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테크닉이 별로였나 보지.
(16/100)
16. 테크닉이 별로였나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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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테크닉이 별로였나 보지.
2022.09.24.
코끝을 간질이던 달큼한 향기, 이따금 환청처럼 들려오던 달뜬 목소리, 보일 듯 말 듯, 제 꿈에 나타나 저를 흥분시키던 얼굴.
몇 주간 찝찝한 마음에 저를 미친놈처럼 굴게 만들었던 존재를 확인하자 헛웃음만 나왔다.
어쩐지 호텔에서 마주친 그날 아침, 세경이 제게 헛개차를 주는 게 영 이상하다 싶었더니.
술에 떡이 된 제 모습을 봐서 그런 거였다.
먹고 정신 좀 차리라고.
그나저나, 이 괘씸한 것들을 어찌한다?
태조는 어쩌다 일이 이렇게 복잡해졌는지를 생각해보았다.
문석주가 그날 세경과 같이 룸에 들어갔던 걸 먼저 털어놓기만 했더라도.
새벽에 저를 호텔에서 봤냐고 물었을 때, 세경이 그렇다고 솔직히 답을 했더라면.
그럼 자신이 호텔 CCTV까지 뒤져볼 일은 없지 않았을까?
“…….”
태조의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아무튼 망할 곰과 순한 양……. 아니, 양의 탈을 쓴 앙큼한 고양이가 같이 합심해 저를 속인 탓이었다.
자신을 이렇게 집요한 미친놈으로 만든 건.
“짜장면 비벼놓고 제사 지내냐? 면 불어. 빨리 먹어.”
오독오독 단무지를 씹은 우현이 리모컨을 들었다.
점심으로 짜장면이 먹고 싶다고 아침부터 징징거리기에 사무실에서 음식을 배달시켜 먹는 중이었다.
뒤늦게 젓가락을 놀린 태조가 뭉친 면을 풀어 입에 넣었다.
그때였다. 태조의 귀가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사연에 반응한 것은.
[솔직히 술기운에 실수한 거 같은 느낌도 들었어요. 저도 많이 마셨지만, 그녀도 몸이 비틀거릴 정도로 마셨거든요.
하지만 전 그녀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고, 오히려 약간의 호감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게 팔짱을 끼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죠.
그날 밤, 저흰 뜨거운 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었어요. 아침에 일어나니 그녀는 옆에 없었고, 저는 다음날 다시 그녀와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한데, 그녀는 어젯밤 일을 모른 척하는 거예요. 본인은 술에 취해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고…….]
누가 제 이야기를 각색했나.
화면을 노려본 태조가 인상을 썼다.
연애 상담 프로그램이었다. 신청자가 보낸 사연을 읽고 패널들이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슬쩍 옆을 보자, 짜장면 그릇을 든 우현이 면치기를 하며 티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넌 왜 그런 거 같냐?”
“뭐가?”
태조가 턱 끝으로 티비를 가리켰다. 양파를 춘장에 찍어 우물거린 우현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테크닉이 별로였나 보지.”
“…….”
남은 양파를 다 처넣어 줄까.
제 얘기도 아닌데 괜히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태조는 다시 젓가락질을 하며 티비로 시선을 던졌다.
패널들은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 기억이 안 난다는 건 거짓말이고. 잠자리는 실수였을 수도 있지. 그래서 모른 척하는 거야. 여자분이 마음이 있었으면 사연자가 깨어 있을 때까지 옆에 있지 않았겠어?
- 필름이 끊긴 건 진짜일 수도 있지.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상황은 대충 파악했을 테니……, 여자분이 모른 척하는 건 없던 일로 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닐까?
- 그러니까, 모른 척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는 건데요?
- 그거야 당사자가 아니면 모르지. 관심은 있었는데 막상 해보니 별로였을 수도 있고, 진짜 술기운에 취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니면……. 사실은 따로 애인이 있으니까, 덮고 싶어서?
- 와, 마지막은 최악인데…….]
“봐라, 저 사람도 그러잖냐. 해보니 별로라고.”
제 말이 맞지 않냐며, 우쭐한 우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태조는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그럼……, 윤세경은 왜 그런 거지?
***
잠에서 깬 세경이 느리게 눈을 껌뻑거렸다. 차 안은 고요하고 적당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숙면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이.
“…….”
대체 얼마나 잠이 들었던 걸까.
한창 도로를 달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차는 움직임이 없었다. 고개만 돌려 창밖을 보자 라인을 따라 주차된 차들이 보였다.
“깼어요, 누나?”
핸들에 기대 영상을 보고 있던 제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 세경은 뻐근한 몸을 이리저리 돌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언제 도착했어? 다 왔으면 깨우지.”
“저도 그럴까 했는데, 누나가 아까부터 몸이 안 좋은 거 같아서요. 10분만 더 재우고 깨우려고 했어요.”
“운전도 오래 해서 피곤할 텐데. 괜히 나 때문에 퇴근도 늦어지잖아.”
“아니에요. 도착한 지 이제 30분도 안 됐어요.”
“이것도 네가 덮어준 거야?”
세경이 제 몸을 덮고 있던 담요를 들어 보였다.
“네. 아까 휴게소 들렀을 때요. 근데 누나 정말 피곤하셨나 봐요. 제가 문 열어도 안 깨시던데.”
“체력이 좀 떨어졌나 봐. 요즘은 금세 피곤해지네.”
세경이 힘없이 웃자, 제훈이 걱정을 덧붙였다.
“보약이라도 드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 그보다 속은 어떠세요? 낮에 사 온 수프도 제대로 못 드셨잖아요. 계속 속이 비었을 텐데, 올라가 계시면 제가 근처에서 죽이라도 사다 드릴게요.”
“괜찮아. 지금은 별로 생각도 없고.”
담요를 접어 옆자리에 둔 세경이 가방을 들었다. 새벽부터 부산과 서울을 왕복한 그에게 더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뭘 먹고 싶다기보단, 씻고 침대에서 푹 잠들고 싶은 마음이 더 크기도 했고.
“그만 들어가 봐. 오늘 고생했어.”
“네. 누나도요. 내일은 스케줄도 없으니 푹 쉬세요.”
제훈의 인사를 받은 세경이 차에서 내렸다. 밴이 떠나자, 그녀는 룸으로 올라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피곤해.”
한숨처럼 중얼거린 세경이 귀걸이를 풀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체력이 떨어졌는지 차에서 내내 잤는데도 몸이 무거운 느낌이었다.
“누가 씻겨줬음 좋겠네.”
화장을 지우는 것도, 욕실에 들어가는 것도 다 귀찮았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대로 누워 잠이 들고 싶을 뿐.
“…….”
세경은 잠시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느릿느릿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세안과 샤워를 마치고 거울 앞에 선 세경이 제 뺨을 만져보았다.
“살이 좀 빠졌나?”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먹는 게 영 시원찮았다.
오늘 낮의 점심도 그렇고, 제훈이 저를 생각해 사 온 수프도 반도 비우지 못했다.
지난번, 유나와 임 피디를 만난 후 저녁을 먹으러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몸보신도 할 겸 유나가 저를 먹이겠다고 살이 통통한 장어를 구워주었지만, 정작 세경은 세 점도 먹지 못했다.
그날따라 유독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기 때문이었다.
‘그래? 나는 다른 곳보다 별로 냄새도 안 나는 것 같은데.’
세경이 선뜻 장어를 입에 넣지 못하자, 유나가 한 말이었다.
예민한 걸로 따지면 저보다 유나가 더 심했던 거 같은데. 원호도 괜찮다고 하니 제 후각이 고장이라도 난 것 같았다.
아니면 며칠 전부터 얹힌 듯한 느낌이 들어서 그런 건가.
“왜 이렇게 속이 더부룩…….”
제 상태를 읊조리던 세경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는지, 진한 갈색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설마…….”
욕실에서 나온 세경이 핸드폰을 들어 달력에 체크한 날짜를 확인했다.
그녀는 초조하게 손톱을 깨물었다. 원래부터 규칙적인 건 아니었지만.
“늦어.”
이때쯤 시작해야 할, 달거리가 늦어지고 있었다.
***
테라스로 나온 태조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는 밤하늘에 뿌연 연기를 내뿜으며 생각에 잠겼다.
한동안 귀신인지 몽상인지 헷갈리는 존재를 찾느라 정신이 없어 깊이 생각하지 않았는데…….
진짜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내가 윤세경이랑 밤을 보낸 건 맞는 것 같고.”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 속엔 여러 장면이 뒤섞여 있었다. 세경의 손에 입술을 묻고, 살을 비비고, 입을 맞추면서 그녀가 제 목을 휘감는 것 같은.
세경이 쓰는 그 달큼한 향수 냄새와 입안으로 빨려 들어오던 말캉한 감촉이 꽤나 기분 좋았었다.
그래서였다. 살짝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금 부딪쳤을 때, 그녀의 몸을 더 끌어안고 탐했던 건.
태조는 복잡한 얼굴로 담배를 짓씹었다.
그럼 왜 윤세경은 그날 갑자기 저와 잠을 잤을까.
사실 가장 중요한 건, 저거였다. 만취한 저와 달리 그날 세경은 술에 취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왜 세경은 그날 저와 잠자리를 가진 것도, 룸에 있었던 사실조차 알려주지 않으려던 걸까?
‘테크닉이 별로였나 보지.’
낮에 티비 속 사연을 듣고 대답하던 우현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망할 새끼. 별로긴 누가.
태조가 담배를 비벼 끄고 안으로 들어갔다.
순한 양인 줄 알았더니, 앙큼한 고양이가 따로 없었다. 부뚜막도 아니고 제 위에 올라타곤 어쩜 그렇게 모른 척 입을 싹 닦고 있나.
딩동!
딩동딩동딩동!
요란하고 주책맞은 벨소리에 태조가 인터폰으로 방문객을 확인했다. 문을 열어주자 쿵쿵, 묵직한 발소리를 내며 석주가 들어왔다.
“야, 무슨 일이기에 한국에 오자마자 네 집으로 오래?”
중문을 연 석주가 투덜거렸다. 태조는 저쪽으로 가라는 듯 턱 끝으로 거실을 가리켰다.
“일단 앉아. 술은 뭐로 할래? 맥주? 위스키?”
“아니, 왜 오자마자 술을 먹이려고 그런대? 무슨 말을 하려고.”
소파에 앉은 석주가 태조의 눈치를 봤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사방에 덫이 쳐져 있는데 그 한가운데로 들어간 느낌이랄까.
“용건만 간단히 해. 용건만. 나 공항에서 바로 온 거야. 빨리 쉬고 싶다고.”
“그래? 그럼 나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주방으로 가려던 태조가 석주의 맞은편에 앉았다.
“너 왜 나한테 거짓말했냐?”
“응? 무슨 거짓말?”
정말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석주가 두 눈을 껌뻑거렸다.
“그날 호텔 방에 세경 씨도 같이 들어갔잖아.”
“아, 그거…….”
빠져나갈 궁리를 하듯, 눈동자를 굴린 석주가 입을 열었다.
“세경이가 말했냐?”
“…….”
“그게……. 처음엔 내가 어머니 병원 수속을 밟느라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고, 그다음엔 세경이가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해서. 네가 기억도 못 하는데, 괜히 신경 쓰이게 말할 필요가 있겠냐고 하더라고.”
“그게 다야?”
“그럼 또 뭐가 있어? 아, 네가 물 찾는다고 그거 먹이다가 좀 흘렸다고는 했는데. 혹시, 너 쪼잔하게 그거 때문에 그래?”
“그건 티도 안 났어.”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
태조는 물끄러미 석주를 바라보았다. 이 맹한 곰, 그 와중에 이상한 걸 못 느꼈다는 건가?
“그보다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어? 세경 씨가 그날 일 숨기려고 하는 건.”
“음, 나도 처음엔 그랬는데…….”
말끝을 흐린 석주가 태조를 흘긋댔다.
“그래서 난 네가 무슨 사고라도 친 줄. 세경이가 그걸 덮어주려고 너한테 비밀로 해달라 그런 줄 알았지.”
“왜 사고를 쳐도 내가 치는 건데?”
“그럼 세경이가 치겠냐?”
아, 뭔가 굉장히 억울한데, 이거…….
“너 잘 때 옷 벗고 자잖아. 혹시 네가 흉한 꼴 보인 거 아니냐고.”
“안 벗었어.”
윤세경이 나를 벗겼지.
“암튼, 지금 너 그거 확인하려고 나한테 오라고 한 거냐? 해외 로케까지 다녀와서 피곤해 죽겠는데.”
먼저 저를 속인 게 누군데. 이제 다 까발려졌다고 말하는 본새가 아주 뻔뻔해졌다.
“나 여기서 자고 갈란다. 밥도 주고 술도 줘. 맥주는 말고. 독일에서 질리도록 먹고 왔으니까.”
석주가 씻고 나오겠다며 욕실로 들어갔다. 태조는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다 마지못해 음식을 배달시켰다.
잠시 후, 욕실에서 씻고 나와 태조의 옷까지 찾아 입은 석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냐, 저거?”
“뭐가.”
“욕실에 있는 거 말이야. 어울리지 않게 무슨 디퓨저냐고.”
세경이 준 디퓨저를 말하는 거였다. 제 방에서 공용 욕실로 옮겨놓은.
하긴, 그게 저랑 안 어울리는 향이긴 하지.
“근데 저거 어디서 많이 맡아 본 거 같은데.”
“그거 세경 씨한테 받은 거야.”
“그래? 근데 세경이가 왜 너한테 저걸 줬어?”
이 둔한 곰. 한숨을 쉰 태조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진짜, 저 곰의 가죽을 벗길 수도 없고.
“그보다 너 세경 씨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뭘?”
“내가 그날 호텔 룸에 세경 씨가 들어왔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거 말이야.”
“……으응? 그거 세경이가 먼저 말했던 거 아니었어?”
“아니. 방금 네가 다 털어놓은 건데?”
“아…….”
낚였다는 듯, 석주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주방으로 들어간 태조는 장식장에서 양주를 꺼내왔다. 그리고 석주에게 술을 따라주며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세경 씨가 나 좋아하냐?”
“미친, 술 먹기도 전에 주정은.”
불퉁하게 중얼거린 석주가 술잔을 기울였다.
‘망할 곰 새끼.’
태조는 살벌한 미소를 지은 채, 술잔을 꽉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