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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내 이름이 대표도 아니고. (29/100)


29. 내 이름이 대표도 아니고.
2022.11.09.



 
노트북과 모니터를 끈 태조가 옷걸이에 걸어둔 재킷을 걸쳤다. 핸드폰과 차 키를 들고 사무실을 나가려는데, 손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윤세경]

태조가 눈썹을 들썩였다. 시계를 보니 8시 반. 조금 전에 저녁을 먹는다는 문자를 받았는데,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 싶었다.

설마 어디 아픈 건 아니겠지. 통화버튼을 누른 그가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 대표님…….

전화를 받자마자 건너편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이 다 빠진 듯한 목소리였다.

순간 임신 초기엔 조심해야 한다는 심 원장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태조는 차 키를 움켜쥐고 사무실을 나섰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난 터라 건물에 남아 있는 직원은 얼마 없었다.


“어, 말해. 무슨 일 있어?”

- 아뇨, 무슨 일은 아니고요.

“목소리에 힘이 없는데.”

- 조금 전에 입덧을 해서……. 좀 지쳐서 그래요.

얼마나 입덧이 심하면 지칠 정도야. 심 원장에게 전화를 해서 약이라도 달라고 해야 하나.

인상을 쓴 태조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간 그는 곧장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럼 저녁도 못 먹었겠네.”

- 네. 오랜만에 된장국도 끓였는데…….

말을 하는 도중 다시 우욱, 헛구역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는지 가슴을 둥둥 두드리는 소리도.


“심해? 심 원장한테 연락할까?”

- 이 정도로 무슨 연락까지 해요. 임신하면 다들 하는 건데. 그보다요, 대표님.

“응.”

- 저 부탁이 하나 있는데.

“무슨 부탁?”

- 저번에 산부인과 갔을 때요.

태조가 초조하게 핸들을 두드렸다.

병원 이야기가 나오자 괜히 신경이 곤두섰다. 그날 무슨 일을 했더라.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세경이 말했다.


- 그때 먹었던, 스테이크 좀 사다 주시면 안 될까요?

 

***

복도를 걷는 태조의 걸음이 빨라졌다. 손에는 검은색 바탕에 금색 상호명이 박힌 쇼핑백이 달랑달랑 흔들리고 있었다.

입덧 때문에 저녁으로 먹은 된장국도 게워냈는데, 세경은 그 와중에 그날 먹은 스테이크가 몹시도 먹고 싶다고 했다.

자기가 직접 가서 사 오고 싶었는데, 차를 타고 가다가 또 입덧을 하면 어쩌나 싶어 꾹 참고 있었다고.


“먹고 싶으면 사다 줘야지.”

이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집 앞에 도착한 태조가 손을 뻗었다. 벨을 누르려는 순간, 안쪽에서 먼저 철컥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살짝 열린 철문 사이로 세경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태조의 입가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나 오는 건 어떻게 알고.”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를, 아니면 고기를?”

“고기를 들고 오는 대표님을요.”

세경이 어서 들어오라는 듯 문을 활짝 열었다.

태조는 현관으로 들어서며 세경의 얼굴을 살폈다. 원래부터 하얗던 얼굴이 그새 더 창백해 보였다.


“속은 괜찮아?”

태조가 손으로 세경의 뺨을 살짝 눌렀다.


“울렁거리는 건 진정됐어요. 속이 좀 허해서 그렇지.”

세경이 걱정 말라는 듯 웃었다. 그는 가지고 온 쇼핑백을 식탁 위에 올려두고 욕실로 들어갔다.


“음?”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물기를 털어내는데, 얇은 실반지 하나가 태조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반지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뭐가 이렇게 작아?”

아이 건가 싶을 정도로 반지의 둘레가 작았다. 기껏해야 그의 새끼손가락에 들어갈 정도일까.


“이거, 세경 씨 거야?”

욕실에서 나온 태조가 세경에게 반지를 보여주며 물었다.


“네. 아까 손 씻다가 잠깐 빼놨던 건데. 세면대에 있었죠?”

“어. 손가락이 되게 가느네.”

세경이 태조가 주는 반지를 약손가락에 끼워 넣었다. 그는 포장해 온 고기를 꺼내 불판 위에 올려놓았다.


“대표님은 식사하셨어요?”

“아까 간단히 먹었어.”

“부족하면 더 드세요. 된장국도 있고, 밥도 새로 했는데. 드릴까요?”

“입덧 때문에 된장국도 못 먹었으면서?”

태조가 짓궂게 웃었다. 헛구역질을 한 걸 빤히 아는데, 그걸 제가 먹을 수 있냐는 뜻이었다.


“지금은 고기도 있으니까…….”

“그냥 편하게 먹어. 나 신경 쓰지 말고.”

태조가 맛있게 구워진 고기를 세경의 접시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육즙이 가득한 고기를 소금에 찍어 입에 넣었다.

오물오물, 육즙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이 야무지게 움직였다.


“어때?”

“맛있어요. 대표님도 드세요.”

세경이 접시에 쌓이는 고기 한 점을 집어 태조에게 내밀었다. 잠시 멈칫한 그가 이내 세경이 주는 고기를 한입에 삼켰다.


“괜찮네. 아, 병원은 또 언제 가기로 했어?”

“내일모레요. 시간이 그때밖에 안 날 것 같아서요.”

“몇 시? 내가 데리러 올게.”

“예약은 다섯 시로 잡았어요. 근데 바쁘신 거 아니에요? 제가 차 끌고 가면 되는데.”

“그 정도는 낼 수 있어. 그럼 내가 4시까지 집으로 올게.”

“음, 그럼 병원에 데려다만 주세요. 집에 올 땐 택시 타고 올게요.”

“택시는 왜. 내가 기다리면 되지.”

“그게…… 진료 마치고 심 원장님하고 어딜 가기로 했거든요.”

“심 원장이랑? 어딜?”

“미술관이요. 심 원장님이 전시 티켓이 있다고 해서 같이 가자고 하셨어요.”

미술관? 심 원장이 그런데 관심이 있었나?


“그 시간에? 진료받고 가기에는 좀 늦은 시간 아닌가?”

“심 원장님이랑 친한 분인지, 편의를 봐주신대요. 그보다 대표님, 이번에 워크숍 가세요?”

“어. 매년 갔으니까.”

“그럼 올해도 늦게까지 거기 계시는 건가요?”

“올해도, 라니?”

태조가 고개를 갸웃댔다. 워크숍은 매년 참석했지만, 저녁 전에는 다시 서울로 올라오곤 했던 터였다.


“석주 선배한테 작년엔 강 상무님이랑 늦게까지 계셨다고 들었거든요.”

“아아, 그땐 석주가 잡고 늘어져서. 올해는 모르겠네. 왜, 세경 씨도 가려고?”

“한번 참석해 보고 싶은데. 스케줄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제훈이도 가고 싶어 하는 눈치더라구요.”

태조가 물끄러미 세경을 쳐다보았다. 왜 갑자기 아무 말도 안 하는 걸까?

제가 뭘 잘못 말한 게 있나 싶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태조가 말했다.


“근데 언제까지 대표님이라고 부를 거야?”

“네?”

뜬금없이 튀어버린 화제에 세경이 눈을 끔뻑거렸다.


“대표님을 대표님이라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불러요?”

“신 매니저는 제훈이, 곰은 석주 선배, 그런데 나는 대표님?”

“…….”

“내 이름이 대표도 아니고.”

세경이 젓가락을 문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지금 그러니까, 대표님 이름을 부르라고…….


“그거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렇게 불렀으니까 그렇죠.”

“지금은 그때와 상황도, 관계도 달라졌잖아.”

세경은 입에 남아 있던 고기를 꿀떡 삼켰다.

저번에 식당에서 단둘이 만나기로 했을 때, 홀 매니저에게 태조의 이름을 말했던 게 기억이 났다.

매번 대표님이라고 불렀다가 입 밖으로 태조의 이름을 뱉어냈었지. 그 간질간질했던 기분이 떠올라 발가락이 꼼지락거렸다.


“아니면 내 이름, 잊어버렸어?”

“아……니요.”

잊어버릴 리가 있나.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도 ‘진태조 대표님’인 걸.


“그럼 불러봐.”

식탁 위로 팔을 댄 태조가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어서 해보라 재촉하듯 짙은 눈썹이 한번 들썩거렸다.

세경은 붕어처럼 입을 벙긋대다 입술을 맞붙이길 반복했다. 갑자기 이렇게 호칭을 바꾸라니. 대표님이 아니면 뭐라고 불러야 하지?

진……태조 님? 태조 씨? 아니면 태조 오빠?

세경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마치 불판 위의 고기가 된 듯 제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어느 것 하나 쉬이 입에 붙질 않는 탓이었다. 고작 호칭하나 달리하는 것뿐인데, 그 거리감의 차이가 상당했다.


“태…….”

간신히 입을 열었지만, 머릿속은 지금도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태조 님은 이상하고, 태조 씨는 그나마 셋 중 무난해 보이고. 태조 오빠라고 하면, 그가 당황해할 것 같은데.

매사 여유로운 태조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드는 걸 보고 싶었지만. 대표님에서 오빠라는 호칭으로 넘어가는 건 제가 더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았다.


“태조 씨.”

결국 세경은 무난한 호칭을 골라 그를 불렀다. 어색함이 제 몫만은 아닌 듯 잠시 침묵이 흘렀다.


“…….”

세경은 머쓱함에 고기 하나를 물고 태조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슬쩍 올라간 입꼬리를 보자 별안간 그와 처음 만났던 날이 스쳐 지나갔다.

차에 올라탄 제게 인사를 건네며, 본인의 코를 장난스럽게 톡톡 두드리던 모습이.


‘잘 가요, 세경 씨.’

 
지금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응. 세경아.”

세경의 심장이 뭍에 던져진 고기처럼 팔딱팔딱 뛰어댔다.


 

***

진료를 마친 세경은 대기실에 앉아 초음파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쥐콩만 한 앙꼬가 그새 자라 아몬드만 해졌다.

동글동글한 형체에서 조금이지만 손과 발도 톡 튀어나왔다. 심장도 얼마나 세차게 잘 뛰던지, 그 소리가 제 심장 소리만큼 우렁차기도 했다.

세경은 팔랑팔랑 사진을 흔들어 바람을 쐬었다.

태조는 이틀 전 약속했던 대로, 4시에 그녀의 집을 찾아와 세경을 병원에 데려다주었다.

차 안에선 약간의 실랑이도 벌어졌다. 이틀 만에 도로 돌아가 버린 태조의 호칭 때문이었다.


‘왜 또 대표님이야?’


‘그게 며칠 만에 고쳐지기가 좀……. 그리고 대표님을 이름으로 부르는 게 익숙해지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실수할 수도 있잖아요.’

 
태조는 그 말에 납득하면서도 묘하게 불만인 얼굴이었다.

그래서 타협안을 하나 제시했다. 남들 앞에선 대표님이라 부르되 대신 하루에 두 번 정도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걸로.


“세경 씨, 많이 기다렸죠? 이제 가요.”

정리를 마친 심 원장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매번 가운을 걸친 모습만 보다, 사복을 입은 심 원장을 보니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새로웠다.

짙은 남색 재킷을 걸친 심 원장은 키를 뱅글뱅글 돌려가며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안전벨트 잘 매시고. 그럼 출발할게요.”

심 원장이 세경의 안전벨트를 확인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차는 요란한 배기음을 내는 것에 비해 느릿느릿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은은한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곤 세경에게 물었다.


“아까 입덧이 좀 있다고 했는데. 그럼 먹는 건 어때요? 임신했을 땐 옆에서 잘 챙겨줘야 하는데.”

“잘 먹고 있어요.”

“꼬물이 태명이 앙꼬라고 했죠? 앙꼬 아빠가 잘 챙겨줘요?”

“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사다 주세요.”

심 원장이 세경을 힐끗거렸다. ‘다 사다 주세요?’라고 말을 높이는 걸 보면 앙꼬 아빠가 세경보다 나이가 많은 건가 싶어서였다.


“왜요?”

“아니. 앙꼬 아빠가 세경 씨보다 연상인가 해서.”

“아…….”

뭐, 정확한 나이 차를 알려주는 것만 아니면. 연상인지 연하인지 정도는 알려줘도 상관없겠지.

세경이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네.”

“글쿠나. 그래도 나보다는 어렸으면 좋겠네.”

“왜요?”

“음, 그래야, 이것저것 이야기해 주는 것도 편하고…….”

멱살이든 머리칼이든 한번 잡을 수 있으니까?

심 원장이 끓어오르는 속내를 감추며 물었다.


“태교는요? 따로 하는 거 있어요?”

“따로 하는 건 없어요. 제가 바쁘기도 해서.”

“아직은 조심해야 할 시긴데. 조금 걱정이네. 다음 주부터는 스케줄도 많아진다면서요. 입덧도 지금보다 심해질 수 있는데. 진 대표한테 좀 챙겨달라고 해요. 이왕이면 사정 아는 사람이 옆에 붙어 있음 더 좋구.”

“대표님도 충분히 신경 써 주고 계세요. 음, 근데 심 원장님은 대표님하고 많이 친하신가 봐요?”

세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태조에게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석주 선배만큼 격의 없어 보이는 모습이, 단순한 지인 그 이상의 관계로 보였다.


“나요? 진 대표한테 아무 말도 못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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