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꼬마 호랑이의 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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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꼬마 호랑이의 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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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꼬마 호랑이의 태명
2022.10.26.
“같이 안 오셨네요.”
초음파 사진을 신기한 듯 내려다보고 있던 세경에게 심 원장이 말했다. 여전히 웃는 낯이었지만,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누구요? 진 대표님이요?”
“아뇨. 그 꼬물이 아버지요.”
아, 그게 대표님인데.
세경은 사진을 움켜쥔 채 빙긋 웃기만 했다. 태조가 심 원장에게 멱살이 잡힐 것 같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서였다.
언젠가는 심 원장도 알게 되겠지만, 당분간 태조가 아이 아버지라는 건 숨겨야 할 것 같았다.
“좀 바빠서요.”
“바빠도 그렇지. 세경 씨 혼자 병원에 보내면 쓰나. 앞으로 아이 아버지가 해줘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참, 그분도 알고 계신 거죠? 세경 씨 임신한 거.”
“물론이죠.”
심 원장이 펜을 꽉 움켜쥐었다. 이를 으득, 가는 게 눈앞에 아이 아빠가 있다면 멱살이 아니라 목을 조를 태세였다.
“꼬물이 태명은 지었어요?”
“아직요. 요즘 이사하느라 정신이 없었거든요.”
“아이 아빠랑 같이 지어봐요. 여기 산모 수첩도 가져가고. 아직 초기니까 무거운 물건은 들지 말고 다른 사람 시켜요. 아, 입덧은 어때요? 심하진 않아요?”
심 원장이 속사포처럼 걱정스러운 마음을 쏟아냈다. 세경은 큰 문제 없다며 설핏 웃었다.
“저번엔 속이 좀 울렁거리는 것 같았는데. 아직까진 괜찮아요.”
“그럼 다행이고. 너무 심하다 싶으면 말해요. 약 지어줄 테니까. 당분간은 아이 상태도 볼 겸 일주일에 한 번씩은 왔으면 좋겠는데. 스케줄 괜찮겠어요?”
“조정해 볼게요. 다음부턴 하루 전날에 미리 연락드리고요.”
“당일에 줘도 괜찮아요. 내가 좀 더 기다리지 뭐.”
“그러면 제가 죄송하잖아요. 오늘도 약속 있으신데 저 때문에 시간도 미루시고.”
세경이 외투와 모자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에 일정이 있어 예약을 잡을 수 없었던 걸, 심 원장이 제 약속까지 미뤄가며 진료를 봐준 터였다.
“미안하면, 나중에 나랑 같이 식사나 해요. 진 대표한테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나 세경 씨 팬이거든.”
“그런 거라면 언제든지요.”
세경이 진료실을 나가자 심 원장이 배웅차 따라나섰다.
“그럼 다음 주에 봬요.”
“그래요. 조심히 가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요.”
“네.”
꾸벅 인사를 한 세경이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문고리를 잡으려고 하자, 누군가 먼저 바깥에서 문을 확, 잡아당겼다.
“……!”
예고도 없이 열린 문에 세경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머, 손님이 있었네? 미안해요. 나는 심 원장만 있는 줄 알고…….”
사과를 한 여자가 묘한 시선으로 세경을 내려다보았다.
“괜찮아요.”
세경이 고개를 꾸벅인 채 병원을 나서자, 심 원장이 문 앞에 서 있는 여자의 곁으로 다가왔다.
“언니, 왜 그러세요?”
“…….”
“예령 언니!”
“어?”
심 원장의 부름에 세경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예령이 고개를 돌렸다.
“아니. 방금 저 사람 윤세경 씨지?”
“와, 그 짧은 시간에 얼굴도 봤어요?”
심 원장이 감탄 어린 눈으로 예령을 쳐다보았다.
“어. 근데 윤세경 씨가 여기엔 무슨 일로?”
“환자의 개인 정보는 비밀이라서요.”
그래서 말해 줄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거린 심 원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근데 하고많은 병원 중에 여기 온 걸 보면 우리 도련님이 소개해 준 건가 봐.”
“뭐, 그렇죠. 아, 언니 잠깐 기다리세요. 저 옷 좀 챙겨 올게요.”
시간을 확인한 심 원장이 진료실로 달려갔다.
혼자 남은 예령은 코를 킁킁거렸다. 공기 중에 부유하는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이고 있었다.
“뭐지? 이거 어디서 맡아 본 향긴데.”
향수 냄샌가? 아까 윤세경이 제 곁을 지나갔을 때 더 짙었던 거 같기도 하고…….
“내가 이걸 어디서 맡아봤더라?”
윤세경 씨가 우리 갤러리에 왔었나?
기억을 더듬던 예령이 도통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
몽글몽글한 순두부가 뚝배기에서 끓어올랐다. 매콤하면서도 달달한 제육볶음도 팬에서 맛있게 익어가고 있었다.
세경은 뚝배기에서 국물을 떠 맛을 보았다. 제 입엔 간이 딱 맞았지만, 태조의 입에도 괜찮을지는 알 수가 없었다.
딩동!
“오셨나 보다.”
벨소리에 반응하듯 인터폰을 확인한 세경이 곧장 현관 앞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자 양손에 커다란 박스를 든 태조가 보였다.
“이게 다 뭐예요?”
“이사 선물.”
아니, 선물을 뭘 두 개씩이나.
그녀가 무거워 보이는 박스를 들어주려고 하자, 태조가 슬쩍 손을 뒤로 물렸다.
“뭐 하려고?”
“하나 주세요. 무겁잖아요.”
“별로 안 무거우니까, 먼저 들어가기나 해.”
태조가 어서 들어가라며 턱을 까닥거렸다. 세경은 괜히 미안한 듯, 그의 손을 내려다보다 집 안으로 들어갔다.
“병원은 잘 갔다 왔어?”
“네. 근데 뭘 사 오신 거예요?”
“공기 청정기. 하나는 거실에, 하나는 침실에 두라고.”
태조가 거실에 박스를 내려놓고 주방으로 향했다. 세경이 접시에 제육볶음을 덜어놓는 걸 보며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 말했던 메뉴랑 좀 다른 거 같은데?”
“음, 그게요…….”
민망해진 세경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나와 태조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세경은 그에게 저녁 메뉴로 낙지볶음이 어떻냐고 물었던 터였다.
태조는 뭐든 괜찮다고 했고, 세경도 차에 오를 때까진 매콤한 낙지볶음에 밥을 비벼 먹을 궁리를 했었다.
하지만 재료를 사러 마트에 갔을 때, 그녀는 해산물 코너 대신 육류 코너로 발길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묘하게 속이 울렁거리는 탓이었다.
저번에 장어를 먹으러 갔을 때도 혼자 그렇게 냄새에 예민하더니. 엄마는 해산물도 좋아하는데 배 속의 아이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속이 안 좋아져서요.”
“입덧인가, 그건?”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저번에 유나랑 장어를 먹으러 갔을 때도 저만 잘 못 먹었거든요.”
“지난번에 병원에 갔을 때도 달걀 초밥이랑 스테이크만 먹었지? 생선은 손도 안 대고.”
그랬나? 그래도 그땐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은 없었는데.
“그래서 참치 초밥을 나 준 거였구나. 세경 씨가 안 먹는 거라서.”
“아니에요. 그런 거.”
그렇게 말하면 제가 싫어하는 것만 골라준 것처럼 보이지 않나. 세경이 억울한 표정으로 태조를 흘겨보았다.
“그보다 이거, 간 좀 봐주세요.”
수저를 든 세경이 고추기름이 올라온 찌개 국물을 한 숟갈 떴다. 태조가 고개를 숙여 맛을 보곤 시선을 들었다.
“괜찮네.”
“그래요? 다행이다. 간이 안 맞으면 어쩌나 했는데.”
불은 끈 세경이 음식들을 식탁에 옮겨놓았다. 미리 접시에 담아놨던 밑반찬과 깨를 솔솔 뿌린 제육볶음, 팔팔 끓어오르는 순두부찌개까지 올라오자 그럴듯한 한 상이 차려졌다.
“드세요. 차린 건 없지만.”
“이만하면 많이 차렸지. 잘 먹을게.”
태조가 식사를 하자, 세경이 그의 반응을 살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우려와 달리 태조는 금세 밥 한 공기를 비워냈다.
“오늘 병원에선 뭐래?”
“초음파 확인했는데. 아이는 잘 자라고 있대요. 아기집도 주 수에 맞게 크고, 난황도 동글동글 잘 보이고. 피고임도 없다고. 아, 사진 있는데 보여드릴게요.”
침실로 들어간 세경이 초음파 사진을 가지고 와 태조에게 건넸다.
“이게…….”
시커먼 사진을 본 태조가 당최 이게 뭐냐는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여기 큰 게 아기집이고, 요 안에 있는 게 아이. 그 옆에 동그란 게 난황이래요.”
태조의 옆으로 간 세경이 초음파 사진을 가리키며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사진 속에서 조그만 아이의 존재를 확인한 태조의 미간이 더 좁아 들었다.
“이 쥐콩만 한 게…… 아이라고?”
6주밖에 안 된 쥐콩이가 들으면 서운해할 소리였다.
태조의 반응에 세경이 웃음을 삼켰다.
“네. 몇 주 뒤엔 젤리곰도 볼 수 있다던데요?”
“젤리곰은 뭐야?”
“곰 모양 젤리 있잖아요. 태아가 9주쯤 되면 젤리곰처럼 생겼다고. 아, 그리고 원장님한텐 아직 말 안 하는 게 좋겠죠? 대표님이 아이 아버지라는 거요.”
“필요하면 해야지. 계속 숨길 수는 없으니까.”
“그러다 심 원장님이 대표님 멱살이라도 잡으면요?”
“한번 잡혀야지.”
태조가 별수 있냐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 그리고 심 원장님이 아이 태명은 지었냐고 물어보시던데.”
“태명이라……. 혹시 생각해 둔 거 있어?”
“아뇨. 대표님은요? 뭐라고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음…….”
태조가 턱을 매만지며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세경을 빤히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앙꼬로 할까?”
“앙꼬요?”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세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엄마는 앙큼한 고양이고, 배 속에 있는 건 앙증맞은 꼬마 고양이고.”
우리 쥐콩이는…… 고양이 아닌데.
“고양이…… 아니에요.”
“그럼?”
태조가 묻자, 세경이 꿈속에서 본 작은 짐승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귀여운 호랑이라고요.”
“호랑이? 갑자기 웬 호랑이야?”
이미 태몽도 꾼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대표님 사무실에서 잠깐 잤을 때, 꿈을 꿨거든요.”
“무슨 꿈?”
“요만한 작은 호랑이가 제 손에 얼굴을 올려대는 꿈이요. 턱을 만져주니까 고롱고롱 거리는 게 얼마나 귀엽던지.”
“그래서 그때 귀엽다고 한 거야?”
세경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꿈에서 호랑이가 나왔으니, 꼬마 고양이보다 더 늠름한 태명이 붙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살짝 품고서.
“그런데 호랑이도 고양잇과잖아.”
“그렇……죠?”
“그럼 딱이네. 앙증맞은 꼬마 고양이.”
“…….”
내일 당장 심 원장님께 진 대표가 아이 아버지라는 걸 말해줘야 할까.
세경은 조용히 제 배에 손을 올렸다.
새끼 호랑이가 꼬마 고양이로 강등되는 순간이었다.
***
저녁을 먹은 후, 태조가 공기 청정기를 침실과 거실에 설치해 두는 동안, 세경은 후식으로 먹을 과일과 차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
“이거부터 드시고 하세요.”
“다 했어. 설명서는 여기. 위치 바꾸고 싶으면 말해. 혼자 옮기지 말고.”
세경은 태조가 준 설명서를 한쪽에 두고 그에게 딸기를 찍은 포크를 내밀었다.
아까 전부터 틀어놓은 티비에서는 유나가 출연한 부부이몽의 재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저 사람이 세경 씨랑 같은 그룹 멤버였지?”
딸기를 양 볼 가득 채워 넣은 세경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멤버들하곤 계속 연락하고 지내나 봐?”
“유나랑만요. 다른 친구들과는 데면데면해요. 거의 연락도 안 하고.”
“흐음.”
덤덤하게 말하는 세경을 보며, 태조는 지난번 신 매니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세경이 예능 프로를 촬영하면서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다고 했었다. 그 사람도 세경과 같은 그룹 활동을 했던 멤버였다고.
“원래는 가수가 하고 싶었던 거야?”
“저요? 음, 그렇다기보단……. 사실 가수 쪽은 생각도 안 하고 있었어요.”
“생각도 안 했다고? 세경 씨, 가수에서 연기자로 넘어온 케이스잖아.”
“활동상으론 그렇긴 한데. 실은 저 원래부터 배우가 꿈이었어요. 그쪽으로 준비 중이기도 했고.”
“그런데 왜 가수로 데뷔했어?”
“굳이 따지면 아주 오래전에 아역으로 영화에 잠깐 출연하기도 했는데…….”
“아역으로? 그건 필모에 없던데?”
“제가 따로 언급하지 않았으니까요. 정말 잠깐 출연한 거기도 하고. 아무튼, 본격적으로 연기를 하고 싶어서 소속사에 들어간 거였는데, 회사에선 배우보다 가수 쪽에 더 신경을 쏟더라고요. 그러다가 저한테 제안이 들어왔어요.”
“가수로 먼저 데뷔하자고?”
“네. 본격적으로 배우 활동하기 전에 가수로 데뷔해서 인지도도 쌓으면 배역도 더 따내기 수월할 거라면서.”
어쩐지. 첫 작품부터 꽤 연기를 한다 싶었더니.
“그래서 한 거야?”
“어른들이 하라고 하니까. 지금이라면 거절했을 텐데. 그땐 저도 어리고 하니까, 그게 맞는 건가 했어요. 데뷔 결정되고 나서는 보컬 레슨에 댄스 연습에…….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 스케줄을 다 소화한 건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일이 많으니, 촬영장에서 코피도 쏟고 그러지.”
자신만큼이나 태조에게도 그 첫인상이 꽤나 강렬했던 모양이었다. 저렇게 잊지 않고 언급하는 걸 보니.
“그때는 그룹의 존폐가 달린 마지막 앨범이라서, 소홀히 할 수가 없었어요.”
“아, 그러고 보니 아이돌 그룹이라고 해서 생각이 난 건데.”
문득 떠올랐다는 듯, 태조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화면에 사진을 띄워 세경에게 보여주었다.
“이번에 우리 회사에서 데뷔 준비 중인 애들. 콘셉트를 어떤 거로 할까 고민하는 모양인데.”
“이제 막 데뷔하는데 이런 제복 콘셉트는 좀 무거워 보이지 않을까요? 다음 앨범은 이보다 더 강렬해야 할 텐데. 이런 느낌이면 교복으로도 충분히 비슷한 분위기는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네. 근데, 대표님 사진은 이게 다예요?”
사진을 넘겨보던 세경이 태조를 올려다보았다.
“사진? 사진은 왜?”
“아니. 다들 잘생기기도 해서.”
“…….”
“가끔 보면서 얼굴 태교라도 좀 할까 하고요.”
순간 태조의 눈썹이 미세하게 들썩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