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역사를 쌓기에 충분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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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역사를 쌓기에 충분한 시간
2022.09.21.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문석주를 포획해 추궁하려던 계획은 실패했다.
팔자 좋은 곰이 해외 로케가 잡혀 독일에 가 있는 탓이었다.
별수 없이 태조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집으로 오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다른 일에 집중했다.
그는 책상 위에 놓인 카드 결제 내역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빨간 펜으로 데런 베이즈를 접대한 날의 카드 사용 내역을 체크한 그는 핸드폰에서 석주가 보낸 메시지 시각을 확인했다.
카드 전표에 찍힌 결제 시각은 새벽 1시 25분, 석주가 그에게 호텔에 눕혀놓고 나왔다고 메시지를 보낸 건 새벽 2시 43분이었다.
카드 결제 시각과 석주의 문자 도착 시간을 곁에 두고 추측하니, 저를 호텔방에 두고 나간 지 얼마 안됐다던 말은 사실인 거 같았다.
“그러고 보니, 유독 석주 녀석답지 않게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리됐었지.”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제 물건을 협탁 위에 가지런히 놓아둔 게 이상한 일이었음을.
문석주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짓이었다. 세심함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녀석이었다.
제가 편히 자거나 말거나, 넥타이를 더 조였을지언정 친절하게 풀어 곱게 접어두지는 않았을 테지.
지갑과 핸드폰도 마찬가지였다. 세경이 했다면 모를까, 석주가 그랬다면 정돈은커녕 어딘가에 휙 집어 던졌을 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난밤 제가 꾼 꿈은…….
“아니, 꿈이 아니라 진짜 있었던 일이지.”
태조가 짙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 물 흐르듯 모든 것이 다 기억 난 건 아니었지만, 몇 가지 장면만큼은 확실하게 떠올랐다.
호텔에서 나온 그날, 잠깐 눈을 붙였을 때 보았던 그 환영도 마찬가지였다.
셔츠 앞섶이 물에 젖었던 장면도 꿈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손이 굳어 셔츠 단추를 풀지도 못하는 걸 세경이 대신 풀어줬었지. 물을 먹다 흘린 제게 수건을 건네주기도 했고.
“두 사람이 같이 들어왔다 나간 줄 알았는데.”
태조가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만약 제가 떠올린 것들이 확실하다면, 세경은 석주가 나가고 나서도 한참 동안 제 방에 남아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 말인즉슨, 그 미친 곰이 술에 취해 정신도 못 차리는 저와 윤세경을 룸에 두고 홀랑 떠났다는 뜻이었고.
“역시 CCTV를 확인해봐야…….”
그래야 모든 게 명확해질 것 같았다.
메신저 앱을 띄운 그는 친구 목록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S호텔과 관계되는 사람이 누가 있을지를 생각했다.
물론, 형이나 형수를 통하면 쉽게 소개받을 수는 있겠지만. 두 사람에게 부탁하면 시끄러워질 수 있었다.
“어?”
태조의 손가락이 익숙한 이름 위에서 멈추었다. S호텔 대표의 조카였다. 재작년쯤인가, 뉴욕 지사로 발령이 났다던.
“이 녀석, 지금 한국에 있나?”
태조는 바로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자 곧 화면이 바뀌며 낯선 번호 하나가 떠올랐다.
- 여, 진태조. 오랜만이다.
“너 지금 한국에 있어?”
- 어. 안 그래도 연락하려고 했는데. 내가 온 건 또 어떻게 알았냐?
반대편에서 쓸데없는 사족들이 달라붙었다. 귀찮다는 듯 짧게 혀를 찬 태조가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그가 트레이에서 반짝거리는 귀걸이를 보며 입술을 끌어올렸다.
“나 부탁 하나만 좀 하자.”
***
“으아, 떨려.”
기도하듯 두 손을 모은 유나가 다리를 달달 떨었다.
임 피디와의 미팅이 잡힌 날이었다. 부탁을 받고 유나를 따라온 세경은 말차 라테를 마시며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피디와 미팅을 하는 게 처음도 아니건만, 유나는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반면 그 옆에 있는 원호는 오히려 덤덤한 얼굴이었다.
“원호 씨는 담담한데, 넌 왜 그렇게 떨어?”
세경이 웃으며 하는 말에 유나가 남편을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왜 자기는 긴장 안 해?”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긴장할 게 뭐 있어? 오늘은 그냥 가벼운 미팅이라며.”
“가벼운 미팅이라도, 마음은 무거워야지. 자기야, 정말 내 말 새겨들은 거 맞지?”
“응. 다 기억한다니까. 쉽게 출연 결심한 거 아니라고.”
원호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유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오히려 원호가 유나보다 방송 선배인 것 같았다.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기에 더 용감해질 수 있는 걸까.
“아, 미안. 오래 기다렸나?”
그때 임 피디가 메인 작가와 함께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안면 있는 유나와 세경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그녀는 초면인 원호에겐 자기소개부터 했다.
“임소라예요. <달콤살벌 부부이몽> 프로그램을 맡고 있고요. 임 피디라고 불러주세요.”
“지원호입니다. 그리고 이쪽 분은…….”
“이쪽은 저희 프로그램 메인 작가예요. 아, 마실 건……. 이미 사 오셨구나.”
“네. 근데 작가님이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일단 아메리카노랑 바닐라 라테로 사 왔는데…….”
유나가 가지고 온 음료를 두 사람 앞으로 밀어주었다. 임 피디는 바닐라 라테를 메인 작가에게 넘기며 웃었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원래는 우리가 대접해야 하는 건데. 음, 근데 세경 씨는 여기에 어쩐 일로?”
“유나랑 같이 왔어요. 방송은 오랜만이라 그런지, 같이 와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아, 유나 씨가 지금 소속사가 없지. 혹시 세경 씨가 매니저 역할을 해주는 거야?”
“그건 아니고요.”
어색하게 웃은 세경이 고개를 저었다. 임 피디가 시원한 커피를 쪼옥 빨아 마시며 세경을 바라보았다.
“나중에 세경 씨도 우리 프로 출연하면 좋겠다.”
“저요? 저는…….”
결혼을 안 했는데요…….
세경이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자, 임 피디가 큭큭 웃었다.
“아니. 부부로 나오라는 건 아니고. 나중에 유나 씨 촬영할 때 손님으로.”
“어? 저희 촬영 한 번만 하는 거 아닌가요?”
임 피디의 말에 유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음, 일단 2-3회차 촬영해 보려고. 지금은 게스트 출연이지만 반응이 좋으면 고정으로도 생각하고 있어.”
“고정…….”
유나가 얼떨떨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원호가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음, 그래서 말인데 첫 번째 촬영은…….”
임 피디가 작가와 함께 첫 촬영에 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세경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 잠시 딴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왜 호텔에 왔을까?’
생각의 꼬리는 난데없이 휴식을 취하겠다며 호텔에 온 태조에게로 향했다.
호텔로 쉬러 올 필요가 없는 사람이, 하고많은 호텔 중 그곳을 찾아온 이유는 뭘까.
불안하게 또 하필 17층 객실을 받아서…….
‘그리고 그건 분명 선을 긋는 거겠지?’
세경은 아몬드를 제 손에 쥐여 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라 눈치를 준 태조를 떠올렸다.
같이 술을 먹자 농담으로 던진 걸, 자신은 또 진지하게 받아들었다.
그 상황에선 농담하지 마세요, 라고 가볍게 넘겼어야 했는데.
혹시 그 일로 제 마음을 눈치챈 건 아닐까?
어딜 쫓아오냐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라고 한 건, 그 선을 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였을지도.
“하아.”
오랜 짝사랑의 종지부가 이런 식으로 나는 건가 싶어, 세경의 입에서 탄식 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
그러다 문득, 저를 향한 시선이 느껴져 세경이 고개를 돌렸다. 회의실에서 이야기를 하던 네 사람이 일제히 세경을 보고 있었다.
“왜 그래, 세경 씨? 뭐가 마음에 안 들어?”
“네? 무슨…….”
세경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유나가 종이를 팔락거렸다.
첫 촬영 주제가 별로냐는 뜻이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고.
세경은 민망한 얼굴을 한 채 손을 저었다.
***
“와, 나 한국 온 지 보름밖에 안 됐는데. 여기서 일하는 건 또 어떻게 알고.”
태조는 옆에서 구시렁대는 친구의 투덜거림을 한 귀로 흘려들었다.
알고 연락한 건 아니고, 운 좋게 걸려들었던 거였다.
불과 한 달 전까지 뉴욕에 상주하고 있던 창욱은 소리 소문 없이 들어와 현재 S호텔의 법무팀 팀장을 맡고 있었다.
“우리 고모님이 이런 일 절대 허락 안 해 주셔. 지인이고 뭐고 간에, 요즘 개인 정보 유출되면 끝장이거든. 특히 호텔이잖냐. 그러다 보니 이미지 안 좋아지는 건 말할 것도 없지. 그래서 CCTV도 우리가 관리하는 게 아니라 다 위탁해서 운영하고 있어. 그래서 그거 돌려보려면 사람 또 불러야 한다고.”
제가 얼마나 힘든 부탁을 들어주는 건지 알아 달라는 듯, 생색 한번 구구절절했다.
“알아. 어려운 부탁인 거. 그래서 너한테 많이 고마워하고 있고.”
태조가 무심한 인사를 건넸다.
사실 그가 호텔 CCTV를 보고 싶다고 했을 때, 창욱은 대번에 그 부탁을 거절했었다.
아무리 제가 호텔 대표의 조카고, 개인 정보책임자라고 해도, 지인의 부탁이라는 이유로 그런 걸 들어주게 되면 이런 요구가 한도 끝도 없을 거라나 뭐라나.
하여 태조는 영 불가능하면 경찰을 대동하겠다 하였다. 탐탁지는 않지만 이마저도 불발되면 정말 경찰에게 도움을 청할까, 고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출근한 지 보름도 안 되어 일이 커지는 게 싫었던지, 창욱은 날짜와 시간만 특정해주면 CCTV를 보여주겠다고 하였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겐 이번 일을 함구할 것, 외부 유출은 금지할 것, 저와 동행할 것 등등의 단서가 붙긴 했다.
“오셨습니까, 민 팀장님.”
문득 들려온 인사 소리에 태조가 고개를 들었다. 직원 통로로 이동해 보안실 앞에 다다르자, 그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덩치가 좋은 남자는 호텔 보안팀 직원이었다.
“네. 부탁한 건 다 됐습니까?”
“예. 말씀하신 일자와 시간으로 세팅해 두었습니다. 한데 이분은…….”
직원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태조를 훑었다. 관계자 외의 사람은 들어올 수 없는 구역이다 보니, 낯선 이를 경계하는 모양이었다.
“아, 저와 같이 영상 좀 확인하고 나올 겁니다.”
창욱의 말에 보안팀 직원이 곤란한 낯을 했다.
“저…… 민 팀장님. 제가 지시하신 대로 준비는 했지만, 보안실에 외부인이 드나들면 후에 저희가 문책당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만입니다. 이 사람이 해당 영상에 나온 당사자이기도 하고. 잠깐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요. 안 그러면 일 크게 만들 녀석이라.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이 일로 문제 생기면 내가 책임질 테니까, 그건 걱정 마시고요.”
보안팀 직원을 안심시킨 창욱이 안으로 들어갔다. 태조도 가볍게 묵례를 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자, 빨리빨리 확인하고 나가자고.”
태조가 문을 닫고 들어오자, 창욱이 모니터 앞에 섰다. 탁, 정지된 영상을 재생시키자 화면을 보는 태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새벽이라 그런지, 복도엔 사람 하나 지나가지 않았다. 그러다 얼마 후, 누군가 모니터에 나타났다.
만취한 태조와 그를 부축한 석주, 그리고 세경이었다.
“아주 떡이 됐네. 떡이 됐어.”
놀릴 건수를 하나 잡은 듯, 창욱이 휘이, 휘파람을 불었다. 세 사람이 룸 안으로 들어가자 태조는 영상을 앞으로 넘겼다.
이윽고 룸을 나오는 석주의 모습이 보였다. 금방 나왔다는 말대로, 그가 룸에 머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런데…….
“…….”
이때쯤 같이 나와야 할 세경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음? 방금 너 포함해서 세 명이 들어가지 않았냐?”
뒤에서 화면을 보고 있던 창욱이 한마디 덧붙였다. 태조는 이를 으득 문 채 다시 화면을 넘겼다.
그렇게 몇 시간이 더 지났을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세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탁.
태조는 화면을 멈춘 채, 시간을 확인했다. 석주가 룸을 나간 게 새벽 2시 23분. 세경이 나온 건, 새벽 4시 58분이었다.
“어, 음, 이거…….”
창욱이 슬쩍 태조의 눈치를 살폈다.
찰나 간 보안실에 정적이 감돌았다.
2시간 35분. 남녀가 역사를 쌓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너.”
긴 정적을 깨고 태조가 입을 열었다. 창욱이 도르륵 눈을 굴려 태조를 쳐다보았다.
마주친 그의 눈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이거 밖으로 나돌면 죽는다.”
협박하는 입은 그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