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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왜 거짓말했어? (19/100)


19. 왜 거짓말했어?
2022.10.05.



 


‘어, 어떡하지?’

태조가 다 알고 있었다. 호텔 방에서 저와 밤을 보낸 것도, 제가 임신한 사실도 전부.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지며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후들거리는 다리는 힘이 빠져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했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세경은 손에 잡히는 것을 아무거나 꽉 움켜쥐었다.

진 대표가 제게 뭐라고 할까.

혹시 제 마음을 눈치챘을까? 술에 취한 그와 밤을 보낸 건 어떻고. 혹시나 배 속의 아이가 그의 아이라는 걸 알아채고 지우라고 하는 건…….


“세경 씨.”

“…….”

“윤세경.”

딱!


“……!”

손가락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최면에 빠졌다 깨어난 사람처럼, 깜짝 놀란 세경이 고개를 들어 태조를 바라보았다.


“아…….”

저를 내려다보는 태조와 시선이 마주쳤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제 손에 잡힌 태조의 셔츠가 엉망으로 구겨져 있는 게 보였다.

놓아야 하는데. 이 상황이 놀라고 두려워 그대로 굳어버린 손은 태조의 팔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게, 저는…….”

변명을 하고 싶지만, 머릿속은 쥐가 난 듯 지끈거렸다.

패닉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탓에 의미 없는 말들이 자꾸만 입안에서 맴돌았다.


“…….”

태조는 그런 세경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가늘게 떠는 손을 꽉 잡아 쥐었다.


“일단, 진정 좀 하고.”

놀란 눈으로 태조를 본 세경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담도 작은 게. 제게 들키면 오들오들 떨기만 할 거면서 잘도 절 속여 먹었다 싶었다.

태조는 세경의 떨림이 잦아들자, 제 옷을 구명줄처럼 붙잡고 있는 손을 천천히 떼어냈다.


“다리에 힘도 주고. 누가 보면 내가 잡아먹는 줄 알겠네.”

“…….”

“세경 씨가 날 잡아먹었으면서.”

“어, 아, 아니, 전…….”

뭐라 대꾸도 못 한 세경이 고개를 푹 숙였다. 태조에게 다 들킨 게 부끄러운 건지, 아니면 그날 일을 떠올린 건지. 목부터 번진 열이 귀까지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앙큼한 고양이 씨는 잠깐 좀 앉아 계시고.”

태조가 세경의 손을 잡아 그녀를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김 비서에게 말했다.


“김 비서님, 우리 커피 말고 마실 만한 거 있습니까? 카페인 없는 걸로요.”

“카페인이 없는 거라면……. 아, 율무차랑 유자차가 있습니다.”

“그럼 유자차랑 커피 한 잔씩 부탁할게요.”

태조가 차를 주문하고 소파에 앉았다. 곧 김 비서가 모락모락 김이 나는 유자차와 커피를 내려놓고 사무실을 나갔다.


“마셔.”

고개를 끄덕인 세경이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 쥐었다.

달콤하고 새콤한 유자차가 혀끝을 적셨다. 그녀는 홀짝홀짝 차를 마시며 태조를 힐끔거렸다.

언제 저 고양이의 목덜미를 쥐고 흔들어 볼까, 가늠하듯 태조는 커피를 마시며 세경을 관찰하는 중이었다.


“…….”

가시방석으로 멍석말이를 당하는 느낌이었다. 따끔한 그의 시선에 세경이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언제…….”

세경이 입을 떼자, 태조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다 기억하셨어요?”

“명확해진 건 최근이고, 의심스러웠던 건 꽤 됐고.”

“의심이라면 어떤…….”

“아침에 일어났는데, 왠지 새벽 내내 누가 옆에 있던 느낌이더라고. 문석주는 아니라고 발뺌하는데, 욕실엔 누가 쓴 휴지가 버려져 있지, 내 옷은 벗겨진 데다 가운을 덮고 있지. 또 소지품은 문석주가 한 것 같지 않게 가지런히 놓여 있더라고.”

아, 그냥 모든 게 다 의심스러웠던 거구나.

시무룩해진 세경의 눈매가 아래로 축 처졌다.


“그러다 내가 세경 씨한테 향수 뭐 뿌리냐고 물었던 적 있지?”

“네.”

“내가 왜 그랬을 거 같아?”

세경이 답을 생각하며 느리게 눈을 굴렸다.


“설마…… 제 향수 냄새가 남아 있었다고요?”

“어, 기억에 의존하느라 아주 애먹었지만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그냥 날 찾아달라고 증거물을 갖다 바친 거구나…….

한숨을 쉰 세경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어디 쥐구멍이 있으면 그 안에 얼굴이라도 파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태조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왜 거짓말했어?”

“어떤…….”

거짓말을 묻는 걸까?

그와 잠자리를 가진 것과 임신 사실을 숨긴 것까지. 태조에게 한 거짓말이 한 두 개가 아니라 무슨 답을 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그날 나 본 적 없다며.”

“그게……. 처음엔 솔직히 말하려고 했어요.”

“처음, 언제?”

“아침에 호텔 앞에서 마주쳤을 때요.”

“아, 헛개차 주던 날?”

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조는 그때 일이 떠올라 픽 웃었다.

그러고 보니 저 정신 차리라고 준 걸, 세경의 취향이 헛개차인 줄 알고 착각도 했었지.


“근데. 왜 말 안 했어?”

“대표님이 기억을 못 하시기에…….”

“…….”

“그냥 묻어두려고 했어요. 석주 선배님도 아무 말 안 한 거 같아서.”

“그럼 내가 기억하지 못했으면 계속 숨기고 있었겠네.”

“아마도요.”

말끝을 흐린 세경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기억하지 못했다면 계속 숨기고 모른 척 지내고 있을 거였다. 제가 임신만 하지 않았다면.


“저건 언제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태조가 자신의 책상 쪽으로 고개를 까닥거렸다. 세경의 시선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책상엔 그녀가 오늘 아침 임신 사실을 확인한 임신테스트기가 놓여 있었다.


“조만간 말하려고 했어요. 저도 오늘 아침에 확인한 거라서.”

“내 아이지?”

직구로 날아온 질문에 세경이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난감한 듯 입술을 잘근거리다 태조를 올려다보았다.


“대표님 아이라고…… 생각하세요?”

“나 아니면 누군데? 아까도 말했잖아. 신 매니저한테, 세경 씨 사귀는 사람 없다는 소리 들었다고.”

“매니저가 제 일거수일투족을 다 감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내가 아니라고? 그럼 누군지 말하라니까.”

“말하면요?”

“나랑 같이 면담 좀 해야지. 이게 그냥 넘어갈 일도 아니고.”

태조가 깍지 낀 손을 꺾어 두둑, 뼈 소리를 냈다.

세경은 ‘그럼 거울 보고 면담하셔야겠네요…….’란 말을 속으로 삼켰다.


“임신 이야기는 나중에 하면 안 될까요? 아직 병원에서 확인한 것도 아니라서…….”

“송 실장은 저 정도로 선명하면 임신 확률이 99프로라던데?”

“……그래도요.”

어떻게든 이 주제를 뒤로 미루고 싶어 하는 티가 났다. 하긴 본인도 오늘 아침 임신 사실을 알았다면 놀라기도 했을 거였다.

태조는 한발 물러서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럼 병원부터 가고 나서 이야기하자고. 예약해둔 곳은 있어?”

“아뇨. 이제 찾아봐야 해요.”

“그럼, 잠깐 기다려봐.”

자리에서 일어난 태조가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핸드폰에서 번호 하나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어, 나야. 오늘 저녁에 예약 좀 하려고 하는데.”

세경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예약? 설마 산부인과를 예약한다는 건가?


“7시쯤 갈게. 그래, 심 원장님 혼자만 계시고. 비밀 엄수 좀 부탁드리고.”

팔목에 찬 시계를 흘끗 내려다본 그가 세경에게 시선을 던졌다.


“어, 임신인지 확인하려고. 피검사는 할 거고, 초음파는 당사자하고 이야기한 뒤에 결정해. 그래, 이따 출발하기 전에 다시 연락할게.”

통화를 마친 태조가 세경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미지근하게 식은 유자차를 입에 물었다.


“병원 예약해뒀으니까. 저녁에 같이 가.”

“어딘지 알려주시면 저 혼자 가도…….”

“그건 안 되겠는데. 나도 결과는 들어봐야지.”

“그럼, 제가 시간에 맞춰 병원으로 가면 안 될까요? 저 다른 일도 해야 하고…….”

“오늘 스케줄은 없는 걸로 아는데.”

언제 제 스케줄까지 확인했담. 세경이 다른 쥐구멍을 찾아 데굴데굴 머리를 굴렸다.


“아. 저 시나리오 검토할 게 있어서요. 회의실에 다 두고 와서. 가서 좀 보고 올…….”

세경이 슬쩍 몸을 일으키자, 태조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 꾹 눌렀다.


“앉아 있어. 그거 다 여기에 가져다줄 테니까.”

들썩거리던 엉덩이가 다시 소파 위로 떨어졌다.

태조가 사무실 문을 열자, 세경을 찾으러 왔는지 제훈의 얼굴이 보였다.


“아,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 세경이 누나가 여기 계시다고 해서…….”

“어. 여기 있어. 근데 세경 씨가 저녁에 나랑 어디 갈 데가 있어서. 왜,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나?”

“아뇨. 누나 시나리오 검토 다 마치면 호텔로 데려다 드리려고 했거든요. 근데 회의실에 안 계셔서…….”

“볼일 마치면 내가 데려다줄 테니, 그건 걱정 말고. 그보다 회의실에 세경 씨가 보던 시나리오가 있다던데. 그것 좀 여기로 갖다줄 수 있을까?”

“대표님 사무실로요?”

제훈이 커다란 눈을 굴려 안에 있는 세경을 쳐다보았다. 제가 모르는 새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제훈 씨.”

“예? 아, 네.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빨리 안 가져오냐는 무언의 압박에 제훈이 고개를 꾸벅이곤 회의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세경이 보던 시나리오 책자를 들고 와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수고했어. 오늘 세경 씨 스케줄도 없는데, 제훈 씨도 별일 없으면 일찌감치 퇴근하도록 해.”

“네에…….”

제훈이 정말 그래도 되나 싶은 얼굴로 세경을 쳐다보았다.


“그래. 나 걱정 말고. 스케줄도 없는데 일찍 퇴근해서 쉬어.”

“알겠어요. 누나. 아, 그리고 호텔에서 짐 빼실 때 연락 주시구요.”

세경이 알겠다고 하자, 제훈이 태조에게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탁, 문을 닫은 태조가 세경을 돌아보았다.


“더 필요한 건?”

“없어요.”

“그럼 병원 가기 전까지 그거라도 보고 있어. 중간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하고.”

태조가 책상으로 걸어가자, 세경이 시나리오 책자를 집어 들었다. 달칵거리는 마우스 클릭 소리에 그녀가 슬쩍 태조를 훔쳐보았다.

잠깐 시간은 벌었다지만, 이제 어찌한담.

모니터에 반쯤 가려진 태조의 얼굴을 보며, 세경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

종이를 넘기던 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들리지 않았다. 모니터를 보던 태조가 상체를 슥, 기울여 세경을 바라보았다.

좀 전까지 열심히 시나리오를 보고 있던 세경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책은 손에서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고, 아프게 꺾인 고개를 따라 상체 또한 미끄러질 듯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졸리면 편하게 누워서 자지.

어느덧 노을이 저무는 시간이었다. 조용히 몸을 일으킨 태조는 옷걸이에서 제 슈트 재킷을 빼 세경에게 다가갔다.

책을 덮어 테이블에 올려놓은 그는 점점 아래로 처박히는 머리를 받쳐 소파에 눕혔다.

다리까지 소파에 올린 그는 세경의 몸 위로 제 재킷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 테이블에 앉아 자고 있는 세경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

곤하게 자고 있는 세경의 몸이 작게 들썩거렸다. 그는 순하게 잠이 든 세경을 보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 참, 이 앙큼한 고양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사실 크게 내색은 안 했지만, 태조도 세경의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땐 많이 당혹스러웠다.

이제 막 세경이 저와 밤을 보낸 사실을 확신했던 터다. 그날 일을 덮을까 말까, 고민하던 와중에 접한 임신 소식이라니.

그러나 한편으론 세경이 임신을 했다면 제게 어떤 식으로 나올까 궁금하기도 했다.

이마저도 숨길까, 아니면 제게 솔직히 말하고 책임을 지라고 할까. 그도 아니면…….

최악의 상황까지도 가정했지만, 제게 들켜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고 있자니 화를 낼 생각도, 뭘 더 다그칠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보다, 지금 당장 걱정이 되는 건 앞으로의 일이었다.

세경이 병원에서 임신 사실을 확인하고, 아이를 낳을지 말지 결정을 하겠지만. 만약 낳는다고 하면…….


“역시……, 해결 방법은 그거 하나밖에 없으려나.”

나지막이 읊조린 태조가 세경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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