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대표님 한 번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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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대표님 한 번 볼 수 있을까?
2022.11.16.
오늘 윤세경이 온다고 해서 그녀에 관한 기사도 미리 검색을 해 본 터였다.
사건 사고에 휘말린 적도 없고 사생활도 깨끗했다. 연기를 잘한다고 호평을 받은 건 말할 것도 없었고.
하지만 예령이 본 기사 중에 열애설과 관련된 기사는 없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애인이라니? 이미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채고 저런 말을 하는 건…….
“애인 누구? 혹시 우리 도련님?”
예령이 다시 태조를 언급하자 심 원장이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왜 또 태조를 갖다 붙여요. 우리 꽃사슴 불쌍하게.”
“우리 도련님이 뭐 어때서. 네 타입이 아니라 그렇지 객관적으로 보면 그만한 사람도 없잖아.”
“그거야…….”
심 원장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예령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라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냉정하게 따지면 태조만한 남자도 없긴 했다. 좀 재수 없지만 재력, 외모, 능력,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었으니까.
문제는 세경에게 애인이 없어도 태조는 안 된다는 거였다.
이미 앙꼬 아빠가 있는 걸, 뭐.
“태조가 누구랑 엮어준다고 사귈 사람이에요? 그 녀석 자기 소속사 여배우들이랑 사적으로 엮이는 거 싫다고 고백하는 족족 다 거절했잖아요.”
“그거야 예전에 오여리가 사고 친 거 뒷수습하는데 질려서 그런 거지.”
“오여린지 모지린지……. 아후, 암튼 세경 씨도 태조네 회사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걔도 알걸요? 세경 씨한테 애인 있는 거.”
“정말? 우리 도련님도 알고 있다고?”
예령이 놀라 되물었다. 심 원장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세경 씨 애인은 누군데? 유명한 사람이야?”
“어, 그게…….”
심 원장이 시원하게 답을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사실 그녀도 앙꼬 아빠가 있다는 것만 알지 연상이라는 걸 제외하면 그 사람의 정확한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글쎄요. 그것까진 저도 잘…….”
“애인 있다는 건 알면서, 누군지는 몰라?”
“네. 저도 본 적은 없어서요. 근데 열애설이 안 난 거 보면 일반인 아닐까요?”
연인은 있지만, 누군지는 모른다?
예령은 뭔가 시원스럽지 않은 얼굴로 입술을 잘근거렸다.
제 촉은 분명 태조와 세경의 관계가 범상치 않다 말하고 있는데.
“아니라고…….”
심 원장의 말을 들으니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
서류를 보고 있던 태조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한쪽 눈을 들썩거린 그는 아무도 없는 사무실을 쓱 둘러보았다.
“기분 탓인가?”
왠지 모르게 뒷골이 당기는 느낌이었는데…….
비스듬히 목을 꺾은 그는 뻑뻑한 뒷덜미를 주무르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어스름했던 창밖은 어느새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태조는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진료를 받고 난 뒤, 세경은 심 원장과 같이 전시를 보러 간다고 했었다. 병원 예약이 5시였으니 지금쯤이면 얼추 관람을 마칠 시간이었다.
“아직도 갤러리에 있으려나?”
그러고 보니 어디 갤러리에 가는지 듣지 못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태조가 세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심 원장의 성격상 세경을 홀로 보내진 않겠지만, 어차피 회사에 있는 거 그녀가 밖에 있다면 그가 데리러 갈 생각이었다.
- 네, 대표님.
“어디야? 전시는 다 봤어?”
태조는 핸드폰을 어깨에 끼운 채 통화를 이어갔다. 책상 위를 정리하는 손은 퇴근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 중간에 보다 나왔어요. 지금 집에 가는 중이고요.
“집에? 심 원장이 데려다주는 거야?”
- 아뇨. 원장님은 좀 더 보고 오시라고 하고, 저만 먼저 나왔어요.
노트북을 끄던 태조의 손이 멈칫거렸다.
당연히 심 원장과 함께 있을 줄 알았건만. 혼자 나왔다고?
“왜? 무슨 일 있어?”
- 좀 전에 엄마한테 연락이 왔거든요. 공항에 도착했다고.
“어머니가? 오늘 오시는 줄 몰랐던 거야?”
- 네. 원래는 내일 오려고 했는데 일정을 좀 앞당기셨나 봐요. 미리 알려줬으면 마중이라도 나갔을 텐데.
핸드폰 너머에서 세경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가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면 울지 않을까 걱정을 하더니. 막상 그 상황이 다가오자 생각이 많아지는 듯했다.
“오늘 어머니한테 이야기할 거야?”
- 상황 보고요.
“내가 집으로 갈까?”
세경의 모친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니 혼자보다는 둘이 같이 있을 때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다.
기회가 되면 자신이 아이 아버지라 밝힐 수도 있을 테고.
- 아니요.
하지만 잠시 고민하던 세경의 입에선 거절의 말이 흘러나왔다.
“왜? 이왕 말씀드릴 거 내가 같이 있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 대표님까지 나서면…… 엄마가 많이 놀라실 거예요. 일단 제가 먼저 말씀드려 보고요. 아, 저 이제 내려야 해서. 이따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어렴풋이 택시 기사님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전화가 뚝 끊어졌다. 태조는 무심하게 끊어진 핸드폰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음.”
목을 울린 태조가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어쩐지 묘하게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사귀기 시작하면서 전보다 더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모친에게 소개할 정도는 아니란 건가?”
세경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그녀가 여전히 자신과의 관계에서 한 발 뺄 준비를 하고 있는 거 같아 입안이 썼다.
하긴 알고 지낸 지는 꽤 됐어도 연인으로 발전한 지는 얼마 안 됐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모친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면서도 아이 아버지인 자신을 소개하지 않는 건 좀 아니지 않나?
결혼도 안 한 딸이 임신을 한 거였다. 그것도 대중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그 소식을 들은 세경의 모친이 충격을 받을 거라는 건 쉬이 예상이 됐다.
당신의 딸이 아이를 혼자 키울지, 아니면 아이의 아버지라는 작자와는 앞으로 어떻게 할지 걱정이 되기도 할 터였고.
당장 오늘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앞으로의 일을 설명해도 모자랄 판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뒤로 물러서 있어야 하는 이 상황이 태조는 답답하기만 했다.
게다가 세경의 모친은 제주도에 머물고 있지 않나.
“그러니 이번에 인사드리지 못하면 내가 직접 제주도로 내려가야 하는데…….”
휴식 차 제주도에 내려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문제는 그도 당분간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거였다.
아직 임신 초기인 세경을 홀로 두는 게 걱정되기도 했고.
“역시, 이번에 한 번 인사는 드려야겠는걸.”
지금 오셨다는데 내일 아침에 내려가진 않으시겠지.
차 키를 든 태조가 사무실을 나섰다.
***
달칵.
현관문을 열자 센서등이 환하게 밝혀졌다. 세경은 다급하게 집 안으로 들어가 소파 위로 가방을 던져 놓았다.
엄마가 오늘 오는 줄 알았으면 어제 청소를 해놨을 텐데. 갑작스러운 방문이라 뭐 하나 제대로 준비된 게 없었다.
세경은 흐트러진 물건들을 치우고 청소기를 돌렸다. 엄마에게 지금 어디쯤이냐고 메시지를 보내자 곧 도착할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녀는 소파에 두었던 가방을 들고 침실과 이어진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재킷 대신 카디건을 들고나오는데, 문득 침대 옆에 놓인 협탁에 시선이 멈추었다.
“따로…… 옮겨놓지 않아도 되겠지?”
협탁의 첫 번째 서랍엔 산모 수첩과 앙꼬의 초음파 사진이 들어 있었다.
정란에겐 오늘이나 내일쯤 자신의 임신 사실을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그때 물론 초음파 사진도 보여주려 했고.
고작해야 몇 시간인데, 그사이 저기 있는 산모 수첩을 엄마에게 들킬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세경은 협탁 서랍을 열어 책 위에 올려져 있는 산모 수첩을 그 아래 숨겨 놓았다.
그녀는 방을 한번 둘러보곤 정문 앞으로 나갔다. 얼마 안 가 헤드라이트 불빛이 번쩍이며 택시 한 대가 이쪽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미끄러지듯 달려온 택시는 세경의 앞에서 멈추었다. 달칵. 뒷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반가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왜 나왔어. 아직 추운데.”
“엄마 기다렸지. 짐도 많을 것 같아서 들어주려고.”
“얘도 참. 나 가져온 거 별로 없다니까.”
그렇게 말한 정란은 택시 뒷좌석에서 묵직한 짐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척 보기에도 많아 보이는 감귤즙이었고, 다른 하나는 스티로폼 포장재에 싸여 있었다.
“그건 뭐야?”
세경이 모친의 손에서 감귤즙 박스를 가져갔다. 다른 짐도 가져가려고 했지만 정란이 무겁다며 세경의 손을 찰싹 쳐냈다.
“이거? 제주 흑돼지. 오늘 너 보러 간다니까 옆에 고깃집 사장님이 특별히 좋은 걸로 챙겨주시더라고.”
“아, 정말? 다음에 가면 인사드려야겠다.”
“그래. 거기 요즘 얼마나 유명한지 몰라. 웨이팅도 길고. 너 갈비찜 먹고 싶다고 했잖아. 엄마가 돼지 갈비찜 해주려고 하는데. 괜찮지?”
“응. 난 좋아.”
현관 앞에 도착한 세경이 문을 열었다.
주방으로 들어간 정란이 짐을 푸는 동안 세경은 박스에서 감귤즙 하나를 뜯어 입에 물었다.
“그거 맛있지?”
세경이 비닐 팩을 쪽쪽 빨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임신을 해서 그런가. 새콤달콤한 감귤즙이 입에 착착 달라붙었다.
“엄마, 저녁은?”
감귤즙 한 팩을 해치운 세경이 두 번째 팩을 뜯으며 물었다.
“안 먹었는데. 너는?”
“나도. 우리 나가서 저녁 먹을까?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글쎄다. 시간이 좀 늦어서. 엄마는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긴 한데.”
“국물? 국물이라.”
고개를 젖힌 세경이 감귤즙을 톡톡 털어 넣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태조가 사다 준 갈비탕 국물이 깔끔하니 맛있었었지.
가게 상호를 떠올린 세경이 핸드폰으로 가게 위치와 마감 시간을 검색했다.
“우리 갈비탕 먹을까?”
“갈비탕? 내일 갈비찜 해주려고 하는데. 그걸 먹자고?”
“아니, 뭐. 그게 고기 먹으려고 시키는 건가. 국물 먹으려고 하는 거지.”
“음, 그렇긴 한데…….”
정란이 의외라는 눈으로 세경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세경의 발끝까지 내려갔다가 다시금 위로 쭉 올라왔다.
“왜, 왜 그렇게 봐?”
뭔가 탐색 당하는 느낌에 세경이 지레 찔려 말을 더듬었다.
“아니. 네가 이렇게 고기를 좋아했나 싶어서.”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매일 먹을 만큼 즐겼던 건 아니었다.
“바빠서 못 먹고 지내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지금 보니 조금 살이 붙은 거 같기도 하고.”
“나…… 살쪘어?”
벌써 임신한 게 티가 나는 걸까? 세경이 걱정스러운 마음에 두 손으로 뺨을 꾹 눌렀다.
“그냥 딱 보기 좋은 정도? 너 예전에 너무 말라서 엄마가 걱정 많이 했잖아.”
“예전, 언제?”
“너 가수 활동할 때. 팔에 뼈밖에 없어서 내가 얼마나 속상했는지 알아? 춤추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뼈가 부러지지 않을까 얼마나 걱정했는데.”
“에이. 난 또. 저번에 봤을 때보다 많이 쪘다고.”
“넌 좀 더 쪄도 돼. 살이 붙는 체질도 아니잖아. 그래도 잘 먹고 다니는 거 같아서 엄마는 좀 마음이 놓인다.”
“이제 더 바빠질 텐데 지금 잘 먹어둬야지. 일단 나가요. 더 늦기 전에 가서 밥부터 먹자구요.”
방에서 차 키를 가지고 나온 세경이 정란과 집을 나섰다. 차에 시동을 걸자, 조수석에 탄 정란이 안전벨트를 쭉 잡아당겼다.
“근데 웬 갈비탕이야?”
“아니, 저번에 먹었는데 국물이 깔끔하니 맛있더라고. 엄마가 딱 좋아할 스타일이야.”
“으음. 여기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을 텐데, 용케 잘 알고 있네? 누구한테 추천받아 간 거야?”
“추천이라기보단…… 얻어먹었다고 할까?”
“누구한테?”
그냥 우연히 발견했다고 할 걸 그랬나.
세경이 곤란한 듯 맞붙은 입술을 우물거렸다.
“대표님한테.”
“지금 소속사 대표님?”
“응.”
“어머나, 그분이 밥도 사주셨어? 그러잖아도 매번 명절 선물도 좋은 거 받아서 고맙단 인사도 하고 싶었는데.”
화사하게 웃은 정란이 두 손을 맞잡았다.
“딸, 서울 온 김에 대표님 한 번 볼 수 있을까?”
아니요.
세경이 속으로 대답을 삼켰다.
아직은 좀 이른 감이 있었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진 대표가 엄마에게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바쁘셔서 만나기 힘들 거야.”
억지로 태조를 바쁘게 만든 세경이 차의 속도를 높였다.