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애인 있을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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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애인 있을걸요?
2022.11.12.
“원장님의 아버지께서 대표님 집의 주치의라 오래 알고 지냈단 소리는 들었어요.”
“아, 그것도 그런데. 나랑 진 대표 중고등학교 동창이에요.”
동창이라고? 그래서였나. 두 사람이 꽤 친해 보였던 건.
동시에 조금 궁금해지기도 했다. 학창 시절의 태조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왠지 인기도 많았을 것 같은데.
“고등학교 때는 어땠어요?”
“누구? 진 대표요?”
심 원장이 사이드미러를 보며 부드럽게 핸들을 돌렸다.
태조에 대한 질문이 그에 대한 관심으로 보일까, 걱정스러웠는데. 다행히 심 원장은 그에 대한 의심은 하지 않는 눈치였다.
“주관적인 평가가 듣고 싶어요, 객관적인 평가가 듣고 싶어요?”
둘 차이가 큰가? 세경이 도르륵 눈을 굴렸다.
“객관적인 평가 먼저요.”
“음,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진 대표가 마스크 하나는 좋잖아요. 거기에 머리도 좋고 운동도 잘해서 인기가 많았어요.”
“그럼 고백도 많이 받았겠네요?”
“받으면 뭐 해요. 본인은 시큰둥한걸.”
심 원장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여자들이 고백해오는 족족 자신은 관심 없다 하는 게 아주 재수 없었다면서.
“그럼 주관적인 평가는요?”
“하나부터 열까지 짜증 나는 놈이죠. 남은 코피 터져가며 공부하는데 쉬엄쉬엄 놀면서 맨날 성적은 나보다 위고. 능글능글거리면서 사람 놀려 먹는 거나 좋아하는!”
심 원장이 불 뿜는 용처럼 씩씩거렸다. 대표님이 이래서 멱살이 잡힐 것 같다고 했던 건가.
세경은 아랫배를 문지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앙꼬야, 지금은 귀 닫아.
“그래도 얼굴은 잘생겼다고…….”
“남들 눈에 그렇다는 거지. 얼굴도 내 취향은 아니에요. 난 순진하고 귀여운 스타일 좋아하거든.”
그러면서 산부인과 옆에 위치한 일식집 셰프님이 자신의 연인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일식집이면. 혹시 저번에 대표님이 사 오신 그 초밥집의 셰프님이요?”
“네. 회 뜰 때 은근히 꿈틀거리는 그 전완근이 얼마나 섹시하던지.”
“원장님, 방금 순진하고 귀여운 스타일이 좋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세경의 지적에 심 원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갭이 좋은 거라니까. 얼굴은 아주 순둥순둥한 레트리버 상이에요. 나중에 시간 될 때 같이 한번 가요. 보여줄게.”
애인 자랑을 마친 심 원장이 한 건물 앞에 차를 세웠다. 오늘의 목적지인 갤러리 앞이었다.
“들어가요.”
차에서 내린 심 원장이 입구에 서 있는 세경의 등을 밀었다. 갤러리는 바깥에서 본 대로 단정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를 풍겼다.
깔끔하게 깎인 잔디, 우아하게 가지를 뻗은 향나무 정원을 가로지르자 진회색 건물 두 채가 보였다.
현수막이 걸린 건물은 전시관이고, 긴 돌계단이 이어진 안쪽 건물은 사무실로 쓰이는 듯했다.
그리고 그 사무실에서 흰색 재킷을 어깨에 걸친, 여자가 내려오고 있었다.
“해정아.”
“아, 언니!”
심 원장이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여자의 시선이 제 쪽으로 향하자 세경은 가볍게 묵례를 했다.
“이 갤러리 관장님이에요. 초대장 준 사람.”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심 원장이 세경에게 속닥거렸다.
보는 순간 저 사람이 이 갤러리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만큼 여자는 이 갤러리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7시는 넘어서 올 줄 알았는데.”
“빨리 움직였죠. 아, 세경 씨 이쪽은 갤러리 J 대표인 반예령 관장님이에요.”
“처음 뵙겠습니다. 윤세경이에요.”
“반가워요. 반예령이에요. 음, 그리고 우리 처음 보는 건 아닌데.”
예령이 악수를 청하며 싱긋 웃었다. 반면 세경은 당황함에 눈을 껌뻑거렸다.
처음 보는 게 아니라니? 자신의 기억에는 없는 사람인데…….
“제가 관장님을 어디서 만났었나요?”
“심 원장 병원에서요. 그때 세경 씨 나갈 때 내가 문을 확 열어버렸거든요. 사람이 있는 줄 모르고.”
“아. 그때…….”
아주 잠깐이었는데, 그새 제 얼굴을 봤다고?
그녀의 눈썰미에 놀란 것도 잠시, 세경은 굳은 얼굴로 심 원장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사이가 꽤 친해 보이는데, 혹시 예령이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서였다.
“언니, 우리 전시 언제 봐요?”
그런 세경의 불안을 읽었는지, 심 원장이 걱정 말라는 얼굴로 코끝을 찡긋거렸다.
“아무 때나 봐도 되는데. 그보다 잠깐 사무실로 가서 차 한 잔 마시는 건 어때?”
“오, 저는 괜찮지만.”
심 원장이 의사를 묻듯 세경을 쳐다보았다. 세경은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저는 먼저 전시 보고 있을 테니까 두 분이서 편히 이야기 나누고 오세요.”
“그러지 말고 같이 올라가요. 저번에 놀라게 한 것도 미안했는데. 차 대접 정도는 하게 해줘요.”
권유는 상냥했지만 웃고 있는 얼굴에선 왠지 모르게 거절할 수 없는 포스가 느껴졌다.
심 원장의 병원에서 부딪친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이 운영하는 갤러리에 같이 전시를 보러 온 이 흐름이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혹시 심 원장님이 자신을 일부러 여기로 데려온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래요. 우리 같이 차 한잔 마시고 그림 좀 감상해요.”
그 생각을 하기 무섭게 세경에게 팔짱을 낀 심 원장이 그녀를 끌고 걸음을 옮겼다.
***
사과 껍질을 첨가한 루이보스티는 상큼한 향을 풍겼다. 거기에 꿀까지 넣었는지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김엔 달콤함도 섞여 있었다.
“…….”
그나저나 왜 이렇게 자신을 뚫어지게 보는 걸까.
찻잔을 쥔 세경은 뜨거운 찻물을 후후 불었다. 아까부터 좌측 1인용 소파에 앉은 예령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솜털의 개수라도 세는 건지 집요하게 저를 관찰하는 시선이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최근에도 이런 시선을 겪어본 것 같은데.
세경은 뜨거운 찻물을 입안에 굴리며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태조가 저를 빤히 쳐다보는 건 나름의 이유가 있다 쳐도, 반예령의 집요한 시선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얼굴을 본 거라곤 지난번 병원에서 스치듯 마주친 게 한 번, 오늘로 두 번째였다. 말을 섞은 건 오늘이 처음이었고.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예령의 시선을 무시하지 못한 세경이 제 뺨을 쓸며 물었다.
“아뇨. 뭐가 묻은 건 아니고. 세경 씨, 실제로 보니까 더 예쁜 거 같아서요.”
무방비하게 있다 훅 들어온 칭찬에 세경의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아, 감사……합니다.”
고장 난 인형처럼 세경의 몸이 뻣뻣해졌다.
누구는 저런 말을 하도 들어 능청스럽게 넘긴다지만, 세경은 아직 그 경지까지 이르진 못했다.
게다가 제게 저런 말을 해준 예령도 누구나 한번 뒤를 돌아볼 만큼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어깨 위로 떨어지는 칼단발에, 도회적인 이미지를 풍겨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있을 법했다.
“관장님도 굉장히 멋있으세요. 많이 들으셨겠지만.”
“정말요? 하긴 매일 우리 남편이 예쁘다는 말을 해주긴 해요. 근데 세경 씨.”
“네?”
“세경 씨는 향수 어떤 거 써요? 아니, 바디워시 향인가? 달콤하니 좋은 향기가 나서요.”
예령의 물음에 세경은 손등에 코를 대고 살냄새를 맡아 보았다. 바디워시보다는 향수 냄새가 더 짙게 풍겨오고 있었다.
“향수 냄새일 거예요. 시중에 파는 건 아니고 개인적으로 만든 거고요.”
“아아, 개인적으로.”
살짝 휘어진 눈꼬리에 흥미로운 기색이 어렸다. 예령은 ‘세경 씨랑 잘 어울리는 향이네요.’라고 덧붙이며 차를 홀짝거렸다.
“아, 저녁은 먹고 온 거야?”
예령이 쿠키를 하나 물고 있던 심 원장에게 물었다.
“아니요. 저녁까지 먹고 오면 너무 늦을 것 같아서.”
“그럼 전시 보고 나서 같이 저녁이나 먹자. 세경 씨도 함께요. 시간 괜찮죠?”
“네.”
세경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심 원장의 권유와 예령의 배려로 무료 전시까지 보게 되었으니 저녁 정도는 제가 살 생각이었다.
“그럼 슬슬 일어날까요?”
찻잔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자, 세 사람은 사무실 옆에 있는 건물로 이동했다.
“세경 씨, 우리 홍보용으로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될까요?”
“그러세요. 어, 그럼 제가 어디에 서 있는 게 좋을지…….”
“내가 뒤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찍을게요. 카메라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감상해요.”
음,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있으려나.
뒤에서 졸졸 따라오는 예령을 신경 쓰지 않는 척, 세경은 그림에 집중했다.
1층에 전시된 그림은 작가가 캐릭터화한 고양이들이 사람처럼 옷을 입고 있었는데, 유명 영화나 동화를 패러디한 듯 비슷한 복장을 한 고양이들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찰칵.
세경이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사이, 뒤에서 셔터 소리가 들렸다. 예령이 자신이 찍은 사진을 세경에게 보여주었다.
“어때요?”
“괜찮네요.”
“세경 씨한테도 보내줄게요. 핸드폰 번호 좀 알려줄래요?”
예령이 내민 핸드폰에 세경이 번호를 찍어주었다. 그 사이 전시관을 한 바퀴 돌아본 심 원장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언니, 여기 그림 살 수 있어요?”
“몇 작품은 가능해. 1층에 있는 건 안 되고. 여기 있는 작품들 옥션에 나가면 하나에 기본 억은 넘어가거든.”
“어억.”
억 소리 나는 가격에 심 원장이 숨을 들이켰다.
“왜, 하나 사려고?”
“하나 갖고 싶긴 한데. 억 소리 나서 못 사겠네요.”
“그만큼 벌면서.”
그래도 못 사겠다며 심 원장이 고개를 저었다. 세경은 남은 작품들을 둘러본 뒤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의 작품들은 1층에 있는 작품과 화풍이 달랐다. 1층의 작품들이 캐릭터 일러스트 같다면, 위의 작품들은 좀 더 사실적인 느낌을 주고 있달까.
세경은 많은 작품 중, 엄마 고양이 품에서 몸을 웅크린 아기 고양이 그림 앞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
몽글몽글하니 보고만 있어도 포근한 느낌이 드는 그림이었다. 꿈에서 본 새끼 호랑이가 생각나기도 했고.
“작가가 불우한 어린 생활을 보냈는데, 그때 위로를 받았던 게 길거리에 있던 고양이들이었대요. 그래서, 이렇게 자기 작품의 모티프로 삼은 거라고.”
어느새 다가온 예령이 작가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이 그림이 마음에 드나 봐요?”
“네. 귀엽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해서…….”
웅웅. 그때 조용한 전시관에 핸드폰 진동 소리가 울렸다. 세경은 가방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아, 잠시만요.”
발신인을 확인한 세경이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피했다. 발신인은 최정란 여사, 세경의 모친이었다.
“응, 엄마.”
- 세경아. 너 지금 집에 있니?
“아니. 지금 밖에 있는데.”
- 일하는 중이야?
“그건 아니고. 잠깐 전시 보러 왔어요. 집에는 왜? 뭐 보냈어요?”
- 아니. 엄마 지금 김포 공항이거든.
“김포 공항?”
놀란 세경의 목소리가 전시실까지 울려 퍼졌다. 세경은 난감한 눈으로 저를 보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연락도 없이 어떻게…….”
- 원래 내일 올라오려고 했는데, 애들이 카페를 봐줄 테니 하루라도 일찍 더 올라가라면서 보내더라고. 넌 일 다 보고 천천히 와. 엄만 먼저 집에 가 있을게.
“뭐 또 무겁게 싸 들고 온 건 아니지?”
- 음, 조금만 싸 왔어.
말은 저래도 양손 가득 뭔가를 가져왔을 거였다. 세경은 일단 엄마에게 조심히 오라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미안한 얼굴로 예령에게 다가갔다.
“어쩌죠. 저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은데.”
“누가 오셨어요?”
“네. 어머니가 제주도에서 올라오셨다고 해서요. 지금 김포 공항이라고.”
“그럼 가봐야죠. 내가 집까지 바래다줄게요.”
심 원장의 말에 세경은 그럴 필요 없다며 손을 저었다.
“아뇨. 그렇게까지 하실 필욘 없어요. 저는 택시 타고 갈게요. 원장님은 천천히 둘러보고 오세요.”
“에, 그래도…….”
심 원장이 예령을 힐끗거렸다. 짧은 만남이 아쉬운 듯 예령은 섭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쉽네요. 같이 식사도 못 하고.”
“다음에 심 원장님과 같이 자리를 만들어 볼게요. 오늘은 감사했습니다.”
“그래요. 다음에 한 번 더 봐요.”
꾸벅 고개를 숙인 세경이 전시관을 나섰다.
택시를 불러 준 예령이 심 원장과 같이 세경을 배웅했다. 예령은 멀어지는 택시를 바라보며 턱을 매만졌다.
“잠깐 본 거지만, 나쁘진 않네. 솔직히 저만한 인지도면, 좀 까칠해도 그러려니 할 텐데.”
“그쵸. 세경 씨 차분하면서도 뭔가 귀엽지 않아요? 얼굴도 예뻐서 완전 내 동생 삼고 싶다니까요.”
“그러게. 마음에 드는데. 해정아, 세경 씨 우리 도련님이랑 잘 어울릴 거 같지 않아?”
“……에?”
예령의 말에 심 원장이 얼굴이 일그러졌다.
언니 그게 무슨 끔찍한 소리예요. 왜 우리 꽃사슴을 그런 능글맞은 짐승에게 갖다 붙여요?
“도련님이라면, 태조 말하는 거죠?”
“응. 왜? 안 돼?”
네. 안 되죠.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인데.
“그게…… 세경 씨, 애인 있을걸요?”
“뭐?”
이번엔 예령의 얼굴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