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도대체 어떤 새끼야?
(20/100)
20. 도대체 어떤 새끼야?
(20/100)
20. 도대체 어떤 새끼야?
2022.10.08.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에 웃자란 풀들이 몸을 비비며 바닥에 쓰러졌다. 세경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풀밭 위를 거닐었다.
여긴 어딜까.
그녀는 사람 하나 없는 푸른 초원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커다란 나무 하나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나무는 수백 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킨 듯, 거대한 둘레를 자랑했다.
사방으로 뻗은 나뭇가지는 푸른 잎을 무성하게 키워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어머.”
그 커다란 나무 아래, 하얀 솜뭉치 하나가 굴러다니는 걸 발견한 세경이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나무 기둥 앞에 쪼그려 앉아 검은 얼룩이 있는 하얀 솜뭉치를 내려다보았다.
몸을 둥글게 만 생명체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알리듯 작은 몸을 들썩거리고 있었다.
“고양인가?”
세경이 손을 뻗어 작은 몸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얼굴을 파묻고 있던 하얀 솜뭉치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라? 이거 생김새가 고양이랑은 좀 다른 거 같은데.
“설마 너…… 호랑이니?”
맞다는 듯, 입을 크게 벌린 백호랑이가 뒤뚱거리며 세경의 손에 제 얼굴을 올렸다.
턱을 살살 긁어주자 새끼 호랑이가 세경의 손바닥을 베개 삼아 고롱고롱, 잠을 자기 시작했다.
“귀여워…….”
“뭐가?”
음?
제게 말을 거는 소리에 눈이 확 떠졌다. 눈꺼풀을 깜빡거린 세경이 도르륵 눈동자를 굴렸다.
아까 전까지 책상 앞에 있던 태조가 제 앞에, 정확히는 소파 테이블 위에 앉아 있었다.
“어, 지금 몇 시…….”
“여섯 시 조금 넘었어. 안 그래도 슬슬 깨워야겠다 싶었는데.”
대체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걸까.
민망함에 몸을 벌떡 일으키자, 제 몸을 덮고 있던 옷이 스륵 떨어졌다.
이건 또 언제 덮어준 거지? 그녀는 이불 대신 덮고 있던 태조의 재킷을 꽉 움켜쥐었다.
“옷…… 고맙습니다.”
툭툭 옷을 턴 세경이 태조에게 재킷을 건넸다. 그는 세경을 바라보며 재킷에 팔을 꿰어 넣었다.
“그래서, 뭐가 귀여웠는데?”
“네? 뭐가요?”
“잠꼬대로 중얼거리던데. 뭐가 계속 귀엽다고.”
“아, 그건…….”
말을 하려던 세경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하필 산부인과 방문을 앞둔 이 상황에 새끼 호랑이 꿈이라니. 이거…….
“태몽인가?”
“뭐?”
“아, 아뇨. 그냥 꿈에 귀여운 동물이 나와서. 그래서 그랬나 봐요.”
서둘러 변명한 세경이 가방을 챙겼다. 자느라 보지 못한 시나리오 책자도 가져가려 하자, 태조가 막았다.
“이건 그냥 둬. 내일 매니저한테 가져다주라고 할게.”
“그래도 가지고 가서 오늘 저녁에 좀 보는 게…….”
“가지고 가면. 볼 시간은 있고?”
무섭게 왜 이러세요, 진짜.
세경은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세경에겐 ‘너 오늘 밤 잠자긴 다 글렀다.’라는 소리로 들렸다.
“나가자. 여기서 더 지체하면 예약 시간 늦겠어.”
태조가 세경의 손을 잡고 사무실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자, 퇴근하는 직원들이 다가와 두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대표님, 조심히 들어 가십…….”
고개를 숙인 직원이 세경의 손을 잡고 있는 태조를 발견하곤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는 슬쩍 태조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왜 대표님이 세경 씨 손을 잡고 계신가요?’
의아해하는 직원의 머릿속도 모른 채, 태조가 태평하게 인사를 되돌렸다.
“그래요. 다들 조심히 들어가고.”
띵!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륵 열렸다. 먼저 올라탄 태조가 멀뚱히 서 있는 직원들을 보며 물었다.
“왜 안 탑니까? 다들 나랑 내외하나?”
“아……니요. 아, 제가 사무실에 놓고 온 게 있어서요. 먼저 가십시오, 대표님.”
어색한 미소를 짓는 직원들을 훑어보며 태조가 닫힘 버튼을 눌렀다. 하강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태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들 왜 저러지?”
그러자 옆에서 조용히 있던 세경이 입을 열었다.
“아마, 이거 때문에 그런 거 같은데요?”
“어떤 거?”
대답 대신 쓱 들어 올린 세경의 손을 따라.
“아.”
태조의 손이 올라오고 있었다.
***
태조가 예약한 병원은 청담동에 있는 한 산부인과였다. 6층짜리 건물엔 병원과 입원실 그리고 산후조리원까지 들어와 있었다.
병원 내부는 호텔 못지않게 호화스러웠다. 반들반들한 대리석 바닥에,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장식, 그리고 넓은 대기실까지.
세경을 진료한 심 원장의 말에 따르면 병원은 철저한 예약제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하였다.
고객들이 서로 마주치지 않게 시간을 잡고 있으니 혹여라도 정보가 새어 나갈까 하는 걱정은 하지 말라고.
“…….”
피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대기실에 혼자 남은 세경은 납작한 배 위로 손을 올렸다.
태몽까지 꿔서 그런지, 뭔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냥 요즘 좀 피곤하고 소화가 안 되는 걸 빼면 별로 바뀐 것도 없는데. 임신했을지도 모른다고…….
“진료 끝났어?”
조용한 대기실에 태조의 목소리가 울리자 세경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손엔 고급스러운 쇼핑백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상담은 끝났고, 피 검사 결과 기다리는 중이에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태조를 쫓아낸 건 심 원장이었다. 핑계는 저녁도 안 먹은 세경이 먹을 만한 걸 사 오라는 거였으나…….
실상은 세경이 소속사 대표를 옆에 두고 진료를 받는 게 불편하진 않을까, 하는 배려에서였다.
물론 그것도 태조가 아이 아빠라는 걸 몰라서 그런 거겠지만.
“그건 뭐예요?”
“이건 소고기, 이건 초밥. 근처에 맛있는 데가 있어서.”
“아…….”
문득, 저번에 장어를 먹으러 갔다가 제대로 먹지도 못했던 것이 기억났다.
기껏 신경 써서 사 왔는데, 먹지 못하면 미안해서 어쩌지…….
“왜? 둘 다 별로야?”
“아뇨. 그런 건 아닌데. 혹시나 해서요. 요즘 입맛이 변했는지 좋아하는 것도 잘 못 먹어서.”
“억지로 먹을 필욘 없고. 입맛 당기는 걸로 먹어. 아니다 싶으면 말고. 남으면 내가 먹을 테니까.”
태조가 쇼핑백에서 포장된 음식을 꺼내놓았다.
잘 익은 고기에선 버터의 고소한 냄새가 풍겼고, 초밥집은 메뉴를 다 쓸어왔는지 알록달록한 게 종류도 다양했다.
소고기, 광어, 장어, 달걀, 참치, 새우 등등.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음식을 눈앞에 두니 군침이 돌았다.
“잘 먹겠습니다.”
세경이 젓가락을 반으로 갈라 스테이크를 집었다. 입에 넣고 씹는데, 고기가 살살 녹았다.
뭐가 이렇게 맛있는 거야…….
조금만 먹으려고 했는데. 한번 손이 가니 멈출 수가 없었다. 세경이 도토리를 채워 넣는 다람쥐처럼 양 볼 가득 음식을 욱여넣었다.
우물우물 씹고 있자, 문득 저만 먹고 있다는 생각에 그녀가 태조를 바라보았다.
“…….”
아니나 다를까. 태조는 의자에 기댄 채 식사를 하는 세경을 보고 있었다.
“대표님은 안 드세요?”
입 안에 있는 음식을 꿀꺽 삼킨 세경이 태조에게 물었다.
“세경 씨 많이 먹어. 나는 나중에 먹을게.”
“저 혼자 먹기 민망한데…….”
말끝을 흐린 세경이 참치 초밥을 하나 집어 태조에게 내밀었다.
“드세요.”
“…….”
“아, 참치 싫어하세요? 그럼 다른 걸…….”
세경이 다른 초밥을 집으려 하자, 피식 웃은 태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니. 괜찮아. 참치 좋아해.”
가까이 다가온 태조가 입을 벌렸다. 그에게 잡힌 손목에서 유난히 맥이 빨리 뛰는 것 같았다.
“맛있네.”
“네. 그쵸……. 맛있죠.”
뒤늦게 제 행동을 의식했는지, 세경의 뺨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그녀가 달걀 초밥을 입에 물자, 태조가 생수병을 따서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차가운 물로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킨 세경이 입을 열었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어떤 거?”
물을 마신 태조가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거렸다.
“대표님은 여기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여기? 음, 일단 심 원장의 아버지가 오래전부터 우리 집 주치의로 지내신 분이라, 심 원장하고도 예전부터 알고 지냈어. 그 덕에 지금 내가 도움을 좀 받고 있고.”
“무슨 도움이요?”
“우리 소속사 여배우들이 거의 다 이쪽으로 진료 다니거든. 건강 검진 받으러 가는 데도 산부인과만 가면 이런저런 시선을 받는 게 불편하다고. 그래서 원하는 사람들은 이 병원으로 연결해 주고 있어.”
아, 그래서였구나. 그 자연스러운 통화는. 세경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보다 결과는 언제 나오는 거야?”
“그게 2, 30분 정도 걸린다고…….”
“그럼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
태조가 손목시계를 두드리다 세경을 쳐다보았다.
“상담하니까, 뭐래?”
“일단 피 검사부터 해 보자고…….”
세경은 젓가락을 지그시 깨물었다.
심 원장에게 임신테스트기를 보여주고, 마지막 생리 날짜 등을 알려주며 상담을 받았을 때 그녀 또한 임신은 맞는 것 같다고 하였다.
피 검사 수치를 보면 더욱 확실해지겠지만.
“와, 맛있는 냄새.”
양반은 못 되는지, 심 원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대기실 입구에 나타났다.
태조가 돌아보자 결과지를 손에 쥔 그녀가 쪼르르 다가와 테이블 주변을 기웃거렸다.
“어머나, 이건 우리 옆 건물 송 쉐프님 초밥이잖아. 맛있는 거 사 오랬더니. 정말 비싼 것만 잘 골라 사 왔네.”
“아, 원장님도 좀 드세요. 아직 식전이실 거 같은데.”
“으음, 아니에요. 난 아까 간단하게 먹어서.”
“결과는 나온 거야?”
태조가 묻자 심 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나왔어. 세경 씨 다 먹고 진료실로 들어와요.”
“저 다 먹었어요. 지금 들어가요.”
세경이 젓가락을 내려놓자, 태조가 인상을 썼다.
“뭘 또 들어가. 그냥 여기서 이야기하면…….”
“됐고요. 진 대표님은 여기 좀 치워주세요.”
태조에게 뒷정리를 시킨 심 원장이 세경과 함께 진료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결과지를 보여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임신 맞아요, 세경 씨. 이제 6주 됐고요.”
“…….”
“원한다면, 지금 초음파 확인도 가능한데.”
세경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녀는 두 손을 맞잡은 채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초음파는…… 다음에 와서 해도 될까요?”
“그래요. 지금은 세경 씨도 마음이 복잡할 테니까. 아, 진 대표에겐 세경 씨가 직접 말할 건가요? 전화할 때 보니 임신한 것까진 알고 있는 거 같은데.”
세경이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태조가 아무것도 모른다면 고민이라도 하겠지만, 지금 와서 아이의 아버지인 그에게 뭘 더 숨겨야 하나 싶었다.
“물어보시면 알려주세요. 어차피 대표님도 알고 계시긴 해야 하니까.”
“그럴게요. 아, 그리고 예약은 여기 명함에 적혀 있는 내 핸드폰으로 해요. 이왕이면 다음 진료 땐 그…… 아이 아버지도 같이 오면 좋을 것 같고요.”
음, 그 사람 지금 밖에 있는데요…….
세경은 뱉지 못한 말을 삼키며, 어색하게 웃었다.
***
상담을 마친 세경이 대기실에 앉아 있는 동안, 심 원장은 태조를 불렀다.
결과에 대해 세경이 심 원장에게 대신 말해달라고 부탁을 해서였다.
그녀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뭐, 너도 나한테 전화했을 때부터 예상하긴 했겠지만.”
“…….”
“세경 씨, 임신 맞아.”
“몇 주?”
“6주 됐어.”
“6주? 그건 관계를 가진 날부터 세는 건가?”
“아니야, 멍청아.”
“…….”
“그리고 세경 씨 앞에선 관계니 뭐니 그런 말 꺼내지 말고. 어우 씨, 왜 하필 너랑 같이 와서. 세경 씨가 얼마나 민망하겠니.”
아니, 왜 민망해? 애 아빠가 난데.
“그래서, 아이는 언제 생긴 건데?”
“한 달 전쯤?”
“아, 한 달…….”
태조가 날짜를 헤아렸다. 빼도 박도 못하게, 그날 생긴 제 아이가 맞았다.
“아직 초음파를 확인하진 못했지만, 어쨌든 임신 초기니까 조심해야 해. 그……, 일단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으니, 네가 잘 챙기고.”
“알았어. 늦게까지 고생했다. 다른 때처럼 비밀 잘 지켜주고.”
“그건 걱정 말고. 그보다…….”
심 원장이 태조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태조가 또 뭐 할 말이 있냐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
“도대체 어떤 X끼야? 세경 씨 열애설도 없었던 걸로 아는데. 어떤 개새끼가 열애설도 안 터트리고 먼저 임신을 시켰냐고.”
심 원장이 이를 빠득, 갈았다. 눈앞에 그 새끼가 있으면 멱살이라도 잡아 쥘 태세였다.
흥분해 방방 뛰는 심 원장을 보며 그가 눈썹을 구겼다.
“그 개X끼…….”
……네 옆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