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형수님의 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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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형수님의 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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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형수님의 촉
2022.11.02.
“어머니, 저 왔어요!”
어둑해진 저녁, 시댁을 찾은 예령이 경쾌한 인사를 건넸다. 거실에 앉아 있던 마혜영 여사가 예령을 향해 고개를 까닥거렸다.
“왔니?”
“네. 아버님이랑 그이는요?”
“지금 오고 있는 중이란다.”
“도련님은요? 오늘도 늦으시려나?”
“그 녀석은 오늘 바빠서 못 온대. 그보다 예령아, 잠깐 이리 좀 와 보렴.”
마 여사의 부름에 예령이 시모의 곁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유심히 보고 있던 마 여사가 예령 쪽으로 화면을 넘겼다.
“이 사람들 어떠니?”
“갑자기 이 사람들은 왜요?”
예령은 액정에 뜬 사진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모가 보여준 사진 속 사람들은 죄다 여자였다. 그중 몇몇은 마 여사와 함께 참석했던 사교 모임에서 본 적이 있는 여자들이었다.
“괜찮은 사람 있으면 태조한테 소개 좀 해줄까 하고.”
“도련님한테요?”
“응.”
“하지만 저번에 도련님이 맞선 상대는 찾지 말라고 못 박고 갔잖아요.”
“그렇긴 한데. 그 녀석이 여태껏 아무 소식이 없으니까. 그 썸인지 뭔지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고. 일단 내가 먼저 사진이라도 보내면, 또 어떻게 아니? 태조가 조급해서 빨리 움직일지.”
“글쎄요. 도련님은 그런 거에 꼼짝도 안 할 거 같은데. 그러지 말고 좀 더 기다려 보시는 게 어때요? 아니면, 제가 슬쩍 떠볼까요? 요즘 그 향수의 주인과는 어떻게 되고 있는지.”
“그래 볼래? 진전 없으면 이 중의 한 명 골라 만나보라고 하고. 대체 그 녀석은 누굴 닮은 건지. 간 보는 것도 아니고, 무슨 썸을 타고 그런다니? 좋으면 좋고, 싫으면 마는 거지.”
“그러게 말이에요. 우리 도련님 눈이 좀 높나? 하긴, 주변에 예쁜 사람이 넘쳐나니, 그럴 만도 하…….”
으음?
말끝을 흐린 예령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방금 뭔가가 눈앞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간 것 같은데.
“왜 그러니?”
“아뇨. 뭔가 생각이 날 듯 말 듯 해서요.”
“갑자기 뭐가? 아, 그이랑 윤조 들어오나 보다.”
바깥에서 말소리가 들려오자, 마 여사가 두 사람을 마중하러 몸을 일으켰다.
이마를 긁적거린 예령은 시모의 뒤를 따르며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도련님, 진태조, 썸타는 여자, 향수, 예쁜 사람, 진 엔터테인먼트…….
응? 진 엔터테인먼트?
“아!”
퍼뜩 떠오른 장면 하나에, 걸음을 멈춘 예령이 손바닥을 부딪쳤다.
‘아니. 방금 저 사람 윤세경 씨지?’
‘와, 그 짧은 시간에 얼굴도 봤어요?’
심 원장의 병원에서 스치듯 지나갔던 그 여자.
분명 태조가 대표로 있는 진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된 배우였다.
“그리고 그 향기…….”
곱게 휘어진 예령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그날, 윤세경이 제 곁을 지나칠 때 어디선가 맡아본 적 있는 달콤한 향기가 풍긴다 싶었는데.
‘아니. 아까 식사할 때부터 느꼈는데, 오늘 도련님 몸에서 여자 향수 냄새가 진동을 하더라고.’
저번에 같이 저녁을 먹었을 때.
태조가 온몸에서 폴폴 풍기던 그 향수 냄새와 같았다.
***
태조는 무심히 흐르는 시곗바늘을 톡톡 두드렸다.
촬영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중이라고 연락을 받은 지가 30분 전. 세경의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린 지는 10분 정도 되었다.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 누군가를 이렇게 기다리는 건, 오랜만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건 아까운 짓이라고 생각했는데. 가끔 이런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온전히 누군가를 생각하며, 그 사람을 기다리는 것쯤은.
또롱.
조용한 차 안에 메시지 도착음이 울렸다. 거의 다 왔다는 세경의 메시지일까.
기대하며 메시지 창을 띄운 태조가 인상을 썼다.
[도련님, 나한테 뭐 할 말 없어요?]
“할 말 뭐.”
엉뚱한 메시지에 불만은 육성으로 터졌다.
본가 장독대에 문제라도 있나. 왜 형수님은 본가만 가면 이상한 소리를 하시는 거지?
태조가 할 말이 없다고 답장을 보내려는 찰나, 화면이 바뀌며 성격 급한 예령의 이름이 떴다.
“네, 형수님.”
- 도련님, 내 문자 봤어요?
“네. 봤습니다. 안 그래도 지금 답장을 보내려고 했는데.”
- 그래서, 할 말은요?
인사도 생략한 예령이 다짜고짜 용건부터 꺼냈다. 살짝 들떠 있는 목소리가 뭔가를 잔뜩 기대하는 것 같았다.
태조는 구겨진 미간을 문지르다 입을 열었다.
“오늘 못 가서 죄송합니다?”
- …….
아, 이게 아닌가?
예령의 반응이 떨떠름했다. 할 말이 없냐고 물어보는 건, 듣고 싶은 말이 있다는 건데.
“도대체 무슨 말이 듣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요? 난 형이 아니라서 형수가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몰라요.”
- 그럼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은 알고요?
“다른 사람, 누구요?”
- 음, 예를 들면 여자친구라거나, 여자친구라든가, 여자친구 같은?
다 똑같은 상대잖아.
한숨을 쉰 태조가 피곤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갑자기 왜 이래요? 저번에 말했는데, 어머니가 또 내 맞선 상대라도 찾으시는 겁니까?”
- 와, 눈치 빠르네요, 우리 도련님. 안 그래도 오늘 집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가 나한테 웬 여자들 사진을 보여주시더라구. 괜찮은 사람 있으면 도련님한테 소개해 주겠다던데요?
“바빠서 만날 생각 없다고 해요.”
- 바빠요? 사업 때문에?
“네.”
- 무슨 사업? 엔터 사업 말고 연애 사업?
이 형수님이, 진짜.
태조가 핸들을 꽉 움켜쥐었다. 저번에 세경이 준 향수를 온몸에 두르고 가서 이러는 건가? 아니면 뭔가 눈치라도 챈 건…….
아니, 그럴 리 없지.
태조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세경과 연애를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예령이 뭘 알고 있으려고.
“엔터 사업으로 바쁩니다. 그리고 잠시 잊고 계시는 거 같은데, 저 엔터 사업만 하는 거 아니고 드라마와 영화도 만들거든요?”
- 흐흥.
가소롭다는 듯, 핸드폰 너머로 묘한 의미가 담긴 콧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모르게 등골이 섬뜩해지는 게, 뒷목이 뻣뻣해지는 느낌이었다.
-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마음만 먹으면 연애는 하던데. 나랑 우리 윤조 씨 연애할 때 생각해 봐요. 그 바쁜 와중에 매일 나 보러 오는…….
“그건 두 분의 연애를 위해 제가 희생한 덕분 아닙니까? 제가 형이 해야 할 일까지 떠맡은 건 기억도 안 나시나 봐요?”
- 어, 음……. 그랬나?
본인한테 불리한 건 모른 척하시긴.
태조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때 그의 차가 서 있는 반대편 길에서 검은색 밴 한 대가 들어왔다.
그는 차에서 내리는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형수님, 이만 끊을게요. 내가 좀 바빠서.”
- 에? 잠깐, 도련…….
예령의 부름을 무시한 태조가 냉정하게 전화를 끊었다.
그는 핸들 위로 몸을 기댔다.
세경을 내려주고 밴이 떠나자, 잠시 후 안쪽으로 사라졌던 그녀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뭐 하는 건데, 저건?”
기둥 뒤에 바짝 붙은 세경이 주위를 경계하듯 두리번거렸다.
아무튼, 하는 행동도 고양이 같긴.
그가 여기 있다는 듯 비상등을 깜빡거렸다. 천천히 차를 이동시키자, 그녀가 빠르게 조수석에 올라탔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한 십 분 정도? 조금 전엔 나 찾고 있었던 거야?”
“그건 아니고. 혹시 누가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닌가 해서요. 여기에 저 말고도 유명 연예인이 살고 있다고 들었거든요.”
“그렇게 주변을 살핀다고 파파라치들을 찾을 수 있을 거 같아? 다 숨어서 찍는데. 그렇게 불안하면 아예 내 집으로 들어오는 건 어때?”
“와, 이렇게 은근슬쩍…….”
……같이 살자고 하네?
세경이 어림없다는 눈으로 태조를 흘겨보았다. 그가 장난스럽게 세경의 코끝을 톡, 건드리곤 안전벨트 쪽으로 손을 뻗었다.
“저녁은?”
“아직이요.”
“그럼 점심부터 쭉 굶었겠네.”
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간에 소시지 몇 개를 집어 먹었지만 그건 식사가 아니니까, 뭐.
“집에 고기 사다 놨어.”
“고기…….”
세경이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태조가 조수석 안전벨트를 채워주고 핸들을 잡았다.
“고기 말고 또 먹고 싶은 건 없어?”
“음, 달콤한 과일이 좀 먹고 싶어요.”
“어떤 거?”
“샤인머스캣이랑…….”
“또?”
“애플망고?”
“앙꼬 녀석, 입도 고급이네.”
태조가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
“허, 이거 봐라. 이젠 전화도 막 끊어버리네?”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보며 예령이 헛숨을 흘렸다. 미끼를 여러 개 던지고 기다렸으나 태조는 물지도 않고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갔다.
“분명 두 사람이 무슨 관계가 있는 거 같은데.”
아니면, 우리 도련님 일찌감치 차이셨나?
“여기서 뭐 해?”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어깨 위로 얇은 카디건이 걸쳐졌다. 예령이 입술을 쫑긋거리며 윤조를 올려다보았다.
“도련님하고 통화 좀 했어요.”
“태조랑? 왜?”
“아니, 아까 어머니께서 웬 여자들 사진을 보여주면서 도련님한테 소개해 줄까, 하고 말씀하시길래.”
“어머니도 참. 저번에 싫다고 하는 말도 들었으면서. 근데 그때 태조 여자 있는 거 같다고 말하지 않았어?”
“으음. 그래서 좀……. 있으면 말하라고 쿡쿡 찔러봤는데. 여자친구가 있다는 말은 안 하네?”
“태조 성격에 있다고 순순히 말하겠어? 음, 아니면 내가 한번 알아볼까?”
“자기가 어떻게? 도련님한테 직접 물어보게요?”
“아니. 우현이나 석주한테.”
“음.”
예령이 고민하며 손가락으로 입술을 두드렸다. 두 사람 다 태조의 절친이니, 그에게 연인이 생기면 누구인지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만약 태조의 연애 상대가 정말 윤세경이라면?
소속 연예인과 사귀는 것도 사내 연애 비슷한 거 아닌가?
그걸 도련님이 대놓고 티를 낸다고?
“왜? 지금 당장 전화해 볼까?”
예령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윤조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남편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음에. 내가 뭐 좀 알아보고 나서.”
자신의 촉은 두 사람이 무슨 관계가 있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것도 아직 심증일 뿐 확신은 아니었다.
만약 태조가 정말 세경과 만난다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볼 필요도 있었다.
‘그래야 도움을 주든가 말든가 하지.’
그렇다면 우선 윤세경을 만나는 자리부터 만들어야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느라 그렇게 웃어?”
“응? 아니. 조만간 재밌는 일이 생길 것 같아서.”
태조를 통해 접근하면 눈치를 챌 수 있으니, 먼저 심 원장부터 포섭해야겠다.
생긋 웃은 예령이 윤조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
기름지게 배를 채운 뒤, 세경은 깨끗이 씻은 샤인머스캣을 입에 굴리며 기름진 속을 달래고 있었다.
“아까 통화하던 사람은 누구야?”
“아까요?”
태조의 물음에 양 볼을 볼록하게 만든 세경이 두 눈을 껌뻑거렸다. 그러다 뒤늦게 생각이 난 듯 다시 입을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아, 마트 주차장에 있을 때 말이죠?”
세경이 샤인머스캣과 애플망고를 먹고 싶다고 하자, 태조는 집에 오기 전에 마트부터 들렀다.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세경은 차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고, 태조만 마트에 들어갔다 나온 터였다.
그리고 그가 차에 올라탔을 때, 막 통화를 마치고 있었던 걸 태조가 들은 모양이었다.
“엄마요. 이사도 했으니까 한번 서울로 올라오신다고 하셨거든요.”
“언제 오신다는데?”
“원래는 제가 쉬는 날 오기로 했었는데……. 이번에 드라마 편성이 당겨졌잖아요. 그래서 스케줄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냥 편한 날 아무 때나 오시라고 했어요.”
“날짜가 정해진 건 아니고?”
태조가 작게 잘린 애플망고를 포크로 찍어 세경의 입에 넣어주었다.
“네. 그래도 쉬는 날 오셨으면 하는데. 그래야 공항으로 마중도 갈 수 있으니까요. 나중에 스케줄 나오는 거 보고 다시 통화해 봐야죠.”
세경의 어머니라.
처음 세경과 계약을 했을 무렵, 인사 차 한번 통화를 했을 뿐, 실제로 만나 뵙진 못했다.
그때는 회사 대표로 연락을 했던 거라, 분위기가 나쁘진 않았지만 이번엔 어떨는지.
“아직 어머니께는 이야기 안 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