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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날 새벽에 나 봤어? (12/100)


12. 그날 새벽에 나 봤어?
2022.09.10.


샤워를 마친 태조가 젖은 머리를 털어냈다. 주방으로 들어간 그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시원한 물을 들이켰다.


“아, 전화.”

기울어진 물병 너머, 거실 테이블에 놓인 쇼핑백이 눈에 들어왔다.

세경에게 잘 받았다고 전화를 해야 하는데, 아직 하지 못했다.

그는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끗거리곤 거실로 내려왔다. 그리고 소파에 던져둔 핸드폰에서 세경의 번호를 찾았다.


- 네, 대표님.

신호는 길지 않았다. 들려오는 목소리도 양처럼 떨지 않았다.


“통화 가능해?”

- 네. 괜찮아요. 어쩐 일이세요?

소파에 앉은 태조가 물건들을 꺼냈다. 디퓨저는 한쪽으로 밀어두고 향수병은 손에 쥔 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다른 게 아니라, 오늘 사무실에 왔었다며. 주문한 물건 잘 받았다고.”

- 향수랑 디퓨저요?

“그래. 나 미팅 나갔을 때 왔었나 봐?”

- 스케줄 가기 전에 잠시 들렀었거든요. 그거……, 써보셨어요?

질문하는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조심스러웠다.

태조는 한쪽 눈을 감고 향수의 양을 가늠해 보았다. 향수는 처음 받았을 때보다 약 1센티 정도가 줄어 있었다.


“어. 아주 잘 쓰고 있어.”

- 디퓨저를요?

“아니. 향수를.”

- 아, 그러시구나. 쓰시는 분은 좋아하세요?

“쓰시는 분?”

나 말인가?


“뭐 나쁘진 않은 거 같아. 그보다 선물도 받았는데. 답례는 뭐가 좋을까?”

- 비싼 것도 아니라서, 답례는 안 하셔도 돼요.

“그래도. 대표가 소속사 배우한테 선물 받고 입 닦긴 좀 그렇잖아? 받고 싶은 거 없으면 같이 저녁이라도 먹는 건 어때? 할 말도 있는데.”

- 무슨…… 말이요?

“그건 만나서 이야기하고. 어떻게 할래? 나랑 밥 먹을래, 아니면 다른 걸 받을래?”

- …….

고민하는지 건너편에선 잠시 말이 없었다.


- ……밥 사주세요.

“잘 생각했어. 시간은 언제가 좋을까? 내일 저녁에 스케줄 있어?”

- 네. 영화 홍보차 지방에 잠깐. 내일 말고 모레는 안 될까요?

“안 될 게 뭐 있어. 그날로 잡지. 먹고 싶은 건?”

- 전 다 괜찮은데.

괜찮다고 하는 게 아주 입버릇이지. 피식 웃은 태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못 먹는 건 없고?”

- 없어요. 이상한 거만 빼면.

“이상한 거?”

- 막 보양식으로, 독특한 거 먹는 사람들 있잖아요. 뱀이나 개구리 같은…….

“설마 내가 세경 씨한테 그런 거 먹일까 봐?”

그런 건 나도 안 먹거든?

어이가 없다는 듯, 태조가 실소를 흘리자 반대편에서 소심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 그건 아니고. 혹시나 해서요.

혹시나 해도 그렇지. 뱀이나, 개구리라니.


“도대체 세경 씨한테 나는 어떤 이미지인 거야? 안 되겠네. 이번 기회에 좀 바꿔봐야지. 내일 내가 몇 군데 알아보고 메시지 보낼게. 그중 마음에 드는 데로 골라.”

- 네. 그럴게요. 그럼 쉬세요, 대표님.

“그래. 세경 씨도.”

전화를 끊은 태조가 한동안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투뿔 한우라면 모를까, 누가 개구리나 뱀을 먹인다고.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어 비식비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저도 모르게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를 문지르며 그가 검색창을 띄워놓았다.


“그나저나.”

액정 위를 오가던 손이 순간 우뚝 멈추었다. 눈동자를 느리게 굴린 그는 좀 전까지 핸드폰을 댄 귓가를 긁적거렸다.

저번부터 세경과 통화를 하고 나면 이상하게 귀가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솜털 위로 후, 뜨거운 바람이 지나가는 것처럼.


‘……대표님.’

 
이제는 환청도 들리는 건가. 미간을 구긴 태조가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내렸다.


“내가 꼭 기억을 찾고 말지.”

그 전에 윤세경 한우부터 먹이고.

키패드를 누르는 손가락이 다시금 바쁘게 움직였다.

***


 
태조와 약속이 잡힌 날.

세경은 출발 세 시간 전부터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옷장에 있는 옷들을 죄다 꺼내 이리 대보고 저리 대보길 수십 번. 왜 외출을 할 때마다 입고 나갈 옷이 없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고심 끝에 고른 상아색 니트 원피스에 연 하늘빛 코트를 걸친 세경이 다시 한번 매무새를 다듬고 있을 때였다.

침대 위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이 길게 울었다.


“어, 유나야.”

- 지금 바빠?

세경은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약속 시간까지는 차가 막히는 걸 감안해도 1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아니. 조금 시간 있어.”

- 조금? 오늘 어디 가?

“응. 식사 약속이 있어서. 그보다 원호 씨랑은 이야기 해봤어?”

- 어. 하긴 했는데…….

평소와 달리 유나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방송국에서 임 피디가 프로그램 출연을 제안했을 때, 유나는 바로 하겠다고 확답을 하지 못했다.

방송에 출연하는 게 유나 혼자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부부 예능인 이상, 원호도 얼굴을 드러내야 하니 남편과 상의를 해보겠다 임 피디에게 미리 언질을 해둔 터였다.


“왜, 원호 씨가 싫대?”

- 아니. 남편은 내가 다시 방송 활동을 하고 싶어 하는 걸 알아서 그러는지, 내가 하고 싶으면 하재.

“근데 뭐가 고민이야?”

- 음, 너무 고민도 없이 선뜻 대답한 거? 방송이 그렇잖아. 잘해도 욕하는 사람 있고, 못하면 사방에서 배로 욕하고. 나야 오래전부터 연예계 활동을 했으니 그런 거에 좀 면역이 있다지만. 우리 남편은 회사원인데.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욕하는 거에 상처받으면 어떡해.

에효, 하고 내뱉는 한숨에 근심이 어렸다. 하긴, 세경도 처음 데뷔하고 악플을 받았을 때 엄청난 충격이긴 했었다.

너는 왜 춤을 그거밖에 못 추냐. 보컬 연습 더 하고 와라. 민폐다, 팀에서 빠져라. 등등.

순화한 댓글이 저 정도였지, 세경이 배우로서 자리를 잡고 계약 만료로 팀이 해체되었을 땐 온갖 욕들이 범람하였다.

멤버 하나가 뜨니까 팀을 버린다, 너 때문에 다른 멤버들이 활동도 못 하고 피해를 본다와 같은.

남들은 무시해라, 어떻게 모든 사람이 날 좋아할 수 있느냐, 라고 말은 하지만. 연예계 생활을 10년을 해도 악플은 익숙해질 수 없었다.

물론 익숙해질 필요도 없지만.


“원호 씨한테도 이야기했어? 네가 그런 거 때문에 걱정된다고.”

- 했지. 수십 번도 더. 그랬더니 자기는 상관없대. 어차피 SNS도 안 한다고.

음, SNS만이 문제가 아닐 텐데…….


- 잠깐, 그럼 나만 욕먹으란 소린가? 나는 SNS도 하고 너튜브도 하는데?

이 남자가 정말! 유나가 왁, 소리를 지르자 세경이 웃었다.


“왜 욕먹을 걱정부터 해? 잘하면 칭찬도 듣고, 활동 영역도 넓어질 텐데.”

- 너무 오랜만이라 그렇지.

“아무튼 하기로 결정은 한 거야?”

- 응! 임 피디님한테 전화하기 전에 너한테 보고하는 거야. 어쨌든 이렇게 기회가 온 것도 네 덕분이니까.

“그게 왜 내 덕분이야? 그냥 때가 잘 맞았던 거지.”

- 너 만나고 나오는 중에 임 피디님을 만난 거잖아. 으휴, 이 복덩이. 그래서 말인데, 세경아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부탁? 무슨 부탁?”

- 나 임 피디님하고 미팅할 때 같이 가주면 안 돼? 겸사겸사 우리 남편한테 경각심도 심어주고.

유나가 지금 소속사에 속해 있는 것도 아니니, 하나부터 열까지 그녀가 직접 챙겨야 할 터였다.


“그래. 특별한 일 없으면.”

- 그럼 나 이번 주랑 다음 주 네 스케줄 좀 알려주면 안 될까? 시간 한 번 맞춰 보게.

세경이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캡처해둔 스케줄표를 찾아 유나에게 보냈다.


“아, 늦겠다.”

시간을 확인한 세경이 차 키를 들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태조가 보내준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찍고, 천천히 핸들을 돌렸다.

태조가 세경에게 오라고 한 곳은, 방송에도 자주 나오는 한 유명 셰프의 레스토랑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그녀는 태조가 보낸 메시지와 레스토랑 상호명을 다시 한번 체크했다.

널찍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들어가자 깔끔한 유니폼을 입은 매니저가 세경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예약하셨나요?”

“네. 진태조로 확인 부탁드릴게요.”

세경이 혀끝을 살짝 깨물었다. 매번 대표님이라고 부르다가 그의 이름을 부르니 어쩐지 목 안이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아, 일행분은 이미 도착하셨네요. 이쪽으로 오세요. 안내해 드릴게요.”

고개를 끄덕인 세경이 매니저의 뒤를 따라갔다.

프라이빗하게 나눠진 룸의 맨 끝. 그 앞에 멈춰선 매니저가 노크를 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왔어?”

세경이 들어오자 태조가 어서 오란 듯 손을 들었다. 룸에는 검은색 셰프복을 입은 레스토랑의 오너 셰프도 함께였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니. 나도 방금 왔어.”

코트를 받아준 매니저가 세경에게 의자를 빼주었다. 그녀는 셰프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때마침 메뉴 소개를 받고 있는 중이었는데.”

태조가 보고 있던 메뉴판을 세경에게 내밀었다.


“보고 먹고 싶은 게 있으면 골라봐. 여긴 주로 셰프 추천 코스로 주문하긴 하는데. 세경 씨가 원하는 건 따로 있을 수도 있으니까.”

“나오는 음식이 많이 다른가요?”

“조금 다릅니다. 일단 셰프 추천 코스에는 게살수프가 나오고, 메인 요리인 스테이크는 꽃등심에 특수 부위가 더 추가되어 나와요. 곁들일 소스도 두 가지 더 늘어나고요. 디저트는 저희가 만든 티라미수와 타르트 중에 선택하시면 됩니다. 둘 다 드셔도 되고요.”

셰프의 말을 경청한 세경이 다시 한번 메뉴를 훑었다.


“그럼 셰프 추천으로 두 개 먹지. 어때?”

“네. 저도 좋아요.”

“술은? 와인도 하나 시킬까?”

“아뇨. 술은 됐어요. 차를 끌고 와서…….”

세경이 손을 내저었다. 그래도 뭔가 더 시켜주고 싶었는지, 태조는 음료 메뉴에서 에이드를 추가로 주문했다.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주문을 받은 셰프와 매니저가 룸을 나가자 세경이 목이 타는 듯 물을 머금었다.


“우리 단둘이 밥 먹는 건 처음인가?”

“네.”

“계약하기 전에 만났을 때도 같이 식사했던 거 같은데?”

“그땐 강 상무님이랑 석주 선배도 계셨어요.”

예전 일이 떠오른 듯 세경이 설핏 웃었다.

전 소속사와 계약이 만료되고, 제주도로 내려간 세경은 3개월 정도의 휴식을 취한 뒤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계약한 소속사도 매니저도 없던 터라, 세경은 일을 잡는 것부터 시작해 운전까지 모두 제가 하고 다녔다.

그렇게 정신없이 두 달 정도를 보냈을까. 그즈음 같은 드라마에 출연하던 석주가 세경에게 운을 뗐다.

혹시, 너 우리 기획사와 계약할 생각이 없냐고.


“아, 그러고 보니 석주가 데려왔지, 너.”

태조도 그때 일이 생각난 듯 픽 웃었다.

어느 날 촬영을 하고 돌아온 석주가 대뜸 제 사무실에 쳐들어오더니 계약할 생각이 없냐고 물어왔었다.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좀 알아듣게 설명을 하라고 하자, 그의 입에서 윤세경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나 이번에 세경이랑 같이 촬영하거든. 그 녀석 전 소속사랑 계약 만료됐대. 다시 활동하는 거 같은데, 소속사가 없어서 혼자 다니더라.’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우리랑 계약하자는 거지. 그만한 인지도에 연기도 잘하는 애 흔치 않잖아.’


‘계약금은 니 주머니에서 나오냐?’


‘그 계약금의 1할 정도는 내가 벌어온 거 아니냐?’

 
둔한 곰이 답지 않게 날래기는.

말은 저렇게 해도, 태조는 그날 세경의 프로필이며 출연한 드라마들을 복기했다.

시린 겨울, 코피를 쏟으며 저를 쳐다보던 윤세경을 떠올리면서.


“석주하곤 언제부터 알고 지낸 거야?”

“음, 처음 뵌 건 23살 때였을 거예요. 저는 그때가 첫 드라마였는데, 석주 선배는 주조연급이었거든요. 그러고 나서 1년 뒤에 다시 뵀는데, 절 기억해주시더라고요.”

“그 곰이?”

믿을 수 없다는 태조의 반문에 세경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때는 저도 단역이 아니라서 촬영장에서 석주 선배랑 자주 뵙게 됐어요. 이것저것 잘 챙겨주셔서, 제가 많이 따르기도 했고요.”

“석주가 뭘 챙겨줬는데?”

“주로 먹을 걸…….”

기억을 더듬던 세경이 말끝을 흐리자, 태조는 예상이 간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문석주 밴엔 꿀단지 대신 간식 단지가 비치되어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동시에 훅, 불어온 바람을 타고 세경의 향수 냄새가 태조의 코끝을 간질였다.


“…….”

이거 봐. 좀 다르잖아.

미간을 살짝 구긴 태조가 세경을 바라보았다.

서빙을 하러 온 매니저는 간략한 설명과 함께 에피타이저로 가져온 음식을 두 사람 앞에 내려놓았다.


“드세요.”

매니저가 나가자, 젓가락을 든 세경이 크림치즈를 감싼 주홍빛 연어살을 집어 들었다.

태조는 오물거리는 입술을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혹시 말이야.”

“……?”

“저번에 호텔에서 마주쳤을 때 있지.”

우물거리던 입술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세경이 꿀꺽, 입 안에 있던 것을 목구멍으로 넘겼을 때.


“그날 새벽에 나 봤어?”

그가 시선을 맞추며 세경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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