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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너 딱 걸렸다고. (18/100)


18. 너 딱 걸렸다고.
2022.10.01.



“송 실장님 게 아니라고요?”

“네.”

송 실장이 태조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아니, 자기 것도 아니면서 임신테스트기는 왜 들고 있나.


“그럼 누구 겁니까?”

“그게…….”

복도를 오가는 사람들을 힐끔거린 송 실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기서 말하기는 좀 곤란한데요.”

태조가 송 실장의 시선을 따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임신한 건 축하할 일인데, 뭐가 그리 곤란한가 싶기도 했지만. 일단 프라이버시는 존중해야 하니,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말하기 괜찮은 곳으로 가죠.”

태조가 따라오라며 앞서 걸었다. 송 실장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슬픈 눈을 하곤 그의 뒤를 따랐다.

대표실로 들어온 태조가 책상 앞에 걸터앉자, 송 실장이 쭈뼛거리며 그의 앞에 섰다. 누가 보면 학생 주임한테 혼나러 온 학생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건 누구 겁니까?”

“아, 음, 그게…….”

장소까지 옮겼지만, 송 실장의 입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바로, 세경은 열애설도 한 번 나지 않았다. 그런데 임신이라니. 이 임신테스트기에 선명한 두 줄이라니!


“송 실장님.”

송 실장의 침묵이 길어지자 태조의 인내심도 슬슬 바닥이 나는 듯했다.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 송 실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마, 세경 씨 거 같은데…….”

“……누구요?”

“세경 씨요.”

“내가 아는 윤세경 씨?”

송 실장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저도 충격이었는데, 진 대표도 충격이지 않으려고.


“확실해요? 아니, 그보다 세경 씨 임신테스트기를 왜 송 실장님이 가지고 있습니까?”

“아까 엘리베이터 앞에서 세경 씨랑 부딪쳤거든요. 그때 세경 씨 가방이 떨어졌는데. 거기서 나온 거 같아요.”

“세경 씨 가방에서 나온 건 확실하고요?”

“예? 어, 그런 거 같은데…….”

“같은데? 아닐 수도 있다는 겁니까?”

“아니. 제가 엘리베이터로 달려갈 때까진 바닥에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그런데, 세경 씨랑 부딪치고 나서 발견했으니까.”

태조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송 실장이 뭔가 다른 가능성을 찾듯 눈을 굴렸다.


“에이, 뭐. 세경 씨 게 아닐 수도 있죠. 다른 사람 걸 가지고 있던 걸 수도…….”

“…….”

태조가 그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눈으로 송 실장을 바라보았다. 대체 누가 남의 임신테스트기를 가방에 집어넣고 다니냐고 묻는 듯했다.


“……예. 그건 말도 안 되죠. 아, 어쩌면 제가 착각한 걸 수도 있겠네요. 세경 씨 가방이 아니라, 누가 흘린 걸 착각했던 걸 수도…….”

울고 싶어진 송 실장은 그냥 저 자신을 탓하기로 했다. 왜 하필 세경 씨랑 부딪쳐서 제가 저걸 발견한 건지.


“그거 줘보세요.”

“뭘요? 이거요?”

송 실장이 들고 있던 임신테스트기를 힐끗거렸다.

태조가 손을 뻗자,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얌전히 그의 손바닥에 임신테스트기를 올려놓았다.


“여기 두 줄 나온 게 뭘 의미하는 겁니까?”

“그거는…….”

송 실장이 난감함에 얼굴을 찌푸렸다.

아직 본인에겐 말도 못 꺼냈는데. 이런 일을 먼저 진 대표에게 알려도 되는 건가 싶어, 세경에게 미안해졌다.


“……임신이 된 거라고.”

태조는 말없이 임신테스트기를 내려다보았다.

머릿속이 순간 멍해졌다. 두 줄이면 임신. 임신이라고…….


“이거 정확도가 어느 정도 됩니까?”

“그 정도로 선명하면, 거의 99프로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러니까, 종합하면 임신 확률은 99프로다?


“지금 세경 씨 어디 있는지 압니까?”

“모르겠어요. 아까 어디로 가는지 보긴 했는데. 한번 찾아볼까요?”

“위치만 한번 알아봐 주세요. 이거에 대해선 함구하시고.”

태조가 임신테스트기를 흔들었다. 송 실장이 알겠다며 사무실을 나가자, 태조는 책상 위에 임신테스트기를 내려놓았다.


“윤세경이 아이를 가졌다고.”

예상도 못 한 소식에 조금 얼떨떨해졌다.

세경을 위해서도 이대로 그날 일을 묻어두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게 불과 며칠 전이었는데.

그는 선명하게 그어진 두 줄을 내려다보다 인터넷에서 임신테스트기를 검색했다.

테스트기를 사용하는 시기는 수정 후 14일 정도. 그러니까 관계 후 2주 정도는 지나야 한다는 소리였다.

세경과 호텔에서 밤을 보낸 지는 한 달 정도 되었고, 신 매니저에게서 세경에게 애인이 없다는 것도 확인했다.

아, 그러고 보니…….


‘요즘 많이 피곤하신지 차에서 좀 깊게 주무시더라고요. 입맛도 없으신 거 같고. 좋아하는 것도 잘 못 드시는 거 같아요.’

 


“하…….”

태조가 뒤늦게 떠올리곤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다 했는데, 저게 다 임신 증상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왜 나한테는 말도 안 한 거지?”

임신한 사실을 숨길 생각이었나? 저를 홀랑 잡아먹고 입을 싹 닦은 것처럼?

똑똑.


“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답을 하자, 고개를 빼꼼 내민 송 실장이 태조에게 보고했다.


“대표님, 세경 씨 지금 점심 먹으러 나갔다고 하는데요.”

“다시 들어온답니까?”

“네. 아직 시나리오 검토하지 못한 게 있어서요.”

“그럼 세경 씨 들어오는 대로, 송 실장님이 나한테 연락 줘요.”

“알겠습니다.”

인사를 한 송 실장이 사무실을 나서자 태조는 보안실로 향했다.

또 제 것이 아니다 시치미를 뗄 수 있으니. 세경의 가방에서 임신테스트기가 나온 걸 제 눈으로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잠깐, CCTV 좀 확인합시다.”

태조의 등장에 덩치 좋은 보안팀 직원이 날쌔게 움직였다.

복도에서 송 실장을 마주친 시간을 대략적으로 떠올린 태조가 CCTV를 앞으로 돌렸다.

그리고 11시 38분.

엘리베이터 앞에서 송 실장과 부딪친 세경의 가방에서 튀어나온 물건을 확인했을 때.


“찾았다.”

태조가 조용히 입술을 끌어올렸다.


 

***

단기 광고 계약서 검토 후, 사무실에 찾아온 동료 배우와 점심을 먹고 오는 길이었다.

배가 불러 그런지 노곤함이 밀려 들어왔다. 세경이 입을 가린 채 하품을 하자, 옆에서 걷던 제훈이 웃었다.


“졸리세요?”

“어, 조금. 너무 많이 먹었나 봐.”

세경이 머쓱한 얼굴로 배를 쓰다듬었다. 요 며칠 먹은 게 시원찮아 그런지, 평소 먹던 것보다 두 배는 먹은 듯했다.

이게 다 임신을 해서 그런 건가 싶기도 하고. 어쩐지 복잡한 마음이었다.


“저는 오랜만에 누나 잘 먹는 거 보니까 좋던데. 제가 조금 이따 모셔다드릴 테니, 잠깐 빈 회의실에 가 계세요. 보셔야 할 시나리오도 가져다드릴게요.”

“응. 그럼 나 여기 들어가 있을게.”

세경이 빈 회의실 안을 가리켰다. 제훈은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사무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세경의 앞으로 들어온 시나리오와 사이다 한 캔을 들고 왔다.


“이건 평소보다 많이 드셨으니까, 소화 좀 시키시라고.”

“고마워.”

창가에 앉은 세경이 사이다 캔을 따서 한 모금 들이켰다. 제훈이 일을 하기 위해 나가자 회의실 안이 고요해졌다.

적막한 회의실엔 차락차락, 종이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나른한 오후의 볕이 세경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배도 부른 데다 날도 따사롭고, 바스락거리며 넘어가는 종이 소리는 자장가처럼 느껴져 자꾸만 눈이 감겼다.


“내가 지금 잘 때가 아닌데…….”

눈을 감은 세경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산부인과도 알아보고, 진 대표에게 할 말도 고민해야 하는데…….

그럼에도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잠에 취한 세경이 꾸벅거리고 있을 때, 똑똑 유리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번쩍 눈을 뜬 세경이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았다.


“세경 씨, 대표님이 부르셔.”

문틈에 낀 송 실장이 세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



- 대표님, 세경 씨 지금 돌아왔어요. 지금 회의실에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내 방으로 오라고 해요. 무슨 일로 불렀는지는 모른다고 하고.”

송 실장과 통화를 마친 태조는 사무실 안을 서성거렸다. 그리고 혹시 몰라 세경에게 따로 문자까지 보내놓았다.

[사무실로 와. 물어볼 게 있어.]

창가에 선 태조는 담배를 하나 입에 물었다.

혹시나 세경이 제 메시지도 무시한 채, 돌아가는 건 아닐까. 그의 시선이 건물 출입구에 고정되어 있었다.

임신까지 했으니, 세경이 이제 그날 일을 제게 고백할까?

태조는 책상 위에 올려둔 임신테스트기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제 그날 일을 묻어두기에는 일이 너무 커져 버렸다.


“왜 안 오는 거야.”

1분, 2분, 3분. 몇 분이 흘러도 세경이 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직접 나가 데리고 와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바깥에서 작은 소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윤세경입니다.”

“들어와.”

드디어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세경이 들어오자 태조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검은색 슬랙스에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세경은 달큼한 향을 풍기고 있었다.


“물어볼 게 있으시다고요.”

많지. 물어볼 거. 들어야 할 답도 그렇고.

태조는 금방이라도 도망칠 듯 멀찍이 떨어진 세경을 보곤 담배 필터를 빼 반으로 뚝 분질렀다.

그리고 책상 앞으로 나와 세경 쪽으로 임신테스트기를 쭉 밀어냈다.


“이거.”

“……?”

“뭔지 알아?”

멀어서 잘 안 보이는지 세경이 인상을 썼다. 목을 쭉 뺐다가 태조를 본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잘 안 보이는데…….”

태조가 이리 오라는 듯, 고개를 까닥거렸다.

뭔가 불안한 듯, 잠시 머뭇거리던 세경이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제 손에 있는 임신테스트기를 보고 놀란 듯 몸을 움찔거렸다.


“글쎄요. 저는 잘…….”

금세 표정을 바꾸긴 했지만, 태조는 찰나 당황한 그녀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임신테스트기라던데. 두 줄이면 임신이라고.”

모른 척하는 세경의 말을 자른 채, 태조가 대답했다.

그는 두 줄이 선명한 임신테스트기를 들어 세경에게 보여주었다.


“그런가요? 저는 사용해 본 적이 없어서.”

“…….”

“근데 그걸 왜 저한테 보여주시는지…….”

역시나. 예상대로 세경이 오리발을 내밀었다.

태조가 재밌다는 듯 픽, 웃었다.

누가 배우 아니랄까 봐. 왜 연기력을 여기다 써먹고 그래.


“왜겠어. 이게 세경 씨 가방에서 나온 물건이니까 그렇지.”

“그건 제 물건이 아니에요. 거기에 제 이름이 쓰여 있는 것도 아니고. 왜 대표님이 그걸 제 거라 확신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능청스럽게 부정하는 세경을 보며, 태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오전 11시 38분, 엘리베이터 앞에서 송 실장하고 부딪쳤었지? 그때 가방을 떨어트리면서 안에 있던 물건들이 쏟아졌었고.”

순간 발뺌하던 세경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태조는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고 그녀를 밀어붙였다.


“송 실장은 이게 세경 씨 가방에서 나온 거라고 했거든.”

“……”

“근데 본인 가방에서 나온 게 본인 게 아니라고 하면. 이건 대체 누구 걸까?”

팔짱을 낀 태조가 세경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디, 더 내밀어 봐. 그 귀여운 오리발.


“아니면 병원에서 확인부터 해야 하나? 세경 씨가 임신한 건지 아닌지.”

“아니요!”

병원이란 말에 질겁한 듯 세경이 소리를 질렀다.

모든 게 다 들켜 낭패라 생각했는지 그녀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제 거 맞아요. 그거.”

“상대는? 신 매니저는 세경 씨가 만나는 사람이 없다고 하던데. 몰래 연애라도 하고 있었나?”

“아니요.”

“그럼, 아이 아버지는 누군데?”

태조가 짙어진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세경은 입술을 잘근거리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했다.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정말, 끝까지 숨기겠다 이거지?

태조는 임신테스트기를 내려놓고 비스듬히 기댄 몸을 일으켰다.

그가 다가가자 세경이 그를 피하듯 뒷걸음질을 쳤다.


“대, 대표님?”

탁, 소파에 막힌 세경의 몸이 그대로 멈추었다.

태조는 세경에게 몸을 밀착시킨 채 그녀와 눈을 맞췄다.


“세경 씨, 내가 몇 주 전부터 찾고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

“이게 꿈인지, 실제인지 살짝 헷갈렸거든. 내가 그날 술을 많이 마신 데다 필름도 중간에 끊겨 버려서.”

세경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낯빛이 하얗게 질려가는 게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꿈이라고 생각해서 계속 무시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부터 조금씩 단편적인 장면들이 떠오르더라고. 그래서 그 조각들을 이어붙이니까, 하나의 그림이 그려지지 뭐야.”

제가 다 알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걸까.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세경이 휘청거렸다. 태조는 무너지는 세경의 허리를 받쳐 안고 말을 이었다.


“그날, 날 잡아먹고 도망친 앙큼한 고양이가 어디 있나 싶었는데.”

태조가 세경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위태로운 세경의 다리 사이로 그가 제 다리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세경의 귓가에 속삭였다.


“여기 있었네.”

윤세경, 너 딱 걸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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