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리미티드 에디션
(1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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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리미티드 에디션
2022.09.14.
“…….”
왜 갑자기 저런 걸 묻는 거지?
머릿속이 순간 새하얘졌다. 혹시 그날 일을 기억하는 건가? 아니면 석주 선배가 그날 자신이 함께 있었던 걸 털어놓았나.
온갖 추측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휘저었다. 쿵쿵, 조용한 룸 안에 오직 제 심장 소리만 들리는 것 같았다.
세경은 물을 마시며 술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바짝 마른 목을 축이곤 입을 열었다.
“그날 새벽이라면……. S호텔 정문에서 마주쳤을 때 말이죠?”
“어.”
태조가 뒤늦게 애피타이저로 나온 연어살을 집어 들었다. 입 안에 넣고 느리게 씹으며 세경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아뇨. 못 본 거 같은데요.”
세경이 조심스럽게 태조의 표정을 살폈다. 거짓말을 해서 그런가. 왠지 모르게 입이 마르는 느낌이었다.
석주가 그때 일을 털어놓은 거라면, 저번처럼 제게 미리 전화를 해 언질을 주었을 거다. 하지만, 만약 태조가 기억을 찾은 거라면…….
단순히 새벽에 저를 봤냐 물을 게 아니라, 왜 자신과 밤을 보냈냐고 물었어야 했다.
“못 봤어?”
재차 묻는 그의 말에 세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잘못 추측한 건가?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네. 근데 그건 왜 물으시는지…….”
세경이 땀이 난 손바닥을 꽉 그러쥐었다.
“아. 그냥 혹시나 해서.”
혹시나라니. 도대체 뭐가 의문스러워서?
더 파고들고 싶었으나,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설프게 질문을 던졌다가, 숨기고 있던 제 꼬리가 드러날지 몰랐다.
“전화로 제게 할 말이 있으시다고 하더니. 방금 그걸 물어보시려고 한 거였어요?”
“아아, 그건 아니고.”
“그럼요?”
세경이 묻는 순간, 잘게 찢은 게살을 넣은 수프가 서빙되었다.
수저를 든 세경이 수프 볼에 담긴 걸쭉한 액체를 휘적거렸다.
기계적으로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었지만, 좀 전에 태조가 한 말 때문인지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냥 밥 먹자는 핑계였는데.”
“…….”
조, 좀 전까지 사람을 식겁하게 만들어 놓곤!
욱한 마음에 수저를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태조가 툭, 불거진 손허리뼈를 내려다보곤 짓궂게 웃었다.
“왜? 한 대 때리려고?”
“아니요. 그런 마음 먹은 적 없는데요.”
손에서 슬쩍 힘을 푼 세경이 수프를 입에 넣었다. 입꼬리를 올린 그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세경을 바라보았다.
“농담이야. 그보다 세경 씨 지제혁 감독 알지? <칼날의 밤> 영화 만든. 그분이 이번에 새로 드라마 제작에 들어가거든.”
“무슨 드라마요?”
“가제이긴 한데, 사냥이라고. 죽은 남동생의 복수를 하는 스토리야. 원래는 영화 시나리오였는데, 이번에 투자받으면서 10부작 드라마로 제작하기로 했어.”
“10부작이요? 편성은요? 편수가 애매한 거 같은데.”
“그거 OTT 독점으로 들어가. 미국의 M사.”
“아…….”
낮게 탄식한 세경이 뭔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왜 제게 그 이야기를?”
“왜겠어. 지 감독님이 세경 씨를 1순위로 생각하고 있다고 하니까 그렇지.”
“저를요?”
세경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째서 지 감독이 자신을 지명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와는 같이 작업한 적도, 사석에서 마주친 적도 없는데.
“어. 무슨 영화를 봤는데, 그걸 보고 세경 씨가 그 이미지에 딱 맞는다고 생각했나 봐.”
“무슨 영화요?”
“글쎄. 지 감독님이 그거까진 말을 안 해줘서.”
도대체 어떤 영화를 말하는 건가? 세경이 그간 출연한 영화들을 곰곰이 떠올리고 있자, 태조가 말했다.
“감독님의 시선은 뭔가 다른가 봐? 그 캐릭터, 꽤 어두우면서도 냉정한 타입인데. 내 기억 속의 세경 씨는 그와는 정 반대라.”
“대표님 기억 속의 제 이미지는 어떤데요?”
“음……. 추위 속에 벌벌 떨고 있는 순한 양이랄까?”
“양……이요?”
그것도 뭔가 안 어울리지 않나?
“어.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꽤 강렬했잖아. 세경 씨 추위 속에 덜덜 떨면서 코피도 흘리고.”
“그걸 기억하고 계세요?”
“그럼. 그걸 벌써 잊었을까 봐? 현장에 연예인만 달랑 두고 가는 그 조……, 아니 망할 기획사가 어딘가 싶어 속으로 얼마나 욕을 했는데.”
“…….”
“손수건 달라니까, 다음에 주겠다며 홀랑 가져가 버리고 말이지.”
“그건 피가 묻어서…….”
그날, 석주의 촬영이 끝날 때까지 태조는 현장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세경의 매니저가 도착할 때쯤, 자기네 소속 연예인은 본인들이 잘 챙기라 한마디하고 그녀에게 다가왔었다.
피도 멈췄으니, 손수건은 이리 달라고.
하지만 세경은 주머니 속에 그의 손수건을 숨기고, 다음에 만나면 세탁해서 드리겠다고 했다.
바보처럼 또 만날 수 있을 줄 알고서.
“버렸어, 그거?”
“아니요. 근데 어디 있는 줄 모르겠어요.”
그에게 돌려줄 기회가 생겼지만, 왠지 그것만큼은 주고 싶지 않았다. 흘끔 시선을 든 세경이 태조에게 물었다.
“혹시 의미 있는 건가요? 선물을 받은 거라던가…….”
“그건 아니고.”
“그럼 제가 새 걸로 사드려도 될까요?”
“사 달라고 꺼낸 얘기 아니었는데. 이미 쓰고 있는 것도 있고.”
태조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팔랑팔랑 흔들었다.
“그럼 나중에 찾게 되면 드릴게요.”
아마, 영원히 찾지 못할 것 같지만.
“그러든가.”
태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메인 요리인 맛깔스러운 스테이크가 서빙되었고, 두 사람은 달콤한 디저트까지 먹고 난 후 식당을 나왔다.
“세경 씨, 차 가지고 왔다고 했지?”
“네.”
세경보다 한 계단 위에 서 있던 태조가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옅은 코랄 빛을 띠는 입술과 목 부위를 훑고 올라왔다.
“먼저 차 가지고 와. 난 한 대 태우고 갈 거라서.”
세경이 종종거리며 주차장으로 향하자, 태조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는 멀어지는 세경의 뒷모습을 보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그녀가 있던 곳에 서자, 공기 중에 남아 있던 잔향이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분명 낯익은데.”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태조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녀에게 느껴지는 향과 어딘지 모르게 기시감이 드는 저 입술과 목선까지.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건만, 요즘 들어 윤세경이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
쾌청한 아침이었다.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빛을 뽐내는.
하지만 출근을 하는 태조의 얼굴은 먹구름 낀 하늘처럼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대표님.”
김 비서는 숙였던 고개를 들며 태조의 표정을 살폈다.
인사를 하면서도, 이게 맞는 건가 싶었다. 힘을 준 발걸음에 유독 바닥을 딛는 구두 소리가 날카롭게 들리는 것 같았는데.
“네. 좋은……. 음, 그래요. 좋은 아침이에요.”
하나도 좋지 않은 얼굴을 하곤, 태조의 입은 의례적인 인사말을 내뱉고 있었다.
“커피 드릴까요?”
“네. 진하게 한 잔, 부탁할게요.”
태조가 사무실로 들어가자, 김 비서는 샷 두 개를 추가한 커피를 그의 책상에 올려두었다.
톡톡,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린 태조는 김 비서가 나가자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 돌겠네, 진짜.”
세경이 준 디퓨저 효과일까? 이따금씩 그를 괴롭히던 꿈은 오늘따라 유독 더 선명해졌다.
여전히 그 얼굴은 다 보여주지 않았지만. 이전엔 목 언저리를 맴돌던 시선이 이제는 입술과 턱 아래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게 정말 날아간 기억의 일부인지 제 몽상인지. 아니면, 그 전날 세경에게서 느껴지던 묘한 기시감 때문인지 헷갈린다는 거였다.
“변태도 아니고 진짜.”
진한 커피를 마신 태조가 리모컨을 들어 티비를 켰다. 채널을 돌리다 세경의 얼굴이 나오자, 그의 손가락이 우뚝 멈추었다.
와……. 커피 뿜을 뻔했네.
찔리게 왜 이 타이밍에 나오는 거야?
인상을 쓴 태조가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화면에 세경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자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눈과 코를 가렸다.
“비슷한 거 같기도 하고.”
그럼 그 꿈은 어제 윤세경을 만나서 그런 건가?
“하긴 어제 내내 생각했으니.”
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고개를 흔든 태조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는 포털에서 뉴스를 검색해 보다, 지난번 지 감독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라 검색창에 윤세경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돋보기 모양을 누르자 프로필과 함께 최근 영상, 필모그래피들이 쭉 떠올랐다.
계약 전엔 세경이 나온 드라마만 중점적으로 봤었는데, 최근작을 제외하고도 조연과 특별출연으로 나온 영화도 제법 많이 있었다.
“이걸로는 잘 모르겠고.”
영화 정보들을 클릭해 보던 태조가 화면을 내려 이미지 창을 띄웠다.
사진은 최근 활동부터 시작해 과거의 앳된 모습들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었다.
“여기서 찾는 것도 일이겠는데.”
그냥 지 감독이 말해줄 때까지 기다릴까?
미간을 찌푸린 태조가 손가락을 움직여 사진들을 쭉 훑었다.
그러다 멈칫, 스치듯 지나간 사진 하나에 꽂혀 다시 화면을 올렸다.
“…….”
어느 잡지의 화보 촬영물인 듯했다. 한창 물오른 미모를 보면,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았고.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시선을 잡아끈 건 따로 있었다.
사진은 세경의 측면 얼굴을 클로즈업 한 거였는데, 꽤 가까이서 찍은 탓에 작은 소품까지도 선명하게 보였다.
“이거…….”
사진을 클릭한 태조가 한 부분을 확대했다. 그리고 책상 위에 있는 상자에서 귀걸이를 꺼내 세경이 착용한 것과 비교해 보았다.
“……똑같잖아.”
아니, 이건 또 왜 윤세경이 한 거랑 똑같은 거지? 화보 촬영 때 착용한 거라면 어디선가 협찬을 받은 거겠지만.
귀걸이를 이리저리 돌려보던 태조가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비서실에서 연결한 인터폰이 울리며 붉은빛이 깜빡거렸다.
- 대표님, 매니지먼트실 송지화 실장님이 오셨습니다.
“아, 들어오라고 해요.”
똑똑.
노크를 한 송 실장이 서류를 옆에 끼고 안으로 들어왔다. 태조는 노트북과 연결된 모니터를 켜고, 포털창을 열었다.
“대표님, 보고할 것이…….”
“잠깐만요. 그 전에 확인할 게 있는데.”
태조가 세경의 이름을 검색하고, 좀 전에 본 사진을 화면에 띄웠다. 그리고 모니터를 돌려 송 실장에게 보여주었다.
“……?”
이걸 왜 제게 보여주냐는 듯, 송 실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 화보 어디 잡지사에서 촬영한 건지 알아요?”
“음……. 아, 네. 기억나네요. 저도 여기 갔었거든요. 아마 V 잡지사 촬영일 겁니다. 촬영한 지는 몇 개월 지난 거고요.”
“그럼 이 귀걸이는 어디 브랜드 건지 압니까?”
“귀걸이요?”
여자분께 선물이라도 하려는 건가?
거북이처럼 목을 뺀 송 실장이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뭔가 떠오른 듯, ‘아!’ 하고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네. 알아요. 근데 이거 리미티드 에디션이라, 구입하실 수는 없을 텐데요?”
리미티드 에디션…….
한정판이라니. 환장할 상황에 환영할 만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어디 브랜듭니까?”
“음, 디온이라고 국내 주얼리 디자이너의 브랜드예요. 그분이 세경 씨 팬이라 직접 선물한 거고요. 이때 촬영한 건 세경 씨 개인 소장품이었어요.”
“개인 소장품…….”
“네. 그래서 시중에서 구하실 수는 없을 거예요.”
“그럼 이건 세경 씨만 가지고 있다는 겁니까?”
송 실장이 그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알기론, 판매 문의가 들어와서 딱 77개만 만들었다고 들었어요. 이미 솔드아웃 됐고요.”
77개. 그럼 용의자는 77명이란 건가?
“그럼…….”
말끝을 늘인 태조가 손에 쥔 귀걸이를 꽉 움켜쥐었다.
“이 귀걸이를 가진 사람들 명단, 좀 알아볼 수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