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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이거, 제 거 아닌데요? (17/100)


17. 이거, 제 거 아닌데요?
2022.09.28.


속쓰림을 호소하며 실신한 곰 한 마리의 배송을 마치고, 태조는 느지막이 출근을 했다.

그는 지나가는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옥상으로 향했다.

탁 트인 하늘 정원에서 담배 하나를 입에 문 그가 허공으로 하얀 연기를 내뿜었다.

머릿속으론 어떻게 윤세경을 꾀어낼까 하는 궁리를 하면서.


“문석주의 증언도 확보했고, CCTV도 확인을 마쳤는데 말이지.”

귀걸이 한쪽도 제게 있으니, 세경이 자신과 한 방에 있었다는 걸 추궁할 만반의 준비는 다 갖추어져 있었다.

다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자신은 세경에게 그날 일을 물어 뭘 하고 싶은 걸까. 그리고 그녀가 자신과 잤다는 걸 인정하면, 어떻게 되는 거고?


“…….”

생각에 잠긴 태조가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사실 이대로 묻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자신을 찝찝하게 만들었던 그날 밤 기억도, 그 상대도 다 기억난 데다 정작 세경이 그날 일에 대해 숨기고 있으니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지금처럼 소속사의 대표로, 자신이 케어해야 하는 연예인으로. 서로 비즈니스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지금처럼 쭉 지내는 게 최상의 상황이긴 했다.

그래, 그게 최상의 상황이긴 한데…….

그런데 왜 자꾸 머릿속에서 그 일이 떠나지 않는 건지.


“여러모로 신경 쓰이게 하네, 진짜.”

태조가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었다.

윤세경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하는 여자였다.

코피를 쏟아내던 강렬한 첫 만남 이후, 태조는 종종 방송에 나오는 그녀를 보곤 했다.

얼마나 변화무쌍한지, 같은 인물인지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그녀는 출연하는 방송마다 이미지가 달라 보였다.

때로는 청순해 보이기도 했고, 때로는 귀여운 악녀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슨 음악 방송에 나왔을 땐 온몸에 펄을 칠한 건지 반짝반짝 거리기도 했고.

그러다 언제였을까. 석주가 연예 뉴스를 보다 한번 호들갑을 떤 적이 있었다.

세경이 촬영 중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다고 했다.

석주의 촬영장에 갔다 코피를 흘리던 세경을 본 지 얼마 되지 않아 들려왔던 소식이었다.

그 망할 소속사, 일을 그따위로 하다 사고 한번 칠 줄 알았지.

태조는 하얗게 언 얼굴로 연신 괜찮다 말하는 윤세경을 떠올리곤 속으로 욕을 씹었다.

그녀가 제 회사 소속 연예인이 아니었는데도.


‘그 소속사 계약 만료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라 그래.’


‘누구? 세경이? 도망치면, 다음엔 어디랑 계약하라고. 우리 소속사?’


‘대한민국에 소속사가 우리 하나야? 그 정도 필모면 찾는 데도 많을 거야.’

 
문석주와 저런 말을 주고받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결국 제 회사로 데리고 왔지. 또 어디서 그런 머저리 같은 회사와 계약할까 봐.

물론 놓치기 아까운 면도 있었고.

옆에서 계속 챙겨줘야 할 것 같아서일까.

저를 홀랑 잡아먹고 도망친 그녀에게 화가 나야 하는데, 오히려 묘한 오기와 승부욕이 들끓었다.

이쯤 되니, 저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왜 저와 잔 건지 이유는 한번 들어보고 싶었다.


“조만간 한번 불러야겠는데.”

태조가 담배를 비벼 끄며 옥상을 내려왔다. 그리고 사무실로 가던 중,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그를 불러 세웠다.


“신제훈 씨.”

사무실로 들어가려던 세경의 매니저가 뒤를 돌아보았다. 태조의 부름에 고개를 꾸벅 숙인 제훈이 냉큼 그의 앞으로 달려왔다.


“지금 바쁩니까?”

“아니요. 안 바쁩니다.”

“오늘은 세경 씨 스케줄이 없나 봐요? 사무실에 있는 거 보니.”

“네. 모처럼 일이 없어서 누나는 호텔에서 쉬고 계실 거예요.”

“그래요. 바쁘지 않으면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했으면 하는데.”

“네? 저랑…… 이야기요?”

대표님과 단독 면담이라니. 이 무슨 심장 쫄리는 소리인가?


“오래 잡고 있진 않을 겁니다. 잠깐 안으로 들어와요.”

태조가 탕비실 쪽을 까닥거렸다. 잔뜩 긴장한 제훈이 뻣뻣한 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마실 거는?”

“저는 커피 마시겠습니다.”

혹시나 태조가 하겠다고 할까, 잽싸게 움직인 제훈이 커피머신을 작동시켰다.


“대표님은요?”

“나는…….”

냉장고 안을 힐끗거린 태조는 그 안에서 헛개차를 하나 꺼냈다.


“어제 과음을 좀 해서.”

딱, 뚜껑을 딴 태조가 헛개차를 들이켰다. 제훈은 뜨끈하게 내려진 커피를 두 손으로 잡고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제게 무슨 이야기를…….”

“아, 요즘 세경 씨 어떤가 해서.”

“세경이 누나요? 어,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물어보시는 건지…….”

“그냥 전반적으로. 호텔에서 생활하니까 불편함은 없는지. 외부 활동이나, 대인 관계, 뭐 이런 것들?”

“그런 거라면…….”

제 이야기가 아니구나.

안도한 제훈이 턱 끝을 긁적이며 생각에 잠겼다.


“저번에 예능 촬영할 때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어요.”

“트러블? 누구랑?”

“그…… 예전에 같이 활동하던 걸그룹 멤버요. 전부터 사이가 안 좋았던 거 같은데, 누나만 활약해서 자기는 묻혔다고. 괜히 세경이 누나한테 시비를 걸더라고요.”

마치 제가 당한 일인 양, 말을 하는 중간중간 제훈이 씩씩거렸다.


“그래서 윤세경 씨는 잠자코 듣고 있었어요?”

“아니요. 누나가 몇 마디 하니까 그분이 울면서 나가더라고요.”

“울면서 나가? 뭐라고 했길래.”

“별말 안 했어요. 다 옳은 말이었지. 자기가 팀도 아닌데 일일이 다 챙겨줘야 하냐고. 그날 그분이 정식 게스트가 아니었거든요. 영화 쪽 사람이 나오기로 했는데, 그분이 갑자기 다쳐서 방송국 쪽에서 급히 섭외한 거라……. 그래서 누나가 본인이 돋보이지 못했다고 억울해하지 말라고 했어요. 이거 원래 영화 홍보 때문에 잡힌 거니까.”

태조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순둥이처럼 가만히 듣고 있을 줄 알았더니. 솜뭉치 같은 잽이어도, 아주 제법이었다.


“그 사람 이름은 뭡니까?”

“임주희요.”

“임주희……. 그 외엔 별다른 일은 없었어요?”

“음. 아, 안 그래도 호텔을 좀 바꿔야 하나, 하는 생각은 했어요. 누나가 괜찮다고 해서 그냥 두긴 했지만.”

“호텔을? 왜?”

“저번 화보 촬영 때, 벌레에 물렸는지 등이랑 어깨에 빨간 자국이 좀 있더라고요. 그래서 채 실장님이 그거 가려주셨거든요.”

태조의 머릿속에 문득 야릇한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제 품에서 바르작거리던 여자의 몸. 그리고 등을 돌린 여자의 피부 위로 제 입술을 미끄러트렸던.

꽤 달고 부드러워서 여러 번 깨물었던 거 같은데. 그렇다면…….


‘그 벌레가 나인가?’

태조의 눈썹이 느릿하게 꿈틀거렸다. 그는 목이 타는 듯 헛개차를 들이켰다.


“혹시 세경 씨 만나는 사람은 없어요?”

“만나는 사람이요? 제가 아는 한은 없어요. 누나가 은근 집순이시잖아요. 촬영장이랑 호텔만 왔다 갔다 하세요. 아, 유나 씨랑 가끔 만나시고. 안 그래도 채 실장님이 연애 안 하냐고, 숍에 오는 손님들 소개해주신다는 말씀도 하셨어요.”

태조가 뭣도 모르고 흘려대는 정보를 차곡차곡 머리에 저장했다.


“그 외엔? 별다른 특이 사항은 없고요?”

“요즘 많이 피곤하신지 차에서 좀 깊게 주무시더라고요. 입맛도 없으신 거 같고. 좋아하는 것도 잘 못 드시는 거 같아요.”

태조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증상 같기도 한데.


“요즘 세경 씨 스케줄이 많았던가?”

“조금요. 영화 홍보 때문에 지방엘 많이 돌아다니시긴 했어요.”

뭐, 그럼 피곤할 만도.


“제훈 씨가 잘 챙겨줘요. 윤세경 씨 괜찮다는 말이 입에 습관처럼 붙은 사람이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럼 나가봐요. 아, 혹시 세경 씨가 사무실에 들를 일 있습니까?”

“내일이나, 내일모레쯤 한번 오실 거예요. 시나리오 확인하실 게 있어서.”

태조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훈이 탕비실을 나가자, 그는 남은 헛개차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애인이 있는 최악의 상황은 아닌 거 같고.”

그렇다면 실수 아니면 테크닉이 별로였다는 건가?

아니, 어쩌면 세경이 저를 좋아하는 걸 숨기는 걸지도…….


‘미친, 술 먹기도 전에 주정은.’

 
제 추측을 조롱하듯 석주의 목소리가 머리에 울렸다.

꽈득.

태조는 병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

늦은 아침을 맞이한 세경은 창백한 낯을 쓸어내렸다.

늦어지는 생리에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아침부터 사용한 임신테스트기는 혹시나 하는 의구심에 확신을 심어주듯 선명한 두 줄을 보여주고 있었다.

당연히 날을 헤아릴 것도, 아이 아버지가 누구일까 하는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다.

세경이 몸을 섞은 사람이라곤 태조가 유일했으니.


“…….”

얇은 입술이 꾹 맞물렸다.

뒤늦은 실수가 떠올랐다. 계획을 했던 것도, 그와 잠자리를 예상했던 것도 아니었던 터라 사전에 아무런 준비를 하지 못했다.

그날 밤 일은 예고도 없이 쏟아진 소나기와 같았다. 피할 수도 없었고, 무언가를 계산할 수도 없었던.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던 사람의 눈에, 제 얼굴이 오롯이 담긴 순간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저 그때가 아니면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와 입술이 닿는 일도, 서로의 피부가 닿는 일도.


“다시 한번 검사를…….”

세경은 새 임신테스트기에 시선을 던졌다. 다시 한번 해보면 이 선명한 두 줄이 하나로 변할까 싶어서.

아니겠지. 확신에 확신이 더해진다면 모를까.


“하아.”

깊어진 고민만큼 한숨도 짙어졌다.

세경은 두 줄이 선명한 임신테스트기를 상자에 담아 가방에 집어넣었다.

이 방을 누가 쓰는지 다들 알 텐데, 자신이 투숙하는 룸에 이걸 두고 다닐 수도, 그렇다고 쓰레기통에 버릴 수도 없었다.


“대표님한테도…… 말해야겠지?”

세경은 곤란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태조에게 말을 꺼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대표님은 기억에 없으시지만, 제가 그날 대표님과 밤을 보냈다고? 그래서 그날 아이가 생긴 것 같다고…….


“안 돼. 완전히 경멸당할 거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세경이 절망 섞인 목소리를 냈다.

진 대표에게 사실을 털어놓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건 테스트니까. 아직 의사의 소견이 나온 것도 아니고. 병원에 가서 확실히 알아본 다음에…….”

세경이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에게 임신 사실을 확인한 뒤에 말해도 늦지 않을 거다.

그사이 앞으로 어떻게 할지 대책도 세워둬야지. 만약에 임신이라면 잠시 일도 쉬어야 할 테고. 또…….

오만가지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세경이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때 또롱, 맑은 소리를 내며 메시지가 들어왔다.

[누나 11시쯤, 정문 앞으로 갈게요!]

제훈이 보낸 메시지였다. 시나리오와 단기 광고 계약 건으로 사무실에 갈 일이 있어, 그가 데리러 오기로 한 터였다.

세경은 시간을 확인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지갑과 핸드폰을 대충 챙겨 넣고 호텔을 나서자 예정보다 일찍 도착한 제훈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누나. 어젠 잘 쉬셨어요?”

“응. 오늘은 오지 않아도 됐는데.”

“이 근방인데요, 뭐.”

세경이 차에 오르자, 제훈이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도로에 진입한 차는 얼마 안 가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누나, 먼저 올라가세요.”

“넌, 어디 가려고?”

“네. 요 앞에 잠깐. 저도 금방 갈게요.”

손을 흔든 제훈이 골목길로 사라졌다. 세경은 그를 뒤로한 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녀는 멍하게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은 산부인과부터 예약해야겠지. 그런데 그곳에서 자신의 임신 사실을 숨겨줄 수 있으려나.

땡!

맑은 알림음에 생각이 잠시 끊어졌다.

스르륵 문이 열리자 세경이 한발 늦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리고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와 부딪쳐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

“아이고. 미안해, 세경 씨. 괜찮아?”

가방이 떨어지며 안에 있던 물건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세경은 바닥에 흩어진 물건들을 다급히 주워 담았다. 그녀와 부딪친 송 실장도 사과하며 떨어진 립스틱을 건넸다.


“여기. 진짜 미안해, 세경 씨. 어디 안 다쳤어? 내가 엘리베이터 안 놓치겠다고 급하게 뛰어와서.”

“괜찮아요. 그냥 조금 놀라서…….”

세경이 송 실장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엉덩방아를 찧은 탓에 꼬리뼈가 좀 아프긴 했지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급하신 거 같은데, 일 보세요. 저도 가볼게요.”

“아니. 아프면 같이 병원이라도…….”

“좀 쉬면 괜찮을 거예요.”

세경이 고개를 까닥인 뒤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아슬아슬하게 보고 있던 송 실장이 몸을 돌렸다. 그러다 엘리베이터 문가에 떨어진 물건 하나를 발견하고 그것을 주워들었다.


“저기, 이것도 세경 씨 거……. 응?”

상자를 든 송 실장이 두 눈을 껌뻑거렸다.

조금 전까지 바닥에 아무것도 없었고, 이건 분명 세경 씨 가방에서 떨어져 나온 거 같은데…….


“잠깐, 왜 이런 게…….”

세경이 사라진 곳을 쳐다본 송 실장이 안에 있는 내용물을 꺼내 보았다.

툭, 손바닥 위로 떨어진 물건을 본 송 실장이 떡 벌어진 입을 틀어막았다.


“뭡니까, 그건?”

“으악!”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송 실장이 기겁해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임신테스트기를 손에 쥐고 뒤를 돌아보았다.

소리 없이 다가온 태조가 송 실장의 비명에 귀가 따가운 듯 한쪽 눈을 찡그리고 있었다.


“임신테스트기?”

태조가 송 실장의 손에 들린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송 실장님 축하할 일 생겼습니까?”

“예? 어, 그게…….”

송 실장이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렇다고 입 다물고 있다간 제가 임신했다는 오해를 하실 것 같고.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눈가를 일그러트렸다.


“이거, 제 거 아닌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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