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내가 좋아한다고 하면?
(23/100)
23. 내가 좋아한다고 하면?
(23/100)
23. 내가 좋아한다고 하면?
2022.10.19.
“으, 힘들어.”
앓는 소리를 한 세경이 소파에 주저앉았다. 제훈과 유나를 배웅하고 돌아오자, 시간은 어느새 저녁 7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앞으로 두 사람을 못 만나게 하든가 해야지.”
세경이 주먹으로 뻐근한 어깨를 두드렸다.
점심때 유나가 세경의 첫사랑을 언급한 후, 두 사람은 틈만 나면 달라붙어 정보를 교환하느라 바빴다.
문 배우님하고, 친한 직원분은 누구예요? 그분은 잘생겼다고 하는데. 직원 중에 그런 사람 없어요? 등등.
덕분에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운 세경은 두 사람을 떼어놓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벌써 밤이네.”
고개를 돌린 세경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커튼을 달지 않은 통창 너머, 도로를 수놓은 가로등 빛과 차량의 불빛들이 한데 섞여 너울거렸다.
“조용하다.”
시끄럽게 떠들던 두 사람이 떠나서 그런가. 혼자 지낸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묘하게 적막한 느낌이 들었다.
세경은 리모컨을 들어 티비부터 켰다. 조용했던 집안은 곧 사람들의 목소리로 떠들썩해졌지만, 낯선 공간에 홀로 있어 그런지 허전한 마음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짐 정리나 할까.”
무료하게 눈만 끔뻑거리던 세경이 몸을 일으켰다. 그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세경의 핸드폰이 울렸다.
세경의 모친인 최정란 여사에게서 온 전화였다.
“어, 엄마.”
- 이사 잘 했니?
“응. 잘 했지.”
- 내가 올라갔어야 했는데. 혼자 힘들어서 어떡해.
최정란 여사의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했다. 아침 일찍 제주도에서 올라와 이사를 돕겠다는 걸, 세경이 그럴 필요 없다며 말린 터였다.
굳이 힘든 날 부를 건 뭔가. 집이 싹 정리됐을 때 오면 고생도 덜하지.
“안 힘들었어. 요즘은 이삿짐센터에서 다 해주는걸. 유나랑 매니저도 와서 도와줬고.”
- 그래? 고맙네, 두 사람 다. 그래도 아직 짐 다 정리 못 했지?
세경은 거실 한편에 쌓여 있는 박스를 외면하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옷이랑 책 같은 것만 정리하면 돼. 얼마 안 남아서 차근차근하려고.”
- 힘든 건 하지 말고. 엄마가 조만간 서울로 올라갈게. 그보다 저녁은 먹었어?
“아직.”
- 왜 아직 안 먹고.
“방금 유나랑 매니저 보냈거든. 조금 이따 먹을 거야.”
- 밥 잘 챙겨 먹어. 혼자 있다고 식사 거르지 말고. 에효, 누가 옆에 있어 줬음 참 좋을 텐데.
최 여사의 말에 왠지 모르게 가슴속이 울컥거렸다.
평소에도 자주 듣는 소린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가슴 한쪽이 찌릿한 건지. 이것도 아이를 가진 영향인 건가?
“엄마.”
- 응?
최 여사를 불러놓고 세경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이를 가졌다고 말해야 하는데…….
자신은 괜찮은데, 그 말을 듣고 최 여사가 괜히 속상해하지 않을까 걱정부터 됐다.
“언제 서울 올 거야?”
- 이달 안엔 갈 거야. 너 스케줄 빌 때 가야지. 딸 얼굴 보러 가는 건데.
“나 엄마가 해주는 갈비찜 먹고 싶어.”
- 갈비찜? 가서 해줄게. 근데 너 무슨 걱정거리 있어? 왜 갑자기 목소리가 가라앉았지?
“가라앉긴. 배고파서 그러지.”
- 아직 애기네. 내 딸. 얼른 밥 챙겨 먹어. 엄마가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응.”
전화를 끊은 세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소파에 핸드폰을 엎어 놓고 납작한 배 위로 손을 올렸다.
“결혼이라.”
태조가 제게 결혼을 하자고 했을 때, 처음에는 너무 놀라 심장이 쿵쾅거렸었다.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었다.
다가오는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부딪칠 만큼. 저를 안아주는 손길에 온전히 제 몸을 맡길 만큼.
하지만 들떴던 그 마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태조가 자신에게 결혼을 하자고 한 이유가, 저를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니라 제 배 속에 있는 아이 때문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우리 최 여사님, 나 임신했다는 거 알고 우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세경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최 여사에게 자신의 임신 사실을 말하지 못했던 건, 모친 또한 비슷한 상황에서 결혼을 했기 때문이었다.
사랑해서 한 결혼이 아닌, 아이를 가졌기에 책임감으로 했던 결혼.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결혼의 끝은 좋지 못했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깊지 않던 아버지는 얼마 가지 않아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고, 3년 만에 이혼을 한 어머니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세경을 꿋꿋이 키워냈다.
부친은 곁에 없었지만, 세경은 그만큼 어머니에게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 아쉬운 건 없었다.
가끔 아비 없이 자랐다는 등의 서러운 말을 듣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버지를 그리워했던 건 아니었다.
물론 태조가, 자신의 아버지처럼 무책임하게 가정을 등질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책임감에 떠밀려 결혼을 하는 건 자신도 원치 않았다.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려 껍데기 같은 결혼 생활을 하느니……. 조금은 힘들지라도 아이는 저 혼자 키우는 게 나았다.
그날 태조를 밀어낼 수 있음에도 물러서지 않았던 건 저였고. 그 일에 후회는 하지 않으니까. 게다가…….
“대표님의 집에서도 날 순순히 받아줄지 모르겠고.”
태조의 집안이 국내에서 손꼽히는 재벌가라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런 집안이라면 예전부터 결혼을 약속한 사람도 있지 않던가?
아, 혹시 제가 임신한 걸 알고 진 대표의 부모님이 찾아와 지우라고 하는 건…….
Trrrrrrrrr-.
"앗! 깜짝이야.”
갑자기 울리는 벨소리에 세경이 화들짝 놀라 몸을 들썩거렸다. 그녀는 세차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핸드폰을 들었다.
[진태조 대표님]
진짜, 제가 그를 생각하고 있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정말 주변에 사람이라도 심어놓은 거 아냐?
세경은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통화버튼을 눌렀다.
“네. 대표님.”
- 뭐 해?
“그냥 있어요.”
세경은 둥둥거리는 가슴을 두드리면서 소파에 등을 기댔다.
- 오늘 이사했다며.
“네.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 신 매니저가 안 보이기에, 직원에게 물어봤더니 오늘 이삿날이라 도와주러 갔다고 하던데.
“아아.”
근데, 갑자기 신 매니저는 왜 찾으셨지?
- 매니저는? 아직도 거기 있어?
“아뇨. 조금 전에 갔어요.”
- 그래. 새로 이사한 집은 어때?
“음, 넓고, 휑하고, 좀 쓸쓸하고. 그러네요.”
- 쓸쓸해?
“조금요. 이사 첫날이라 그런가 봐요. 좀 전까진 유나랑 제훈이가 같이 있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 하긴. 요 한 달간 계속 호텔에서 지내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저녁은?
“저녁이요? 어, 아직 안 먹었는데…….”
- 잘됐네. 나도 아직인데.
“네?”
제가 저녁을 안 먹은 게, 왜 대표님한테 잘된 일인 거죠?
세경이 묻기도 전에, 건너편에서 태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세경 씨, 나랑 저녁이나 먹자. 이사한 집 어디야?
***
“뭔가 말린 것 같은 느낌인데…….”
세경은 초조하게 현관 앞을 서성거렸다. 조금 전, 태조가 막 정문 앞을 지났다는 연락을 받은 터였다.
뭔가 정신없이 물어보기에 답을 술술 했더니, 어느새 그와 같이 저녁까지 먹게 되었다.
“아직 정리도 덜 됐는데.”
세경은 싱숭생숭한 얼굴로 집 안을 둘러보았다. 이사 첫날이라 그런지 정리를 해도 어수선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아직 개봉도 하지 못한 박스는 구석에 층층이 쌓여 있었고, 매니저의 말대로 살림도 별로 없는 집은 공허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냥 나가서 먹자고 우길걸.”
바깥에서 먹자고 한 세경의 제안을 거절한 건 태조였다. 그는 이사도 해서 피곤할 거라며 자신이 직접 음식을 사 오겠다고 했다.
딩동!
“네, 네에!”
벨 소리가 들리자 세경이 곧장 문 앞으로 달려갔다. 도어 록 잠금을 풀고 문을 열자, 연회색 니트와 슬랙스 차림의 태조가 서 있었다.
“나 기다렸어? 문 여는 게 빠른데.”
“정문 지났다고 해서요. 일단, 들어오세요.”
태조가 신을 슬리퍼를 내어준 세경이 그의 옷차림을 살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쭉, 슈트만 입은 걸 봤었는데. 캐주얼한 옷을 입은 그를 보니 뭔가 색다르게 느껴졌다.
“집에 있다가 오신 거예요?”
“어. 그보다 알고 있었어? 세경 씨 집이랑 내 집이랑 가까운 거?”
“네.”
“근데 왜 그때 말 안 했어?”
“대표님 집에 간 날이요?”
세경의 물음에 태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주방으로 걸어가자 그녀가 태조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그날 밤엔 몰랐어요. 주변도 어둡고 아직 이 주변의 지리도 잘 알지 못해서. 아침에 대표님이 호텔에 데려다주실 때 알았어요.”
“그래? 뭐, 어쨌거나 집이 가까워서 다행이네. 급한 일이 있으면 금방 올 수도 있고. 아, 그보다 갈비탕 사 왔는데. 괜찮지?”
“네. 앉아 계세요. 제가 준비할게요.”
“됐으니까 그릇만 가지고 와.”
세경이 상부장에서 큰 그릇을 꺼내 왔다.
그가 두툼한 갈빗살과 국물을 덜어놓는 동안, 세경은 섞박지와 밥을 그릇에 옮겨 담았다.
“여기서 먹을까? 아님 거실에서?”
“대표님만 괜찮으시면 여기서 먹어요. 이것들 다 옮기는 것도 일이잖아요.”
세경이 스툴을 끌어와 앉자 태조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잘 먹을게요.”
수저를 든 세경이 국물을 떠먹었다.
맑은 국물은 짭짤하고 달짝지근했다. 뼈에 붙은 고기는 또 어떻고. 얼마나 푹 삶았는지 뼈에서 분리된 고기가 입에서 살살 녹을 정도였다.
“저번에도 그렇고, 세경 씨 고기 참 좋아하나 봐?”
뼈 하나를 들고 있던 세경이 또르르 눈동자를 굴렸다.
제가 좋아하는 게 아니라, 배 속의 새끼 호랑이가 좋아하는 거 같은데요…….
“고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요?”
“하긴. 그것도 그러네. 이것도 먹어. 소스 찍어서.”
태조가 뼈를 바른 살코기를 세경의 국그릇에 넣어 주었다.
“이것도 충분한데.”
“두 배로 먹어야지, 세경 씨. 이제 홑몸도 아니잖아. 아, 오늘 낮에 심 원장한테 전화가 왔었어. 세경 씨한테 연락이 없다고.”
“아, 곧 하려고 했어요. 이사가 겹쳐서. 짐 정리만 마치면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무거운 거 옮길 때 말해. 도와줄 테니. 그나저나 이사 선물은 뭐 해줄까? 집이 좀…….”
고개를 기울인 태조가 거실 쪽을 쳐다보았다.
“뭐가 많이 없는 거 같은데?”
“공사 끝난 지 얼마 안 돼서 그래요. 조금씩 짐도 들어올 거고.”
“침대도 없는 건 아니지?”
“…….”
세경이 슬쩍 그의 시선을 피하자, 태조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없어?”
“주문은 다 해놨어요. 일정이 좀 틀어지는 바람에 내일 배송이 돼서 그렇지.”
“그럼 오늘은 어디서 자?”
“소파에서요.”
태조가 측은한 눈으로 세경을 바라보았다.
이래서, 그를 집으로 데려오고 싶지 않았는데.
“세경 씨, 그냥 내 집으로 올래?”
“제가 왜요. 대표님이랑 결혼한 것도, 사귀는 것도 아닌데.”
“우리가 사귀는 사이면.”
“…….”
“내 집에 들어올 수는 있고?”
왜 갑자기 저런 말을 하는 거지? 수저를 꽉 움켜쥔 세경이 침을 꼴깍 삼켰다.
“아직도 마음 안 바뀌었어? 나랑 결혼하는 거.”
“그게 며칠 전 이야기라고……. 당연히 안 바뀌었죠.”
안 바뀌기만 했을까. 그와 결혼해야 할 이유는 찾지 못해도, 그와 결혼하지 못할 이유는 더 찾기도 했다.
“아이 때문에……, 내가 책임감으로 세경 씨랑 결혼하는 게 싫다고 했지?”
“네.”
“그럼 내가 세경 씨를 좋아한다고 하면?”
갈비탕을 휘젓던 세경의 손이 멈칫거렸다. 그녀가 동그래진 눈으로 태조를 올려다보았다.
갈비탕에 술을 넣었나. 지금 무슨 소리를…….
“그렇다고 하면, 나랑 결혼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