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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어딜 쫓아오려고. (14/100)


14. 어딜 쫓아오려고.
2022.09.17.


푹신한 카펫 위로 태조의 구두 소리가 스며들었다. 손에 든 카드키를 돌리며 그는 송 실장과 나눈 이야기를 곱씹어보았다.


‘명단이요? 음, 글쎄요. 말을 꺼내 볼 순 있겠지만, 무리지 않을까요? 그쪽에서 고객 명단을 쉽게 줄 것 같지도 않고요.’


‘…….’


‘근데 명단은 왜 필요하신 거예요?’


‘내가 최근 이것과 비슷한 디자인의 귀걸이를 주운 거 같아서요.’


‘비슷한 거요? 아, 그분이 만드신 거엔 넘버링이 되어 있다 들었는데. 해당 넘버링만 확인하면 소유자를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정도라면 그쪽에서도 고객 정보를 알려줄 수 있을 것 같고요.’


‘귀걸이에도 넘버링이 있습니까?’


‘네. 요즘 하도 짝퉁이 많으니까요. 그쪽에서 한정판으로 제작한 거기도 하고, A/S 관리 차원에서 그렇게 한 거로 알고 있어요.’


‘그럼 윤세경 씨 건 몇 번인지 알아요?’


‘세경 씨 거요? 음, 아마…….’


‘…….’


‘1번 아니면 7번일걸요? 그 귀걸이 세경 씨를 모티프로 만든 거니까. 행운이 가득하길 바란다는 의미로 딱 77개만 만든 거라 했거든요.’

 
송 실장의 말을 듣고 나서, 태조는 귀걸이를 해부하듯이 살펴보았다. 그리고 장식 안쪽에서 'No. 01‘이라고 적힌 걸 발견했다.

77명의 용의자가 순식간에 2명으로 줄어들었고, 그중 1명이 가장 유력해졌다.

태조는 그 유력한 용의자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한정판인 귀걸이를 가질 수 있는 자.

이 호텔에서 그와 마주칠 가능성이 높은 자.

자신과 조금이라도 친분이 있는 자.

그리고 이 모든 걸 충족하는 사람이라면…….


“윤세경밖에 없지.”

철컥.

카드키를 손잡이 쪽에 대자 묵직한 소리가 났다. 태조는 그날, 자신이 머물렀던 1703호의 객실 문을 열었다.

안쪽 슬롯에 카드키를 꽂자 어두웠던 방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문을 닫은 태조는 제일 먼저 욕실로 들어갔다. 깨끗하게 청소된 세면대와 욕조는 물기 하나 없었고, 휴지통은 한 조각의 쓰레기도 없이 깔끔하게 비워져 있었다.


“…….”

그는 세면대 옆에 있는 어매니티를 괜히 뒤적거렸다.

천장과 벽 쪽을 쭉 훑어보았지만, 방향제로 보이는 건 없었다. 물론 욕실에서 달큼한 향이 나는 것도 아니었고.


“이게 정상이지.”

정돈된 룸을 둘러본 태조는 창을 가린 커튼을 쳤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윤세경은 분명 그날 저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그녀의 것으로 추정되는 귀걸이가 침대 위를 굴러다녔고, 세경이 쓰는 것과 비슷한 향수 냄새가 공기 중에 남아 있었다.

그런 정황을 종합해 보면 그녀가 자신의 룸에 들어온 건 확실한 거 같은데.


“그럼 왜…….”

그날 자신을 보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한 걸까?

자신은 정말 그날 세경과 잠자리를 가졌나. 세경은 그걸 알리고 싶지 않아서 저를 못 봤다고 한 거고?

하지만 그렇다면 석주는 왜 그날 세경이 들어온 걸 이야기하지 않은 걸까. 굳이 숨겨야 할 일도 아니었는데.


“하.”

태조의 입에서 짜증 섞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중요한 기억이 날아갔으니, 답은 나오지 않고 의문만 가득했다.

그렇다고 귀걸이를 내밀면서 ‘세경 씨, 나랑 잤어?’라고 물으면 미친놈 취급이나 당하겠지.

침대에서 귀걸이를 발견했다는 게 잠자리를 가졌단 직접 증거가 되진 않으니까.


“이 망할 곰…….”

태조가 이를 갈았다. 우선 그 새끼부터 먼저 조져봐야 하나.

그는 마른세수를 하며 침대를 노려보았다.

하필 그 장면이 꿈으로 나와 이게 욕구불만의 연장선인지, 무의식이 의식화 중인 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태조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다 룸을 나와 편의점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맨정신으로는 안 될 것 같았다.

만취할 정도는 아니라도, 약간의 알코올을 섭취하면 또 모른다. 그날 일이 번쩍 떠오를지도.

편의점으로 들어간 태조는 맥주 5캔과 안줏거리를 사서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간 순간, 그는 그 앞에 선 사람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마치 그의 발소리를 들은 듯, 익숙한 얼굴의 여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 대표님?”

 

 
그날 새벽 저와 함께 침대 위를 뒹굴었을지도 모르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저기에 있었다.

***

새로 들어갈 집의 리모델링 공사 진행 상황을 살펴보고 오는 길이었다.

세경은 룸으로 올라가기 전 프런트 데스크로 향했다. 혹시나 제 귀걸이가 분실물로 들어왔나 싶어서였다.


“죄송합니다. 여전히 들어온 게 없네요.”

“아, 그래요.”

이 정도로 기다렸는데,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면 제 손을 완전히 떠난 모양이었다.

실망한 세경은 직원에게 수고하란 말을 건네고 돌아섰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고 있는데, 등 뒤로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자 눈을 크게 떴다.


“어, 대표님?”

왜 대표님이 여기에 있는 거지?

세경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대표님이 왜 여기 계세요?”

“잠깐 쉬러 왔어.”

“호텔로요?”

굳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세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가본 적은 없어도 호텔 룸보단 그의 집이 더 크고 편할 거라는 건 쉬이 예상할 수 있었다.

같이 사는 사람도 없으니, 그를 방해하는 사람도 없을 테고.


“뭐, 가끔 기분 전환이지.”

기분 전환을 굳이 집보다 더 불편한 호텔로요?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으나, 본인이 그렇다는데 제가 더 뭐라 할 수는 없었다.

세경은 납득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세경 씨는 몇 층?”

“13층이요.”

태조가 13층 버튼을 눌렀다. 그는 17층에 머무는지, 거기에도 푸른색 불이 들어와 있었다.

지난번에도 17층에 머물지 않았나?

우연인가 싶어 혼자 생각하고 있는데, 뭔가 저를 지긋이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

고개를 돌리자 태조와 눈이 마주쳤다.

저를 뚫을 듯 쳐다보는 시선이 무언가 묻고 싶은 게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세경은 머쓱함에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그와 어울리지 않는 편의점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편의점 다녀오신 거예요?”

“어. 술 좀 마실까 하고.”

“혼자요?”

“그럼 혼자지. 누가 있을까 봐?”

“아니, 강 상무님이나 석주 선배님도 같이 오셨나 해서요.”

“징그럽게 그놈들이랑 왜 와.”

지난번엔 석주 선배랑 같이 오셨잖아요. 거의 실신해서였지만.


“혼자 먹기엔 좀 많아 보이는데.”

편의점 봉투는 맥주캔으로 빽빽해 더 들어갈 틈도 없어 보였다.


“많아 보이면, 세경 씨가 나랑 같이 먹어주려고?”

“어디서요? 룸에서요?”

“…….”

아니, 거기선 됐다고 해야지.

세경의 대답에 태조가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땡! 맑은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 소리가 신호인 양, 잠시 굳어 있던 태조가 입을 열었다.


“뭐가 룸에서야.”

“…….”

“어딜 쫓아오려고.”

문이 닫히려 하자 태조가 다시 열림 버튼을 눌렀다.

봉투를 뒤적거린 그는 안줏거리로 산 아몬드를 꺼내 세경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리고 어서 내리라는 듯 세경을 향해 턱을 까닥거렸다.


“쉬어, 세경 씨.”

쫓겨나듯 내리는 세경에게 태조가 손을 흔들었다.

닫히는 문 사이로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세경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실수한 건가?

불순한 의도로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그냥, 정말 가볍게 술 한잔만 할 생각이었는데.


“쉬운 여자처럼 보였으려나.”

세경은 태조가 준 아몬드 봉투에 얼굴은 묻은 채,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


 
조용한 룸에 티비 소리가 들렸다. 샤워를 마친 태조는 가운을 걸친 채 걸음을 옮겼다.

젖은 머리카락 끝에 매달린 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며 냉장고에서 맥주캔을 하나 꺼냈다.

시원한 맥주가 목구멍을 넘어갈 때마다 태조의 목울대가 크게 들썩거렸다.

그는 단숨에 반 캔을 비우고 테이블 위에 맥주를 내려놓았다.


“정말, 겁도 없지.”

태조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쳤던 세경을 떠올리곤 설핏 웃었다.

아무튼, 그의 예상을 빗나가는 여자였다.

같이 술을 먹어줄 거냐는 말을 농담으로 던졌더니……. 뭐? 룸에서요?


“나 혼자 있다니까. 뭘 믿고.”

태조는 잠시 내려두었던 캔을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댔다.

물론 자신이 나쁜 의도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었으나, 세경은 또 무슨 생각으로 그런 대답을 한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만큼 저를 믿는다는 걸까? 아니면 자신이 무해한 남자라 여겨서 그런 걸까?


“그럼 그날은 아무 일도 없었던 건가?”

태조는 남은 술을 입안에 털어 넣고 새 맥주를 꺼냈다.

사실 엘리베이터에 단둘이 있었을 때, 세경에게 묻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날 자신의 방에 들어온 게 네가 맞냐고. 왜 호텔에서 저를 봤냐 물었을 때 거짓말을 했었던 거냐고.

혹시 우리가 밤새 몸을 섞었던 거냐, 같은 것을 물어보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당장은 증거라고 내밀 수 있는 게 귀걸이뿐이라, 섣불리 입을 뗄 수가 없었다.

향수는 자신의 기억에 의존한 거라, 아니라고 잡아뗀다면 할 말이 없었고.

꿈속의 여자와 세경의 모습이 묘하게 겹쳐 보인다는 것도, 제 몽상에 불과한 것일지도 몰랐으니.

무엇보다 자신이 가장 궁금한 건 따로 있지 않나.

그걸 확인하기 위해선 그녀가 잡아뗄 수 없는, 다른 증거들이 필요했다.


“그럼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나…….”

태조는 맥주캔을 기울이며 침대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그날 있던 일을 천천히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일단 술자리 후, 석주가 자신을 호텔로 데리고 온 건 확실했다.

세경이 이 방에 들어온 게 맞다면, 우연히 석주와 마주쳤을 확률이 높았고.


“그 녀석이 늦은 시간에 세경 씨를 불러냈을 리는 없으니까.”

태조가 턱을 쓸며 생각에 잠겼다.

당시 만취해 석주에게 업혀 왔으니, 세경이 그걸 봤다면 저를 부축하는 걸 도와줬을 수도 있었다.


“그럼 귀걸이는 그때 떨어트렸나?”

맥주를 마신 태조가 테이블에 놓인 메모지와 펜을 들고 왔다.

그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제가 추측한 것들을 써 내려갔다. 앞으로 제가 확인해야 할 것들까지도.


“역시 CCTV를 한번 돌려봐야 할 것 같은데.”

태조는 객실에 들어오기 전 확인한 CCTV 위치를 상기했다.

경찰을 대동할 순 없으니, 일단 비공식적인 루트라도 알아봐야 하나.

톡톡.

태조가 메모지 위로 펜을 두드렸다.

창밖을 내다보자 높다란 건물들의 불빛이 하나둘 사그라지고 있었다.


“별일 없으면, 내일 아침 조식이나 같이하자고 할까.”

태조가 시계를 힐끗거렸다. 연락을 하기엔 늦은 밤 12시였다.

커튼을 친 그는 트레이닝 바지를 갈아입고, 혹시 몰라 가져온 향수를 룸 곳곳에 뿌려두었다.

그리고 늦은 새벽, 잠이 든 그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


“……미친.”

태조는 불룩해진 다리 사이와 드문드문 떠오른 기억에 나직한 욕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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