었다.

아마, 그 향이 제 몸에 배어버린 거겠지.


“그럼 뭐예요? 그 향수 냄새는?”

“그런 일이 있어요. 뭐 확인할 게 있어서 좀 뿌려 댔더니.”

“확인? 여자 향수로 뭘 확인한담?”

예령이 짓궂게 눈을 반짝였다. 보아하니 그녀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 같았다.

이걸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고. 여자들은 감이 좋다더니.


“그보다 여자 향수란 건 어떻게 알았어요? 이런 향기 나는 거 어디 브랜드 건지 알아요?”

“어디 건지는 모르겠고. 평소 쓰는 향수가 아니니까 알았지. 이런 달달한 향기는 여자들이 자주 쓰는 거기도 하고. 도련님은 우리 남편이랑 같은 거 쓰잖아.”

“예전에나 그랬지. 지금은 같은 거 안 씁니다.”

“어쨌든. 암튼 여자 있으면 솔직히 말해요. 그래야 나도 어머니한테 맞선 상대는 나중에 고르자고 핑계라도 대지.”

예령이 생글거리며 태조를 올려다보았다. 아니라고 해도, 이미 머릿속엔 그에게 여자가 있다 확신하는 것 같았다.


“만나는 사람 없어요.”

“그럼 도련님은 어떤 여자가 취향이에요? 애교 많은 여자? 아니면 나처럼 사랑스러운 여자?”

음식에 독을 탔나…….

예령이 꽃받침을 만들어 턱을 괴자, 태조가 못 볼 걸 봤다는 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형수 좀 말려봐, 형.”

“왜? 귀여운데.”

아, 씨……. 이 형, 애처가인 거 깜빡했네.


“나 갈게.”

“왜요? 더 있다 가지.”

태조가 테라스를 나가자 그 뒤로 예령과 윤조가 졸졸 따라왔다.


“갑자기 혼자 있고 싶어져서.”

“그래요? 어머니! 도련님 먼저 가신데요!”

예령이 계단을 내려가며 아래층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과일을 먹고 있던 마 여사가 고개를 돌렸다.


“벌써 가려고?”

“급하게 처리할 일이 생각나서요.”

태조가 소파에 걸쳐 놓았던 재킷을 낚아챘다.

여기 있다간 또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른다. 우선 이 집부터 벗어나야 했다.


“어차피 시간도 늦었는데. 내일 하면 안 되니?”

“네. 안 될 것 같아요.”

단호하게 대답한 태조가 현관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러곤 잠시 깜빡했다는 듯 어머니에게 말했다.


“아, 그리고 제 맞선 상대 찾지 마세요. 절대로요!”

태조가 단단히 당부하고 나가자, 마 여사가 예령에게 시선을 던졌다.


“물어봤니?”

“네.”

“뭐래?”

“만나는 여자는 없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여자 향수 냄새를 풀풀 풍기고?”

예령이 맡았던 향수 냄새를, 바로 옆에 앉았던 혜영이 못 맡았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달큼한 향기를 풍기고, 저렇게 맞선 상대를 찾는 거에 열을 내는데. 만나는 사람이 없다고?


“아무래도 있는 거 같지?”

혜영이 묻자 예령은 조금 전 태조와 했던 대화를 상기해 보았다.

말하는 뉘앙스를 보면 사귀는 사람이 있다기보단 무슨 사건이 터진 거 같던데.


“사귀는 건 아니어도, 썸 타는 사람은 있는 거 같아요.”

하긴 사건이 하나쯤 터져야, 사랑도 싹트는 거지.

예령이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

집을 나온 태조가 차에 올랐다. 시동을 켜고 안전벨트 버클을 채우자, 옆좌석에 있는 작은 쇼핑백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그렇게 많이 뿌렸나.”

인상을 쓴 태조가 제 팔에 코를 대보았다. 알싸한 매운 내 사이로 달큼한 향기가 섞여 있었다.

예민한 만큼 적응력도 빠른 게 후각이라더니. 하루 종일 뿌리고 맡으니 코가 그새 이 향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

태조의 손이 초조하게 핸들을 두드렸다. 세경이 준 향수는 그녀에게 맡았던 것과 미묘하게 다르면서 비슷한 향을 풍겼다.

이쯤 되니 제가 처음 호텔에서 맡았던 게 이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게다가 자꾸 개처럼 킁킁대고 있다 보니……. 음, 뭐랄까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은 자괴감이 든다고나 할까?


“도대체 뭐냐고, 진짜.”

문석주 말대로, 귀신과 접붙은 게 아니라면 저 혼자 처리한 걸 텐데.

왜 이렇게 누가 뒤통수를 잡아당기는 느낌이 드는 건지.


“머리맡에 디퓨저를 두고 자면 뭐가 좀 다르려나?”

그거야 오늘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조수석을 힐끗거린 태조가 핸들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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