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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그냥, 하고 싶어서. (28/100)


28. 그냥, 하고 싶어서.
2022.11.05.



“네. 이번에 집에 오시면 그때 이야기해보려고요.”

세경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근데 엄마가 저 임신했다는 거 알고 울면 어떡하죠?”

삐죽 튀어나온 세경의 입가가 아래로 축 처졌다. 동시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세경의 눈가가 울먹울먹해졌다.


“아니……. 지금 우는 건 어머니가 아니라 세경 씬데?”

“원래 엄마 이야기가 나오면 다들 조금씩 울컥하거든요?”

태조가 옆으로 다가가자, 세경이 항변하듯 눈에 힘을 주었다. 울음이 나올 거 같은데, 눈물을 떨구지 않으려고 아주 필사적이었다.


“그리고 이건……. 임신하면 감정 기복이 심해지니까 이러는 거예요.”

“알아. 그러니까 그냥 참지 말고 울라고.”

태조가 빨개진 눈가를 살짝 쓸어주었다. 그러자 둑이 무너진 것처럼 참고 있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아, 정말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입술을 깨문 세경이 다급하게 눈물을 훔쳐냈다. 하지만 아무리 닦아내도 마르지 않는 샘처럼 눈물은 자꾸 꾸역꾸역 흘러내렸다.

괜찮다고, 어떻게든 제 능력으로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마음 한편엔 말하지 못했던 불안이 자리 잡고 있던 모양이었다.


“흑…….”

켜켜이 쌓여 있던 불안을 터트리듯 잇새로 울음이 터져 나왔다. 태조는 훌쩍거리는 세경의 머리를 감싸 안고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툭, 떨어진 얼굴이 너른 가슴에 파묻혔다. 셔츠가 눈물로 젖어 들어갔지만, 태조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는 세경의 머리만 조용히 쓰다듬었다. 마치 그녀의 불안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

머리를 감싸 쥐는 다정한 손길과 따뜻한 품에서 왠지 모를 안도감이 느껴졌다.

세경은 태조의 품으로 파고든 채, 그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



“다 대표님 때문이에요. 괜히 울라고 해서.”

소파에 누운 세경의 눈두덩 위로 얼음주머니가 올라갔다. 거의 한 시간 동안을 그의 품에서 울어댄 탓에 두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나 붙잡고 엉엉 울어댄 게 누군데. 실컷 이용해 먹고 탓하는 건가?”

태조가 얼음주머니를 휙 들어 올렸다. 세경이 토끼처럼 빨개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가 보란 듯 눈물로 얼룩진 셔츠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 그러게 누가 울고 있는 사람 끌어안으랬나.”

세경이 태조의 손에 들린 얼음주머니를 빼앗아 다시 제 눈에 올려놓았다.

그의 앞에서 아이처럼 울어버린 게 부끄러운 건지 동그란 귓바퀴며 뺨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보다 왜 계속 바닥에 앉아 계세요? 저쪽에 앉으세요. 바닥 차갑잖아요.”

“이렇게 있으니까 세경 씨랑 시선이 비슷해지지 않았어?”

“글쎄요. 잘 모르겠는…….”

눈을 가리니까 민망함이 좀 덜한 걸까?

종알종알 귀엽게 떠들어 대는 입술을 바라보다, 태조가 다시 얼음주머니를 빼앗아 갔다.

그러자 세경이 태조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봐. 딱 맞네.”

세경이 누운 소파 위로 턱을 괸 태조가 그녀와 눈을 맞췄다.

사람 설레게 왜 저렇게 보는 거람?

관찰인지 관심인지. 곧게 뻗어오는 태조의 시선이 세경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괜한 승부욕에 발동이 걸린 세경도 지지 않고 태조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호기로운 호승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태조는 저를 계속 봐도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지만, 세경은 그렇지 않았다.


“…….”

세경의 눈동자가 탁구공처럼 수초에 한 번씩 방향을 바꿔 움직였다. 위로 슬쩍 올라갔다 태조를 보고, 아래를 힐끗거렸다 다시 태조를 보고.

그럼에도 계속 태조와 눈이 마주치자 세경은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일그러트렸다.

게다가 그를 볼 때마다 저 눈동자에 제 얼굴이 오롯이 비추는 게 사람을 더 미치게 만들었다.

꼭 그날 일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 같아서.


“그만 봐요.”

먼저 항복을 선언한 세경이 손을 들어 태조의 시야를 가렸다. 그가 세경의 손을 잡아 아래로 끌어내렸다.


“왜?”

“왜긴요. 계속 그렇게 쳐다보면 제가 민망…….”

촉. 잡힌 손을 빼내려던 세경이 그대로 몸을 굳혔다. 눈 깜짝할 새 태조의 입술이 제 입술에 닿았다 떨어진 탓이었다.


 
뭐지, 이건. 신종 입막음인가?

갑작스러운 키스에 넋을 놓고 있는 사이, 태조가 다시 입을 맞춰왔다. 첫 번째는 워밍업이었다는 듯, 두 번째 입맞춤은 조금 더 짙고 길었다.


“하아…….”

살짝 물리고 빨렸던 입술이 떨어지자 참고 있던 숨이 터졌다. 반들반들하게 젖은 입술이 그의 입술 위에서 속삭였다.


“뭐예요, 갑자기.”

“그냥, 하고 싶어서.”

태조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거창한 이유는 아니었지만, 저 말이 더 마음에 와닿는 걸 왜일까.

자신이 늘 그랬던 거라서?

처음 그를 마음에 담은 순간부터 그랬다. 그냥 그를 보고 싶었고, 그냥 그와 닿고 싶었다.

거기에 따로 이유를 붙이면 ‘좋아서’쯤이 되려나.


“…….”

겨우 떨어졌던 열이 다시 들불처럼 번지는 듯했다.

세경은 꾸물꾸물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바로 세웠다. 태조의 손에 들린, 녹아서 물이 고인 얼음주머니를 가져가 열 오른 뺨에 꾹 눌렀다.


“그보다 드라마도 곧 방송될 텐데. 임신 사실은 숨겨야겠죠?”

“굳이 먼저 나서서 드러낼 필요는 없겠지.”

분위기를 환기할 겸 세경이 말을 돌렸다. 태조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경의 옆에 앉았다.


“그래도 걱정되는 거지? 혹시나, 중간에 누가 알아챌까 봐.”

“네.”

세경이 수긍하자, 태조가 그녀의 손에서 얼음주머니를 가지고 갔다. 그가 물에 젖은 세경의 뺨을 손으로 쓱, 문질렀다.


“넌 어쩌고 싶은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피디님한텐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무슨 일이 터져도 대응을 하지. 드라마 끝날 때까진 숨기고 싶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는 모르는 거니까.”

“그게 마음이 편하다면 그렇게 해. 나중에 피디님과 따로 이야기할 자리를 만들어 볼게. 아, 그리고 앞으로 세경 씨 스케줄은 송 실장이 먼저 체크하고 관리할 거야.”

“송 실장님은…… 뭐라고 하세요?”

“세경 씨 임신한 거? 걱정이 많던데. 아이 아버지가 누군지도 궁금해하고.”

“아…….”

세경의 입에서 난감한 탄식이 샜다. 지금은 송 실장만 알고 있다지만, 다른 사람들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는지.

거기에 그 아이의 아빠가 태조라고 하면……. 다들 벙쪄서 굳어버리지 않을까?


“송 실장님만 아시는 거죠? 강 상무님이나 석주 선배는…….”

“그 녀석들은 나중에. 그보다 신 매니저는 눈치 못 챘어? 입덧이라도 하면 금세 알아챌 것 같은데.”

“아직 입덧이 심한 건 아니라서요. 그래도 곧 알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요즘 평소와 달리 좀 쉽게 피로한 데다 먹는 것도 전과 달라서.”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경이 크게 하품을 했다. 아침부터 촬영에 눈물까지 펑펑 쏟았더니 피곤이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송 실장에게 무리다 싶은 스케줄은 본인 선에서 커트하라고 했지만. 무엇보다 자기 몸이 우선이니까. 중간에 몸 상태가 안 좋아지면 나나 송 실장에게 바로 이야기해. 나도 세경 씨 스케줄은 공유하고 있을 거니까.”

“그럴게요.”

“아, 그리고 세경 씨한테 줄 게 있는데.”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 태조가 침실로 들어갔다. 다시 나온 그의 손엔 작은 물체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거, 세경 씨 거지?”

태조가 손을 펼치자 세경의 눈이 동그래졌다. 잊어버린 지 꽤 돼서 이젠 못 찾을 줄 알았는데.


“이게 왜…….”

여기서 나와요?

***


 
날씨가 풀리자, 앙상한 나뭇가지에도 귀여운 꽃망울이 폈다.

광고주와의 첫 미팅을 마치고, 차로 돌아온 세경은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잃어버린 귀걸이가 다시 제 손에 돌아왔다. 어딘가에 떨어져 영영 못 찾을 줄 알았는데, 그게 태조에게 있었을 줄이야.


“누나, 그 귀걸이 찾으신 거예요?”

“응.”

“다행이네요. 그거 없어져서 되게 속상해하셨잖아요. 어디서 찾으신 거예요?”

제훈이 조수석에 있는 짐들을 뒤적거리며 물었다.

태조는 그날 아침, 침대맡에서 귀걸이를 발견했다고 하였다. 자신을 찾는 데 이 한정판 귀걸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귀걸이를 잃어버린 게 호텔에서 묵고 있을 때니, 태조에게 받았다고 하면 이상하게 들리겠지.

잠시 고민한 세경이 두루뭉술하게 둘러댔다.


“가방에서 찾았어. 어디서 빠진 게 거기로 들어갔나 봐.”

“그래요? 아, 누나 이거 오늘 받은 스케줄 적어놓은 거거든요. 한번 보세요.”

세경은 제훈이 주는 스케줄 표를 받았다. 자신의 말을 철석같이 믿는지, 그는 어설픈 변명에도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다다음주부터는 바빠지겠네. 포스터 촬영에 제작 발표회도 준비해야 하고.”

“그러니까요. 편성이 당겨져서 일정이 엄청 빡빡해졌어요. 이번에도 회사 워크숍은 못 가겠죠? 잠깐이라도 갔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아쉬운 표정을 한 제훈이 차 시동을 걸었다. 재작년과 작년 회사 워크숍 겸 야유회 땐 세경의 촬영이 있어, 그도 덩달아 참석하지 못한 터였다.

작년에 보물찾기 같은 걸 해서 직원이 100만 원의 상금을 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밤에는 회사 직원과 소속 연예인이 어울려 가벼운 술자리도 가졌다고.


“거기 벚나무 심어진 길이 되게 예쁘대요. 밤에는 조명도 켜져서 운치도 있다고. 그래서 사내 연애하는 사람들이 몰래 걷다 들키기도 한대요.”

“그래? 석주 선배는 술자리 이야기만 하던데.”

석주는 회사 워크숍의 단골 참석자였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직원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끼어들었고, 그 덕에 회사 직원들과 두루두루 사이도 좋았다.

작년엔 태조와 강 상무도 참석해서, 술자리가 더 떠들썩했다고 하였다.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해서, 세경이 얼마나 아쉬워했던지.

대표님은 올해도 늦게까지 남으려나?

이따가 한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가방 속에서 울리는 벨소리에 세경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심 원장님]

발신인을 확인한 세경이 운전석 쪽을 힐끗거렸다. 제훈은 허밍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운전에 집중하고 있었다.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린 세경이 목소리를 낮췄다.


“네. 안녕하세요, 심 원장님.”

- 잘 지냈어요, 세경 씨? 지금 통화 가능해요?

“지금 차 안이라서……. 예약 때문에 그러세요?”

- 차 안? 아아, 지금 이동 중이에요? 그럼 매니저랑 같이 있겠구나.

그렇담 눈치껏 말을 골라야겠네. 심 원장이 중얼거리는 말에 세경은 스케줄이 적힌 종이 끝을 만지작거렸다.


- 예약일은 나중에 문자로 넣어주고, 오늘은 다른 용건 때문에. 혹시 세경 씨 전시에 관심 있어요?

“전시요?”

- 응. 그림 전시요. 내가 아는 사람한테 표를 받았는데. 세경 씨도 같이 보면 좋을 것 같아서.

간혹 기분 전환도 할 겸 미술관을 찾아가 그림을 보는 걸 좋아하긴 했다. 다만 요즘은 시간이 없어 그러지 못했지만.


“무슨 전시인데요?”

- 요즘 핫한 젊은 작가래요. 작가 이름이 레마? 고양이를 모티프로 작품 활동을 한다고. SPA 브랜드랑 콜라보도 했다던데. 들어본 적 있어요?

“아, 네. 알 것 같아요. 근데, 어쩌죠? 제가 요즘 스케줄이 갑자기 늘어서. 갤러리 오픈에 맞춰 시간을 내기가 힘들 것 같은데.”

- 그건 걱정 말아요. 그 갤러리 관장님이 내가 아는 사람이라. 미리 오는 날만 알려주면 늦게까지 기다려 주겠대요.

“음…….”

세경이 침음을 흘렸다. 그렇게까지 폐를 끼쳐도 괜찮은 건가? 그렇다고 심 원장이 일부러 저를 챙겨주는데 거절하는 것도 미안하긴 하고.


- 시간 정말 안 될 것 같아요? 안 그럼 나 혼자 가야 하는데.

마치 꼭 자신과 같이 가야 할 것처럼, 심 원장이 시무룩한 소리를 냈다.


“아니. 저 때문에 폐장을 늦추는 건가 해서요.”

- 어차피 나도 저녁때 아니면 시간 못 내요. 그러니 같이 가요. 응?

진짜 민폐는 폐장 이후에 나 혼자 돌아보는 게 아니냐며.

심 원장은 영 마음에 걸리면 가서 전시 홍보차 사진 한 장만 찍어달라고 했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못 가겠다 할 수도 없고.


“그래요. 그럼, 다음 진료 끝나고 같이 가요.”

세경이 웃으며 대답했다.

***



“됐어요?”

전화를 끊은 심 원장이 앞에 앉은 사람을 쳐다보았다. 턱을 괴고 통화 내용을 듣고 있던 여자가 만족스러운 듯 빙긋 웃었다.


“응. 잘했어.”

진료일도 아닌데 무슨 일로 찾아왔나 했더니. 용건이 이거였나 보다. 그녀는 심 원장이 통화를 마치자 제 볼일은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따라 일어난 심 원장은 문 앞까지 여자를 배웅했다.


“나중에 날짜 정해지면 나한테 미리 연락줘.”

“알았어요. 들어가세요, 언니.”

심 원장은 문가에 기대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나저나, 예령 언니가 언제부터 세경 씨한테 관심이 생긴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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